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카지노 게임
'명저 속 글쓰기의 비밀'을 '명저 속 비밀 탐구'로 전환합니다. 대상 도서의 스펙트럼을 글쓰기 명저에서 명저로 확장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두 번째 엄마의 편지를 쓰고 고민이 깊어졌다.
어떻게 하면 더 깊이 있게 사유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뻔하지 않은, 나만의 새로운 시선을 드러낼 수 있을까?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읽게 된 한병철 교수의『피로카지노 게임』는 독일어 원문을 번역 출간한 지 13년 된 철학서이다. 독일 철학자들 특유의 난해한 문체로 가득하 저서들과는 달리, 문체와 표현이 간결해 이해하기 쉬웠다. 현대 카지노 게임를 날카롭고 현실적으로 해석한 이 책은 한 문장 한 문장 놓칠 수 없게 만든 명저였다.
한병철 교수는 카지노 게임 구조와 시스템을 각 시대의 주요 질병과 연결하여 해석한다.
각 시대마다 고유한 주요 질병이 존재하는데, 21세기는 병리학적으로 신경증적이라 규정한다.우울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 증후군 등과 같은 정신질환이 현대의 병리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들 질병이 타자의 부정성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에서비롯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진(번아웃) 증후군은 자아의 동질성이 과다해져 과열되어 타버리는 현상이다. 활동이 과잉된다는 것은 면역학적 문제가 아니라, 긍정적인 요소가 대량화된 것을 의미한다.
한병철 교수는 보드리야르의 폭력이론을 선별적으로 수용한다.
보드리야르는 “현존하는 모든 시스템이 비만 상태”임을 지적했다. 정보 시스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생산 시스템 모두가 과도하게 팽창해 있는 비만 상태라고 설명한다. 다만 보드리야르는 폭력을 면역학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내포한다. “네트워크와 가상세계의 폭력은 바이러스성 폭력으로, 전염, 연쇄 반응, 모든 면역성의 제거 등과 같은 수단을 통해 작동한다. 끝없는 증식과 비대화. 변이를 통해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암세포와 같다.”는 그의 이론을 비판한다.
한병철 교수는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또는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과잉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현상 역시 면역이 아니라 신경성 폭력의 한 형태이다.
그의 이론에서 현대인의 정신질환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은, 마치 현대인이 영양소를 과다섭취해 비만과 당뇨병에 걸리는 것과 닮아있음을 깨닫게 한다.
한병철 교수는 불교의 '피안[주 1]' 개념을 끌어와, 과거 강력한 개념이었던푸코의 규율사회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병철 교수가 독일 철학계에서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데에는 그의 쉽고 깔끔한 해석과 문체뿐만 아니라, 동양철학을 가미한 관점에도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의 푸코의 파놉티콘이 존재하는 사회도 보인다. 하지만 현 시대의 주요 흐름은 자본주의 체제가 지배하는 기업가적인 성과사회라는 것은 명민한 해석임에 틀림없다.
병원, 정신병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이제 과거 카지노 게임 모습이다. 21세기 카지노 게임는 규율카지노 게임에서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공항, 쇼핑몰, 은행, 유전자 실험실 등으로 구성된 성과카지노 게임로 변모했다.이 카지노 게임 주체들은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성과주체이자 기업가라고 불린다.
푸코의 권력에 대한 분석과 규율사회, 통제사회 개념은 성과사회로의 전환에서 나타난 심리적, 공간구조적 변화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였다. 금지의 부정성, “~해서는 안 된다”라는 명령이 지배적이었다."노 No"가 지배적이었다.
반면, 성과사회는 부정성을 벗어난다. 탈규제의 흐름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무한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로 작용한다. “예스 위캔(Yes We Can)”이라는 집단적 긍정은 카지노 게임 긍정적 성격을 드러내며, 금지와 명령, 법률 대신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한병철 교수의 현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기업들이 만들어낸 "Just do it", "We can do it"을 신조처럼 삼고 있다. 무한한 도전정신과 규모의 경제를 중시하며 생산성을 신조로 하는 기업의 생리가 개인의 삶과 의식에 스며든지 이미 오래다.
규율카지노 게임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았다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규율카지노 게임에서 성과카지노 게임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규율의 패러다임을 성과의 패러다임, 즉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대체시킨다.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따라서 카지노 게임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성과주체는 복종주체보다 더 빠르고 더 생산적이다.
능력이 성과카지노 게임 핵심 키워드라는 그의 뛰어난 해석은마이클 샌델 교수의 능력주의[주 2]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이러한 능력주의가 단순히 개인의 재능과 노력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요인에 의해 승자에게 자만을, 패자에게 좌절과 굴욕을 안겨준다고 했다.
