영어 바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턱에 10 바늘을 꿰매고도 근 한 달이 지나도록 실밥을 뽑지 못했다. 턱에는 여전히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병원에 갈 돈이 없었다. 밥을 먹은 지가 언제인지 창자 초차도 연동운동을 잊었다. 살 길을 찾아야 했다. 대학 구내 취업보도과를 찾아가 아르바이트 신청서를 제출했다. 담당자는 높게 쌓여 있는 신청서를 가리키며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라고 했다. 좋은 자리 있으면 먼저 알선해 달라고 졸랐다. 한참을 시루다 담당자가 내 신청서를 제일 앞에 넣어 주었다. 지방에서 온 티가 팍팍 나는 사투리에, 턱에는 반창고, 더럽고 헤진 군복 바지가 그의 동정심을 자극했음에 틀림없다.
며칠 뒤 취업보도과에서 조교를 통해 연락이 왔다. 학교에서 대략 6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개인병원 야간 경비 자리가 있다고 했다. 3층 규모의 정형외과였다. 원무과장과의 면접은 형식적으로 끝났고 취업이 확정되었다.. 연중 휴일 없이 저녁 7시부터 아침 8시까지 일하고 월 49만 원을 받기로 했다. 게다가 원무과장이 직접 실밥을 뽑아 주었다. 다음날 저녁부터 일하기로 하고 돌아왔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굶주림의 끝이 보였다.
병원에서의 일은 재미있었다. 진료가 끝나면 문을 잠그고 당직 간호사의 일을 도왔다. 야간에 입원 환자의 호출을 받으면 당직 간호사를 부르는 일, 응급환자가 오면 의사를 호출하는 일, 커피 자판기를 청소하고 동전을 채워 넣는 일, 아침에는 청소를 하는 일 등 크게 어려운 일은 없었다. 입원 환자들은 밤에 자주 외출을 했다. 그럴 때면 자다 일어나 문을 열었다 잠그기를 여러 차례 해야 했다. 소위 나이롱환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밤만 되면 인근 가게로 가 소주를 진탕 마시고 돌아왔다. 덕분에 수면 시간은 매우 부족했다.
당시 <이야기 속으로라는 프로가 있었는데 주로 귀신이 나오는 이야기가 실감 나게 묘사되었다. 그 프로를 보고 나면 기분 나쁘고 공포의 여운이 꽤 오래갔다. 그날 나는 그 프로를 보지 말았어야 했다. 하필 병원이 배경이었다. 시청을 마치고 나니 문득 사위가 두려웠다. 거울을 보면 내 뒤로 귀신이 보일 것만 같았다. 평소에 나는 좁은 주사실에서 잠을 잤다. 하지만 그날은 주사실에서 잠을 잘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귀신이 커튼을 헤치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원장실로 갔다. 원장실은 넓었고 진료용 간이침대가 있었다. 창문 너머로는 이웃한 약국과의 사이에 심어진 나뭇가지가 무성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깬 것은 새벽 두 시경이었다. 어두운 창문 밖으로 스쳐가는 그림자가 보였다. 순간 진짜 온라인 카지노 게임인 줄 알았다. 계속 두려움에 떨며 창문 밖을 주시하는데 그것은 분명 사람의 그림자였다. 손전등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나무 사이 어둠 속에 누군가가 있었다. 손전등을 비추자 100kg은 족히 넘음직한 거구의 사내가 양손에 큰 비닐봉지 가득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누구냐는 물음에 그는 대답 없이 비닐을 내려놓으려 했다. 그가 비닐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나에게 덤벼들어 나를 한방에 짓이기고, 타박상과 골절상을 입어 길에 널브러질 내 모습이 그 순간 재빠르게 그려졌다. 그가 비닐을 내려놓으면 안 되었다. 나는 뒤로 물러나며 그와의 거리를 두었다. 나에게서 전투 의사가 없음을 읽었는지 그는 다시 비닐을 집어 들고 갓길에 주차해 둔 차를 타고 사라졌다. 혹시 몰라 차번호를 외워두었다.
아침에 학교를 가려고 병원을 나서는데 약국 앞에 순찰차가 있었다. 새로 입고된 약품 중 상당수가 사라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간밤의 그 사내는 약품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약국을 털러 온 도둑이었음에 틀림없다. 경찰에게 목격담을 말하고 차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날 저녁 출근길에 약국을 들렀다. 주인이 신고해 주어서 고맙다며 온라인 카지노 게임 한 병을 내밀었다. 조회된 차량은 대포차라 했다. 하지만 덕분에 절반 가량의 약품을 보전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정말 고마웠다면 그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 한 병이 아니라 한 박스라도 주었어야 했다. 아무튼 그날 이후 더 이상 귀신은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정말 무서운 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