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표를 보고 나서 선생님이 말했다. ‘화끈하게 해, 화끈하게!’ 눈빛은 냉정했고 얼굴은 딱딱했다. 풋, 하고 웃거나 헤~ 하고 혀를 내밀 분위기는 아니었다.
중 3으로 올라가 담임이 국어 선생님이라서 좋았다. 국어 과목을 제일 좋아한 데다 처음으로 ‘주요 과목’ 선생님이 되어서였다. 주요 과목은 고입 시험에 배점이 높은 ‘국,영,수’다. 영어 선생님은 영,수를, 수학 선생님은 수,영을 잘해야 된다고 했고 국어 선생님은 국, 영, 수에 힘쓰라고 했다. 선생님마다 자신의 과목을 앞세우는 게 우스웠다.
문학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었기에 국어 선생님인 담임이 등대가 될지 모른다는 기대를 했다. 소위 소녀라는 자가 일기장 하나 없으면 되겠냐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선생님은 문학소녀로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써보았겠구나 싶었다.
국군 장병에게 위문편지를 쓰던 시간이 생각난다. 쓸 말이 없어 붓방아만 찍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선생님은 부르는 대로 쓰라며 쓸 말을 불러주었다. 글쓰기에 자신 있지 않았다면 아이들이 괴로워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테다. 선생님이 불러준 첫 문장이 기억난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도 어느새 다 갔나 봅니다. 오늘이 벌써 29일이니까요.’ 선생님이 몇 줄을 부르다가 지금 받아 쓰고 있는 사람, 손 들어 보라고 하자 몇몇이 손을 들었다. 나는 못 쓰더라도 다른 사람이 말하는 대로 쓰기 싫어 받아 쓰지 않았다. 똑같은 편지가 몇 개나 될 게 아닌가 하는 괜한 걱정도 되어서.
기대와 달리 선생님이 나의 문학적 소양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준 건 없다. 아, 결핍과 소외감이라는 커다란 문학적 재료를 주기는 했다. 선생님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하고 교칙을 잘 지키는 아이였다. 수업 분위기를 흐리거나 사고를 치고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학급 평균을 까먹을 정도로 공부를 못하지도 않았다. 담임으로서는 신경 쓸 거 하나 없이 가만 내버려 둬도 되는 아이였다. 그래서 내버려 둔 것일까? 한 번도 친밀하게 대한 적이 없고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선생님께 대놓고 그런 냉대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화끈하게 하라는 말을 듣고서야 짐작이 갔다. 선생님은, 공부를 못하지는 않지만 잘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나, 생선묵처럼 흐물흐물하고 개성 없는 내가 싫었던 것이다. 공부를 좀 못하고 더러 교칙을 어기는 일이 있더라도 생기발랄하고 자기 색깔이 분명한 아이가 좋았던 거다. 그 때 선생님의 얼굴은 너 같은 아이, 정말 지루하고 재미없어, 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 ‘미미한’이라는 낱말을 설명하며 든 예는 ‘쟤는 우리 반에서 미미한 존재야.’였다. 그 순간 선생님이 나를 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게 꼭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 눈을 내리깔았다. 지나친 생각이었는지 모르나 지금도 그 예문은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으니 적절한 예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에게는 한 반 아이 가운데도 미미한 애가 있고 빛나는 애가 있었다.
여름 방학 때 쓰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평소 우리 말에 관심과 애정이 많았다. 국어 선생님이니까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아 한글 전용 문제와 외래어에 관해 궁금했던 걸 질문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설명해줄 생각이 없는지 답장하지 않았다. 개학 후에도 답장은 못 했지만 편지를 잘 받았노라는 말 한마디, 고갯짓 한 번 하지 않았다. ‘분홍’도 한자이니 똑같은 외국어인 ‘핑크’라 써도 되지 않을까, 같은 말이 너무도 말 같잖았던가? 나에게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눈짓 한 번도 아낀 분이다. 그래서 국어학계의 큰 인물이 되지 못했다, 는 아니지만 그런 사람에게 진지하게 한 자, 한 자 글자를 눌러 쓰며 애정을 갈구했던 자신이 지금 생각해도 안쓰럽다.
난생처음 수험생이 되었다. 학교에 별도로 마련된 ‘진학 지도실’ 앞을 지나자면 괜히 긴장되었다. 그곳으로 불려가고 싶지 않았다. 번호순대로 학부모가 불려 와 담임 선생님과 진학 상담을 했다. 선생님은 우리 엄마에게 내가 고등학교야 가겠지만 이대로는 대학 가기 힘들 거라고 했다 한다. 공부를 웬만큼은 하는 줄 알았던 내가 공부를 몹시 못하는 줄 알고 엄마는 놀랐을 테다.