그렇다고 능력이 당위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은 아니다. 성과주체는 규율에 단련된 상태를 유지한다. 규율 단계를 졸업한 존재이다. 생산성 향상 관점에서 당위와 능력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된다.
한병철 교수는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 중 하나로 카지노 게임 원자화와 파편화, 그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을 강조한다. 성과사회에 내재한 시스템의 폭력성을 간과하고,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근대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
니체라면 오늘날 대중이 지향하는 인간형을 ‘주권적 초인’이 아니라, 단순히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이라고 했을 것이다 [주3].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대책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진 새로운 인간형은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발현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에서 비롯된다.
한병철 교수의 해석에 소름이 돋았다. 피로라는 개념을 도출하기 위해 많은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우울한 현대인을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존재로 정의한 그의 근사한견해에 깊이 공감했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카지노 게임에서만 가능하다.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우울증 환자는 그내면화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카지노 게임 질병으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결국 자기 착취로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이다.
내가 요즘 글을 쓰면서 때때로 느낀 우울함과 스스로에게 주문을 거는 긍정성의 과잉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작가들이 브런치에서의 글쓰기를 강제하는 자유로서 스스로 선택했다. 매일 컨텐츠를 생산하면서 타인의 컨텐츠를 소비하는 글쓰기의 굴레에 어느덧 갇혀버린 건 아닌가? 그럼에도 글쓰기를 통해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치유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주변에 많다.
또한, 나를 찾아와주는 다른 작가의 따뜻한 댓글로 우리의 자존감은 회복되고, 우울감은 씻은 듯 사라진다. 그러나, 결국 그 댓글을 얻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글 노동자가 되어 매일 생각을 짜내고 쏟아낸다. 요즘 글쓰기에 지쳐 지극히 피로해진 나의 상황을 너무나 잘 설명해 주는 그의 신박한 이론에 감탄한다. 한병철 교수의 '피로카지노 게임'가 더욱 신빙성 있게 다가오는 이유다.
그러면서도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공자가 말한 과유불급(過猶不及)[주 4]이 떠오른다. 과한 것은 모자람과 같아서, 결국 우리 몸에 화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 마치 현대인이 영양소를 과다섭취해 비만과 당뇨에 걸리는 현상처럼 말이다. 결국, 중용(中庸)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과한 욕심을 버리고 적정 수준만을 행할 것인가?
우리는 성과주의에서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브런치 같은 플랫폼에서 댓글과 좋아요, 메인 페이지 노출 등으로 과열되는 성과주의 체제 속에서, 우리 모두는 매일 끊임없이 더 나은 성과를 위해 무한질주하고 있는 경주마와 같다. 피로에 쌓인 경주마는 어느 순간 더 이상 달리지 못한다. 결국 내가 스스로를 해치는 가해자가 되는 상황만큼은 막아야 한다.
열심히 달리다가도 잠시 쉬어야 쓰러지지 않는다. 최근 무리한 글쓰기 일정으로 내 건강에 이상신호가 왔다. 성과와 능력주의에 매몰된 나를 잠시 내려놓고 내 몸과 마음을 돌보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이제, 나의 건강 회복을 위해 실천할 때이다. 나의 꽉 차인 to-do list를 잠시 비워내자.
[주 1] 피안 彼岸 1. 불교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는 일. 또는, 그 경지.
2. 불교 사바세계 저쪽에 있는 깨달음의 세계.
3. 철학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아니하는 관념적으로 생각해 낸 현실 밖의 세계.
반의어 사바, 사바세계, 차안
[주 2]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원제는 능력주의의 폭정(the Tyranny of Merit)이다. 그는 능력주의가카지노 게임적 연대를 해치는 체제라고 역설적으로 경고한다.
[주 3] 니체는 주권적 개인과 주권적 초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주권적 개인은 자신의 고유한 권력을 획득한 개인으로, 자신의 삶의 가치를 스스로 부여한다. 주권적 개인을 실현시키는 것은 초인으로, 초인의 이상을 따르는 이들에게 자기 창조를 주문하기도 한다. 니체의 주권적 개인과 주권적 초인에 대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주권적 개인은 신의 이념이든 전통의 이념이든 자신의 외부에서 주어지는 모든 명령을 거부한다. 주권적 개인은 자신의 고유한 권력을 획득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의 가치를 스스로 부여할 수 있다. 주권적 개인은 자기 창조를 통해 실현될 수 있고, 문화의 산물로서 실현될 수 있다.
[주 4] 과유불급은《논어》의 <선진 편에 나온다.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자장과 자하 중 누가 더 현명합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가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답했다. 자공이 "자장이 낫다는 말씀입니까?"라고 반문했다. 공자가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답했다.
* 제목 이미지 출처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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