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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아영 May 01. 2025

지구와 충돌카지노 게임 사이트 않고 착륙하려면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신기후체제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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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은 소감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내가 '대지의 것들'임을 깨달았다"가 되겠다. 사두고 읽지 못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 이 책의 원제는 <어디에 착륙할 것인가? Où atterrir?인데, 한국에서 번역출판될 때의 제목은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으로 바뀌었다. 영어 제목은 <Down to Earth인데, 영 아닌 거 같고, 한국어 제목 번역이 쫜득쫜득하게 입에 붙는다.


이 책은 "(소위 '엘리트'라고 불리는) 핵심 지배계층이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내기에 충분한 공간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p.17)" 결론 내린 상황에서 출발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번영할 세계(p.18)"로 나아가는 것이 무의미한다고 결정한 "지배계층은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것을 포기하고, 세상으로부터 그들 자신만을 피신시키기 시작했다(p.18)"는 것이다. 더 이상 함께 나아갈 공동의 지평선이 없는 현실에서 라튀르의 질문은 지극히 실존적이다.


p. 23
문제의 존재를 부정할 것인가, 아니면 착지할 장소를 물색할 것인가?


라투르는 함께 나눌 공통세계 common world가 사라진 이 상황에 '저항'하기 위해 어딘가에 '착륙'해야 하고, 그 '착륙'할 곳을 위한 새로운 지형과 그 위치가 표시된 지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지도의 필요성에 모두가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기후위기가 음모론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그 음모론에 큰돈을 지출하는 세력이 존재한다. 기후위기를 부정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은 무엇인가? 공통의 세계가 없어도 살 수 있을 만큼 준비된 초엘리트-부유층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주민이 이미 되어버린 이 상황에서 라투르는 기후문제에 대한 입장이 정치적 지형에서 좌파 또는 우파라는 정체성보다 훨씬 더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라투르는 '근대화'라는 것이 로컬을 철저하게 버리는 일이었으며 계속해서 사람들을 몰아내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사람들을 내몰았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내몰릴 처지에 놓인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러나 현대의 정치는 모두가 공격받고 있다고 느낄 뿐, 누구 하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공황상태에 있다. 기후문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어도 대안을 내놓기 어려운 상황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쪽은 이상주의자로 내몰리고 현실을 바꿀 방도는 점점 더 요원해지는 악순환. 정치 영역에서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고, 좌와 우를 나누는 단선적인 구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세계에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찾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투르는 생태학이 이전에는 의제가 아니었던 것들을 의제화카지노 게임 사이트 데 큰 기여를 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생태학의 실패를 이야기한다. 이 생태학의 실패는 근대화할 것인가, 생태화할 것인가라는 선택지를 앞에 두고 개입할 지점을 좀처럼 찾지 못카지노 게임 사이트 생태주의 운동의 잠정적 실패를 의미한다. 라투르는 생태운동의 실패 원인을 "근대인들이 상정한 시간의 화살이란 덫 자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우파와 좌파, 수구와 진보 모두와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p.74)"이라고 진단했다.


이렇게 모두와 거리를 두려는 운동은 생태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의 선명성이 중요해 보이는 운동의 영역에서 옳고 또 옳은 것을 추구하는 과정은 옳지 않은 존재들과 거리를 두는 행위를 불가피하게 만든다. 모든 선택에 더 옳은 선택이 분명히 있겠으나, 그 옳음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더러움도 묻히지 않겠다는 의지로 떠난 여정에서 과연 어디인지 모를 그 순백의 세계에 도착할 사람은 누구이며 몇 명이나 될까? 나는 그 순백의 세계에 도착하고 싶지 않다. 그냥 더러운 세상에서 더러움을 묻히고 함께 살면서 그 더러움을 양분 삼아 내 몫의 꽃을 피우고 싶을 뿐. 그러나 이 역시 상대적인 것이어서 나 역시 어떤 누군가를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거리를 둔다는 아이러니. 오, 이 올바름의 labyrinth.


