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게임자의 최후
어리석은 날들
얼마 전 고등학생들이 교사의 컴퓨터에 해킹 앱을 깔아 카지노 게임문제를 유출했다는 기사를 보고 문득 컨닝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컨닝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시험지를 통째로 훔쳤으며 공범도 있으니 차라리 특수절도에 가깝다. 교권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40년은 족히 지났으니 공소시효가 만료된 지 오래고 당시 난 촉법소년이었으니 내 기억 속에서만 전과자다. 물론 부끄러운 기억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지 6학년 때인지 기억이 설핏하다. 그때 한 학급이 60명 정도 되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임원이 많았다. 요일에 따라 반장과 부반장이 있었고, 회장, 총무도 있었다. 분단마다 분단장이 있었고, 청소시간엔 청소반장이 또 요일마다 있었으니, 학급의 절반 정도가 임원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에게 책임감과 리더십을 길러주려는 교육적 의도가 있지 않았나 싶다. 당시 나는 공부를 썩 잘하지도 않았지만 어찌어찌하다 목요일 반장이 되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당시 담임 선생님은 방과 후에 꼭 반장이 남아 있도록 지시하셨다. 남아서 쪽지시험 채점을 하거나 일기장을 제출하지 않은 학생을 체크하는 등 이런저런 선생님의 잡무를 도왔다. 딱히 시킬 일이 없는 날에도 꼭 남아서 교실을 지켜야 했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일 터다. 목요일이면 담임 선생님은 꽃꽂이를 하는 교사 동호회 활동을 하셔서 나는 늘 교실에 홀로 있었다.
문제의 그날은 지시받은 일도 없고 해서 이튿날부터 있을 월말고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성적으로 줄 세우기가 자행되던 시절이었다. 카지노 게임이 있는 날이면 우리는 가방을 책상 가운데 올려 짝지와 벽을 쌓았다. 머리 위로 두 손을 올리고 실눈을 감고 있으면 선생님은 책상의 맨 아래 서랍을 열어 카지노 게임문제지를 꺼내셨다.
아, 그때 내 귓가에 사탄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교실엔 아무도 없고 선생님은 한 시간 이상 교실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지만 나도 몰래 선생님의 서랍을 열었다. 전과목 시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국어와 산수를 비롯한 대여섯 과목의 시험지를 꺼냈던 것 같다. 가슴이 콩딱거려 전과목 시험지를 모두 꺼내지는 못했다. 분명 내 의지가 아니라 사악한 악마의 짓이었다.
혼자서 답을 찾아내기엔 벅찼다.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친구들 몇을 불렀다. 절대 함구할 것을 다짐받고 각자 자신 있는 문제를 풀어 답을 공유하기로 했다. 나를 비롯해 모두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아니었기에 답을 신뢰하기는 어려웠지만 당시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다. 우리는 초등학생이었지만 참으로 영악했다. 정답일지 오답일지도 모를 답을 베껴 들고 각자의 평소 성적에 비례하여 받을 점수를 책정했다. 가장 공이 혁혁한 내가 100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기로 하고, 나머지는 평소 성적보다는 높게 받되 반드시 몇 개씩은 틀리도록 점수를 배분했다. 집에 가서 답을 외우든 컨닝 페이퍼를 만들든 각자 알아서 하기로 했다. 혹 카지노 게임행위가 발각될 경우 단독범행인 걸로 주장할 것을 굳게 맹세하는 것으로 우리의 공모는 끝이 났다. 문제지는 잘게 찢어 푸세식 화장실 변기통에 던져버렸다.
집에 와서 답을 외려 하니 좀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꾸 숫자가 헷갈렸고 머릿속에 정연히 기억되지 않았다. 그러다 묘수를 떠올렸다. 허리띠 안쪽에 답을 적으면 감쪽같을 것 같았다. 깨알같이 적었지만 허리띠 전체에 가득 찼다. 시험 전날 그렇게 맘 편히 잠을 잔 적은 없었다. 다음날 학교로 가는 발걸음이 산뜻했다. 정답은 내 허리띠에 있었지만 욕심을 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음으로써 의심을 받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스스로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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