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끌어안고 잠들기에 크기는 작았고, 부드러운 털도 없는 돼지 인형은 내 책상 위에 자리를 잡았다. 출근할 때는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고 퇴근하면 잘 다녀왔냐고 묻는 것 같았다. 가끔 베개 대신 내 머릿밑에 있었지만, 동거인이 되었다. 새로운 동거인을 발견한 정은이는 저렇게 못생긴 인형을 왜 샀냐고 물었다. 나는 귀엽지 않냐? 돼 물었다.
그는 바빴다. 매주 마감을 벅차했지만 즐거워 보였다. 내용이 재미있으면 그림이 잘 그려지고 재미없으면 그림도 그리기 싫다고 하소연했다.
"힘들겠다. 근데 내가 보기에 너, 대단해."
작업하는데 방해가 될까 전화도 내가 먼저 하기보다 그에게 오는 전화를 받았다. 먼저 만나자고 할 생각은 하지 않았고 만나자는 말을 할 때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에게 맞추는 것이 자존심 상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기다렸고 맞춰가며 조금씩 가까워졌다.
봄이 오는 소리는 계곡 물소리와 새소리로 알게 되고 미세하게 변하는 산 색깔이 알려준다. 잘 못 떨어진 연두색 물감을 휴지로 닦아내도 흐릿하게 연두색 느낌이 나는 풍경화처럼 산 색깔이 그렇게 변하고 있다. 그 산에 진달래와 벚꽃이 색을 더하며 봄이 깊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더 확실하게 느끼는 것은 겨울에는 가끔 지나가던 등산객들이 하나둘 늘어난다는 것이다. 절 마당에 있는 공중전화를 쓰기도 하고 툇마루에 앉아 땀을 닦거나 법당에 들러 참배를 하는 사람들 숫자가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 봄에는 사람들 목소리도 새소리처럼 밝아진다.
"꽃도 피고, 나 좀 봐 달라고 새도 저렇게 노래하는데 이 선생은 여기서 뭐 하냐?"
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손톱을 깎는 나를 보고 정은이가 과일이랑 떡 접시를 방안에 들여놨다.
"등산객들 구경한다."
나는 엉덩이를 옆으로 옮겨 정은이 자리를 만들었다.
"용팔이랑 꽃구경하러 가야지."
정은이는 영우를 용팔이라고 불렀다.
"용팔이가 바쁘다. 저 사람들, 여기로 꽃구경 오는 거 안 보여?"
봄바람이 처마 밑에 풍경을 한 번 흔들어 주고 떠났다.
"나, 엄마 만났다."
미국에 사는 엄마가 한국에 잠깐 들어왔다는 말이 생각났다. 엄마를 만났다고 말하는 정은이눈은마당에 등산객들을 향했다. 부모님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세 사람은 각자의 길로 떠나 새로운 삶을 살았다. 핏덩이 정은이가 스님 손에서 부처님의 가피를 받고 성장하는 동안 그녀의 부모들도 진짜 어른이 되었다. 각자 가정을 꾸리고 그 가족을 책임지는진짜 어른으로 변했다. 하지만 무책임한 부모들이 정은이를 기억에서도 버린 것은아니었다. 정은이가 밥을 먹고 첫걸음을떼고 학교에 가는 모습들을 몰래지켜보고 있었다. 정은이가 이 사실을 나중에 알고 살면서 입 밖으로뱉지 못했던 버려졌다는 상처에서 조금은 벗어날수 있었다.
"엄마는?"
나도 손톱에 이어 발톱을 깎으며 물었다.
"이 번에는 동생들을 데리고 나왔더라."
고개 돌린 내 얼굴을 보는 대신, 정은이는 여전히 등산객들 움직임에 따라 눈동자를 돌리고 있었다.
"스님이 말릴 때는 보고 싶더니 내 맘대로 볼 수 있는 상황이 되니까 간절하지 않네."
정은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샘났네. 그 집 애들이 이뻤구나."
"이쁘긴, 내가 훨씬 났더라. 이제 안 만나려고 부모도 필요할 때 있어야지 이제 와서 뭔 소용이냐. 즐겁지않더라."
법당이 아니라 별채로 들어가려는 등산객을 발견하고 그쪽은 출입 금지라고 외치며 정은이는 마루를 내려갔다. 사랑, 책임질 수 없었지만, 뜨거웠던 사랑에 그들은 얼마나 아팠을까? 저 아이만큼아팠을까?그것이 청춘이고 사랑인가?