라투르는 진보가 지향하는 그 "세계가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하는 데에는 시간을 쓴 적이 없다(p.90)"고 말한다. 예견카지노 게임 사이트 못했다기보다는 예견카지노 게임 사이트 않은 책임이 모두에게 돌아오고 있는 이 시점에, 반성적으로 돌아보건대 물질세계를 계급론에 기반하여 분석했던 좌파의 접근이 물질세계라는 것을 오히려 추상화시키고, 이상화시킴으로써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장악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눈앞의 현실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그 현실에 천착하는 운동이란 이것 아니면 저것, 또는 올바름과 더 올바름이라는 이차원적이고 단선적인 지형에서는 실현가능카지노 게임 사이트 않다.


라투르는 책에서 근대화 이전의 로컬(유인자 1)과 근대화된 글로벌(유인자 2)을 양극으로 하는 벡터를 그려두고, 그 벡터에 다양한 유인자들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지구와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착륙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한다. 그리고 '외계'를 '유인자 4', '대지'를 '유인자 3'으로 삼은 그림에서 좌파도 우파도 아닌 존재들을 위치시킬 수 있는, 즉, 착지할 수 있는 땅을 찾아볼 수도 있을, 두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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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존 벡터를 활용하는 방식만으로는 새로운 좌표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 좌/우의 벡터를 바꾸는 일이 모두에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좌/우 구분이 이미 낡은 것임을 알면서도 다른 벡터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기존 벡터에서 맴돌 뿐이라는 것이다. 좌/우 또는 보수주의/자유주의라는 온갖 용어들은 정동이 실려 있어 수많은 감정들을 동요시키는데, 감정이 범람하는 상태라고 해서 사회적으로 합의된 개념을 갑자기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라투르는 용어에 천착하는 방식 말고 아예 방향을 다르게 하는 것을 제안한다. '대지'를 향하는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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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벡터가 아닌 글로벌과 대지, 로컬과 대지가 양극에 위치하는 새로운 벡터들을 넘나드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존재들의 새로운 동맹을 만들 수 있다면, 그 동맹이 새로운 정치적 행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어렵고도 도전적인 일이다. "기존의 줄 세우기에서 명백히 '반동주의자'였던 사람 중에서 협력자를 찾아야(p.79)"하고 "기존의 기준에서 볼 때 분명히 '진보주의자'이고 아마도 '자유주의자' 또는 '신자유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과도 동맹을 맺어야 할 것(p.79)"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찾는다는 것은 근대를 향하려는 힘과 대지를 향하려는 힘 사이에서 계속해서 흔들리고 갈등하면서, "공공생활에 합당한 갈등의 원칙을 계속 작동시키면서 동시에 그 지향점을 바꿀 수 있는가(p.77)"의 문제이다.


라투르는 이 책을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 설파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며 설득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내가 그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집중하다 보면, 해보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어떻게 할 것인가'의 질문에 봉착하고 머리를 쥐어뜯게 된다.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이유는, 실제로 이런 새로운 행위자들이 출현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지만 유효하지 않아도 부정할 수 없는 계급론의 한계도 명료해 보이고, 기존 벡터를 이탈하는 이들이 다수가 될 수 있을 확률을 높이는 방법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할 수 있어!라는 이상적 선언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라투르는 새로운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동맹이 출현하기 위해 로컬의 지지자들과 대지의 지지자들이 협상하게 되었을 때, 대지의 것으로서의 소속감을 느끼는 것이 로컬의 소속감과는 동질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로컬과 대지의 만남이 민족 동질성이나, 역사주의와 같은 것들과 뒤섞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렇지! 결코 동질성으로 가서는 안되지! 어렵기도 하고 지난하기도 하겠지만, 라투르가 말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찾아나가는 협상이 시작된다면, 그 어떤 것보다도 혁신적이며, 실존적이고, 미묘하며, 기술적이며 좋은 의미에서 인공적일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한다.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 아니라 대지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는 것, 이 감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라튀르가 말한 정치는 가능해진다. 나는 어떠한가? 대지의 것으로서 나의 소속감에 대한 감각은 무엇인가?


