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론산바몬드 Sep 25. 2022

무료 카지노 게임에 살고 싶다

어리석은 날들

1980년대 초반, 아침이면 신문사절을 외치는 집주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을 투척하는 배달원 사이의 실갱이를 더러 볼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무렵 아버지는 자주 신문을 읽는 모습으로 내게 각인되어 있다. 없는 살림이라 구독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디선가 신문을 구해 읽곤 했다. 다 읽은 신문은 A4 용지 크기로 잘려져 화장실로 직행했고, 볼일을 본 후 뒤를 닦는 용도로 그 쓰임을 다했다.


아버지가 신문을 읽고 나면 나도 하릴없이 신문을 뒤적이곤 했다. 국한문을 혼용하던 시절이라 눈으로라도 신문을 읽는 것이 용이하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만평과 4컷짜리 만화를 보는 게 고작이었다.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텔레비전 프로그램 편성표였다. 인터넷이 없는 그 즈음에 당일과 이튿날의 편성표까지 알려주는 신문의 역할은 컸다. 어린 내게는 그랬다.


국민학교 5학년 무렵에 텔레비전이 생겼던 것 같다. 아버지가 어디선가 주워 온 고물이었는데, 그래도 첫 텔레비전이라 무척 애착이 갔던 기억이 난다. 당시 텔레비전은 쭉 뻗은 네 개의 다리가 있었고 브라운관을 가리는 여닫이문도 있었다. 최근에는 레트로 텔레비전으로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 고물 텔레비전은 전파를 잘 잡아내지 못했다. 전파가 잘 닿지 않는 달동네였던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내가 채널을 돌리며 텔레비전 수신 상태를 얘기하면 마당에 있던 형이 아버지에게 수신호로 전달했고, 멀리 언덕에서는 아버지가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래봤자 미군방송 AFKN과 KBS만이 겨우 잡혔다. 채널 전환 손잡이 버튼은 돌릴 때마다 드르륵 소리를 냈고 간혹 빠지기도 했다.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조작하는 지금도 '채널을 돌린다'는 표현을 쓰는 건 그때부터 비롯된 것이리라.


당시에는 아이들이 볼만한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KBS는 어린이 프로그램에 더더욱 인색했다. 1980년대 초 프로야구가 출범한 뒤로 주말에는 오후 내내 야구를 방영했다. 신문 편성표에 프로야구 중계라 적혀 있으면 무척 좌절했던 기억이 난다. 야구에 관심 없던 나는 야구가 시작되면 아예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최소 대여섯 시간 안에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편성표를 볼 때마다 내 눈길을 끄는 문구가 있었다. 가령 '우천시 톰과 제리'같은 문구였다. 부산에 살고 있던 나는 그게 늘 불만이었다. 우천시는 얼마나 좋은 곳이기에 야구중계할 시간에 만화를 방영한단 말인가. '우리도 부산말고 우천으로 이사가면 안 될까요?' 한번도 말한 적은 없지만 늘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