전화벨이 울렸다. 의정부역에서 만나자는 영우의 전화였다.
"이걸 입기에 아직은 쌀쌀한데."
나는 꽃무늬 시폰 원피스를 들고 거울 앞에서 망설였다. 원피스 위에 청재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정은이가 보기 전에 잽싸게 마당을 가로질러 절 문을 벗어났다.
"일은 다했어?"
"한의원에서 비염약 찾아가라고 해서 내가 찾아오겠다고 하고 나왔지."
우리는 점심과 저녁 사이로 햄버거를 먹었다.
"선배는 삐삐 안 사?"
햄버거집을 나와 걷는 동안 도로 여기저기에서 삐삐 파는 모습이 보였다.
"크게 필요하지 않아서. 너 사려고?"
본인도 작업실에서 지내다 보니 필요가 없다고 말은 하고 그 앞을 지나치지 않았다.
"커플끼리 많이 가입합니다."
직원이 우리를 번갈아 보며 삐삐를 소개했다.
"내가 하나 사줄까?"
그가 빨간색 삐삐를 흔들며 나를 바라봤다.
"아니, 필요하면 내가 살 거야. 약이나 찾으러 가자."
나는 그의 손에 든 삐삐를 내려놓고 한의원 방향으로 손을 잡아끌었다.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걸었다.
"선배가 보내 준 사탕 바구니 때문에 커피 대신 매일 사탕을 먹어요."
화이트데이, 나는 처음으로 사탕 바구니를 만들어 그에게 보냈다. 그동안 발렌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 때를 맞춰 바구니를 준비하는 친구들을 보면 제과업계 상술에 놀아난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나도 그 상술에 넘어갔다. 그동안 내가 받았던 바구니 중에 가장 예뻤던 바구니를 준비하고 비싼 사탕을 가득 담았다.
그리고 파스텔톤 편지지에 사랑 가득한 편지도 썼다.
"그리고 그 편지요. 진짜 감동이었어요. 원래 글을 잘 썼어요?"
그는 그 편지가 내가 쓴 글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음악을 많이 듣는 그가 그 편지가 노래 가사라는 것을 알거라 생각하고 썼는데 모르고 있었다. 그 편지는 푸른 하늘에 '사랑 그대로의 사랑' 가사였다. 푸른 하늘을 좋아했던 나는 사탕 바구니와 딱 맞는 노래를 찾아 옮겨 적은 것이다. 나는 웃음을 감추고 진실을 밝혀야 할지 고민했다. '진실이 뭐 중요해. 그 마음이 아주 틀린 얘기도 아닌걸.'
"그 편지? 그거 푸른 하늘 노래 가사야."
생각은 진실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입은 진실을 나불대고 있었다.
"뭐야, 어쩐지 이상하더라."
그도 나도 유쾌하게 웃으며 길을 걸었다. 벚꽃이 핀 길을 걷는 우리는 다른 연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꽃비가 내린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꽃잎이 떨어졌다. 꽃잎을 잡으려고 뛰어다니는 학생들 모습이 꽃잎 같았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꽃잎이 손에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얍!"
갑자기 점프 한 그가 내 머리 위에 나무를 치고 내려왔다. 꽃잎이 내 머리와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뭐야. 낭만이 없잖아."
손바닥 위에 덜어진 꽃잎을 그에게 뿌렸다. 카메라가 있었다면 좋았을 걸 아쉬웠다. 꽃길을 벗어나기도 전에 하늘을 가린 먹구름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꽃잎, 다 떨어지겠다."
우산이 없어 옷이 젖을 것을 걱정하기보다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내가 웃긴다고 했다. 비를 피해 노래방 입구에 멈췄다.
"나는 비도 좋아."
옷에 묻은 비를 털고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 머리 위에 꽃잎을 떼어 내던 그가 나를 말없이 쳐다봤다.왜 그러냐는 내 손짓이 끝나기 전에그는 나에게입 맞췄다.
"우산 사서 올게요."
그가 뛰어가는 뒷모습의 배경 음악은 노래방에서 누군가 열창하는 김건모에 무료 카지노 게임 만남이었다.
* 지난주에 방을 잘못 올린 관계로 다시 업로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