2006년부터 3년간 비건으로 살다가, 멸치액젓과 멸치국물에 굴복하여 페스코 베지터리언으로 전환한 나는 채식주의자로서의 소속감을 느끼는가? 별로 못 느낀다. 한국인으로서의 소속감을 느끼는가? 별로 못 느낀다. 통일지향의 운동에 소속감을 느끼는가? 별로 못 느낀다. 평화운동이라는 영역에 소속감을 느끼는가? 이것은 상대적인데, 다소 느낀다고 봐야겠다. 하지만 그 소속감이 동질감이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오다. 내 유일한 소속감은 나의 원가족에 대한 소속감인 것 같은데, 그 감각으로부터 소속감에 대한 이해를 확장한다면 발 밑의 땅을 잃어버린 모든 조재, 그러니까 디디고 선 공통의 땅이 있었다가 더 이상 없게 된 그 공통의 상실에 기반한 감각, 즉 '대지의 것들'로서의 소소감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은 상태가 된다.


라투르가 말하는 '대지(Terrestrial)'는 '지구', '자연', '토지', '세계'와 같은 단어들로 충분하지 않으나 그 모든 요소들을 아우르는 것이자 새로운 정치적 행위자를 의미한다. 행위자들이 그 위에 서있는 무엇이 아니라, 같이 행위하는 존재 agent로서의 대지는 가만히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이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p.67
우리가 있는 장소의 '발 딛고 있는 곳'이나 '둘러싼 곳'이 우리의 행동에 반응하고 우리에게 대항하고 우리를 에워싸고 지배하며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요구하고 우리를 어딘가로 끌고 간다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막연하게 '땅'에 대해 가지는 나의 감정은 earth, soil과 같이 분해하고 순환하며 생성카지노 게임 사이트 신비로운 무엇과 같은 것이었다. 계절을 따라 싹이 트고, 자라고, 씨가 맺히고, 지고 다시 싹트는 그 모든 순환의 과정의 토대 같은 것. '가이아'라는 여신의 이미지로 신비화되며 '어머니'라 불리며 여성화된 땅의 이미지에 대한 반감과 동시에 나 역시 그런 신비로움의 영역에서 땅을 소비해 왔다. 지렁이를 좋아하고, 흙을 좋아카지노 게임 사이트 그 감각이 땅에 대한 나의 오리엔탈리즘이었음을 깨닫는다.


대지와의 새로운 조우는 지정학(geo-politics)이라는 개념에 대한 나의 인식도 완전히 새롭게 바꾸고 있다. 기존의 지정학 개념이 'geo-'라는 단어를 정치활동이 일어나는 '틀'을 의미하는 접두어 정도로만 한정 지어 생각해 왔다면, 그 'geo'가 정치의 행위자가 된 세계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배경 또는 조건으로써의 땅이 아니라 역동하며 스스로 움직이는 행위자임을 인식했을 때의 세계인식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땅이 더 이상 안정적인 디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 '안보'는 무엇이 되는가? 코로나 19라는 역병이 창궐할 때, 항공모함에 탄 군인들이 이 역병으로 몸져누웠을 때, 평화운동은 '안보'의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역병의 상황에서 그 거대한 탄소배출 무기가 무엇을 지킬 수 있는지 질문했지만, 정곡을 찔린 힘에 의한 평화 신봉자들은 침묵했고 그 시기를 조금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던 군사비 지출은 역병이 지나가자 폭발하듯 치솟고 있다. 디디고 설 공통의 세계가 없는데도, 그 없는 세계를 더욱 산산이 부수는 현재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전쟁, 학살이 일상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평화운동은 개입의 지점을 알고 있는가? 세계가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변화할 수 있다고 여전히 믿는 나는, 어떻게 끼어들어야 카지노 게임 사이트지 과연 알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라투르는 얄짤없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어떻게 끼어들어야 카지노 게임 사이트지 전혀 알지 못한다.(p.73)"