‘진학 지도실’ 밖 벽에는 지난달 시험의 성적 우수자 명단이 석차대로 사진과 함께 붙어있었다. 약 600명의 전체 인원 중 50등 안에 든 아이들이었다. 우선 거기에 드는 걸 목표로 공부하는 애도 있었다. 맨 앞자리는 아니라도 내 사진도 거기에 있었으니 아주 못하지는 않는데 선생님은 엄마에게 나를 공부 못하는 아이로 인식시켰다. 진학실로 바로 들어간 엄마는 사진을 못 봤다고 했다.
고등학교야, 라니. 선생님이라면 다르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잘하고 있어요. 지금처럼 열심히 하면 대학도 좋은 데 갈 수 있을 겁니다.’라고. 그런 말을 전해 들으면 얼마나 힘이 났겠는가. 잘 될 아이라는 인정을 받은 게 기뻐 더 노력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선생님은 나를 화끈하게 공부하지 않아 대학도 못 갈 아이로 일찌감치 딱지 붙여 버렸다. 선생님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막연한 느낌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오기가 생겼으면 좋으련만 반대로 기운이 떨어지고 공부하기가 싫어졌다. 공부 시간에도 자꾸 딴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앞에서는 위축되어 더 바보 같이 행동했다. 초등학교처럼 종일 담임 선생님하고만 공부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다른 과목 시간이 있고 다른 선생님께 가끔 칭찬도 받아서 그 학년을 버텼다. 고등학교 입학 시험 결과, 내 성적은 학년 초보다 상승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기대하지 않은 대로 거의 성장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그것이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걸 알게 되었다.
라틴어 수업 시간에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읽었다.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만든 여인의 조각상에 입을 맞추자 (하얀 대리석인)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가 마지막 문장이다. 극적인 변화에 얼마나 놀라고 감동했을까? 대리석 조각도 사람으로 봐 주면 사람이 된다. 선생님은 나를 안 될 애로 보았다. 그의 말대로 고등학교야 갔지만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 인생이 꼬인 게 모두 선생님 탓이라는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나를 소외시켜 자신감이 뚝 떨어지게 하고 초라하게 만들어 자신에 대해 덜 기대하게 한 건 사실이다. 그 때 받은 상처는 오래 갔고 지금도 한 번씩 쑤신다. 나를 너무 힘들게 한 사람은 종종 꿈에도 나오는데 이 선생님도 출연한다. 좋지 않은 선생님도 많았지만 아직도 꿈에 나오는 선생님은 이 분이 유일하다. 다른 분들이 주로 공공의 적이었던 데 반해 이 선생님은 나 혼자만 감당한 힘든 적이었기 때문일까?
그 때 같은 반이고 지금도 만나는 한 친구는 이 선생님에게 유감이 없다. 아니, 좋게 생각한다. 내 이야기를 하면 내가 과민한 거로 본다. 나는 선생님이 친근하게 그 애를 부르고 웃는 얼굴로 가볍게 뭐라 하던 장면을 기억한다. 선생님이 나를 그렇게 부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 친구는 밝고 적극적이어서 선생님 마음에 들었나 보다. 친구는 선생님을 나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나는 많다.
백번 양보해서 선생님은 나에게 아무런 악감정이 없었다고 생각해 본다. 나에게 할 말도 없고 칭찬할 일도 없다면 어쩌겠는가 하고. 그렇지만 1년이란 긴 시간 동안 한 번은 따뜻한 눈빛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은가, 한 번쯤은 미소를 짓고 부드럽게 말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걸 금할 수 없다. 그랬다면 그토록 큰 소외감은 느끼지 않았을 테다. 선생님은 그러지 않았다.
꿈속에서 나는 다시 중3이다. 여전히 차가운 선생님의 낯빛에 질리고 냉담하게 무어라 해서 움츠러든다. 나를 싫어하는구나, 느껴 또 속을 앓는다. 눈을 뜨고 현재로 돌아오면 아직도 선생님의 영향권에 있는 것 같은 내가 너무 가엾다. 화가 난다. 언제쯤이면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 선생님 꿈을 꾸지 않게 될까?
꿈속에서든 실제로든 열다섯 살이 아닌 같은 성인으로 선생님을 한번 만나고 싶다. 만나면 나한테 왜 그랬는지 꼭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당신이 내 마음 밭에 어떤 씨앗을 뿌리고 말았는지 아느냐고도 물을 것이다. 그다음에는 목청을 높여 선생님이라면 절대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화끈하게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