라투르는 "기후 문제가 지정학적 이슈의 핵심이며 불의, 불평등의 문제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p.26)"는 사실을 트럼프 덕분에 모두가 알게 되었다고 했다. 트럼프가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를 선언했을 때, 나는 정신 나간 트럼프가 어디까지 정신 나간 짓을 하는지 한 번 보자는 아주 무책임한 방관자로 실소했을 뿐, 그것이 나를 포함한 '그들'에 대한 선전포고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의 그 실소에서 세상이 쉽게 변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내가 트럼프의 정치라는 것을 바라보았던 관점이 지극히 '시리우스'적인 관점이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파리협약 탈퇴선언은 어째서 그의 우리를 제외한 모두에 대한 선전포고였는가? 트럼프의 정치를 내부로부터 바라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앞서 말했던 올바름의 labyrinth에 스스로 들어간 것이라 볼 수 있다. 책을 읽으며 스스로 직면하고 규명해야 할 것들의 목록을 적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내부를 무엇으로 보며, 외부를 어디라 설정하는가? 나의 로컬은 어디이고 나의 글로브(globe)는 어디인가? 나의 로컬로부터 대지를 향하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도나 해러웨이는 '월딩 worlding'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사용했다. 글로브 globe라는 표현이 글로벌화 globalization과 너무 유착되어 버렸기 때문에 다른 언어를 찾아낸 것이다. 라투르는 대지에 소속감을 느끼는 이것이 월딩의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대지는 지구와 토지에 묶여 있지만, 국경과 일치하지 않고 모든 정체성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지구와 충돌하지 않으면서 착륙하는 방법을 찾는 것인데, 그것은 무엇도 하지 못하는 공황상태에서, 모두가 서로를 탓하며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현재의 교착상태에서 일단 빠져나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대지인 Terrestrial으로서의 소속감을 느끼는 새로운 커뮤니티- 책에는 새로운 동맹의 집합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나는 커뮤니티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를 상상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이 커뮤니티는 매우 번잡하고 복잡하고 온갖 여러 입장, 이질성들을 포괄하는 그런 대혼종, 또는 대환장의 커뮤니티일 것이고. 바로 이러한 혼종성과 이질성은 라투르가 말했던 임계영역 Critical zone의 특징이기도 하다.


가끔 엄마아빠의 정원에 가서 땅을 고르고 씨앗을 심거나, 풀을 골라내는 작업을 할 때면 향긋한 흙내음에 온몸이 맑아짐을 느낀다. 몇 년 전만 해도 잘 못 느끼던 감각이었다. 나의 엄마는 나에게 너는 의무적으로 흙을 만져야 해. 일주일에 하루는 꼭 흙을 만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몇 년이 지나가며 온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모모 사무실이 이사를 한 후, 나는 매일 조금씩 흙을 만지게 되었다. 나는 지렁이를 좋아하고, 특히 통통한 지렁이를 너무 좋아한다. 다리가 많은 벌레들도 좋아하고, 화단에 물을 주었을 때, 온갖 벌레들이 물난리를 피해 벽을 타고 올라와 물이 스며들기를 기다리는 그 장면도 좋아한다. 나의 매우 자기중심적인 이 감각이 '대지의 것들'로서의 소속감을 느끼는데 아주 작은 디딤판이 되어줌을 느낀다.


라투르가 말했듯 "발생, 탄생, 성장, 생명, 죽음, 부패, 변모 등 모든 범주의 변형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얻는 것이 서서히 복잡해지고 어려워졌(p.100-101)"지만, 지구를 시리우스적 관점에서, 외부 Great Outside의 관점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바라본다는 것은 내가 그 모든 범주의 변형에 저항 없이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카지노 게임 사이트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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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작성했던 리뷰를 브런치에 공유해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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