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카지노 게임의 실패
패배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행복하고 우월하며 진리에 통달한 듯 보이지만, 사실상 그런 진리를 얻기 위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한 적이 없다.
그들은 늘, 강자 옆에 붙어서 하이에나처럼 사자가 먹고 남긴 찌꺼기들을 주워 먹으며 살아간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다툼에 휘말리지 마라. 지기만 할 뿐이다. 늘 스스로를 의심하면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 널 공격해도 화내지 말고, 되받아쳐서 스스로 품위를 떨어뜨리지 마라. 인생엔 그보다 중요한 일이 많다.”
패배는 나쁜 게 아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이 패배했고
앞으로도 수많은 패배가나를 기다리고 있다.
대체 승리란 무엇인가?
방안 가득 깔린 카지노 게임를 보며
우주 카지노 게임에 지나지 않는 인간들과
그 카지노 게임들이 가득 쌓여 만들어진
카지노 게임 덩어리에 불과한 인간 사회를 생각한다.
카지노 게임와 카지노 게임가 싸운다.
이긴 카지노 게임가 진 카지노 게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승자야! 너는 패자고!
나는 승리했고 넌 패배했어!
이 얼마나 웃긴 이야기인가?
카지노 게임의 세계에서 승패는 중요한 게 아니다.
카지노 게임와 카지노 게임는 서로 결합하여,서로 협응하여
은하를 만들고 항성을 만들고 행성을 만든다.
카지노 게임와 카지노 게임는 싸우지 않는다
카지노 게임와 카지노 게임는서로 결합하고 함께 움직인다.
지구도 달도 태양도
안드로메다 은하도 결국 카지노 게임들의 집합이다.
카지노 게임들끼리 싸우면 우주는 존재할 수 없다.
시도와 실천이 좌절되는 게 패배라고 본다면
패배는 고귀한 행위의 결과물이다.
항성이 되기 위한 카지노 게임의 시도와 노력은
좌절되기 마련이다.
카지노 게임에 머물고자 하는 카지노 게임들은
항성을 꿈꿀 수 없고 은하와 우주를 품을 수 없기 때문에
항성이 되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가진 카지노 게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항성을 꿈꾸는 카지노 게임는
카지노 게임로 머물기로 한 카지노 게임들 사이에서 카지노 게임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며 처절하게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참으로 아름다운 실패이고
눈부신 패배이다.
비록 실패하고 패배했지만 항성을 꿈꾼 카지노 게임는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카지노 게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그는 항성의 일부가 된다.
카지노 게임로태어나카지노 게임가 되어 흩어질
카지노 게임로 머물기로 결심한 인간들은
밤의 적막 속에서 가상의 전투를 벌인다.
실현되지 못한 꿈들. 눈감아 왔던 부당함.
다른 카지노 게임들에겐 숨겨 왔으나
자신에겐 숨길 수 없는 비겁했던 순간들.
그리고 눈을 빛내며 다가왔던 사랑. 신께서 그들을 위해 마련해 두었으나 용기가 없어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 사랑을 위해 그들은 상상 속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내일은 다를 거야!”
그러나 내일이 오면, 그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질문이 마음에 떠오른다. “해 봐야 소용없으면 어쩌지?”
그래서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싸움에 져 본 적 없는 사람은불행하다. 인생에서승자가 될 일도 없으니까.
[2] 고독의 미학
고독은 아름답다. 고독은 우주적이다.
고독은 모든 아름다운 자들의 순수한 종교이다.
어둠으로 가득한 우주에는 별들이 존재한다.
별과 별 사이의 거리는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멀다.
별은 그래서 고독하다. 그러나 외롭지 않다.
별과 별을 관통하는 신의 중력과 법칙이 그들 사이에서
아름답게 물결치며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를 보면 아름답다. 그이유는
아름다움이란신의 사랑이
시공을 넘어 장엄하게 펼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지상에 떨어진 모든 인간은 하나의 별이다.
사랑이 신의 영역이라면 고독은 인간의 영역이다.
삶의 경이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고독은 평화롭게 공존하는 개념이다.
고독은 모든 비밀을 드러내 밝힌다. 그러므로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에게 세상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고독 속에서 그들은 간과했을지도 모를 사랑을 발견해 낼 것이다. 고독 속에서 그들은 그들을 버리고 떠난 사랑을 이해하고 존중하게 될 것이다.
고독 속에서 그들은 “아니요!”라고 대답하는 것이 관용의 부족을 드러낸다고 할 수만은 없으며,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 관용의 미덕이라 할 수만은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 순간, 혼자인 사람은 “넌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라는 악마의 말에 겁먹을 필요가 없다.
혹은 “아무도 널 신경 쓰지 않아!”라는 대악마의 말에도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우주에 대한 헤아릴 길이 없는 광활한 생각,
삶과 죽음의 먹먹한 아득함에서 자라난 종교.
종교는 우주, 온통 죽음뿐인 이 우주 안에서
기적처럼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의 생과 사의 신비를 공유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거짓된 종교를 믿는 자들은,우리가 타인을 억압하거나 개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세상에 왔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3] 고독은 갑옷이며 사랑은 전투이다.
사랑이란 고독의 갑옷을 두르고 탐진치와 전투를 벌이는 일.
그건 거시적이며 항구적인 전투이다.
큰 전투에 참전하는 것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데 일조할 때도 있지만, 길에서 마주친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
(히틀러, 무솔리니 같은 사람들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이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진정으로 타인을 돕는 사람들은 억지로 쓸모 있는 삶을 살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저 유익한 삶을 이끌어갈 뿐이다. 남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조언하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모범을 보이며 살아간다. 자신이 늘 바라온 삶을 사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타인에 대한 비판을 접어두고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집중하라. 그런 삶이 대단찮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만물을 주관하는 신의 관점에서는 남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그런 삶이야말로 세상을 개선하려는 신의 뜻에 부합한다. 따라서 신은 그런 삶을 사는 이에게 매일 더 많은 축복을 내릴 것이다.
[4] 전투의 동력은 기쁨이다. 슬픔은 기쁨을 증폭하기
위한 반작용이다. 이 세상은 끝없이 슬픔만을 주지만
그 슬픔을 뚫고 기쁨은 피어난다.
진창이 없다면 연꽃을 피울 수 없듯이
슬픔은 기쁨의 꽃을 피우기 위한 거름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지독하게 슬픈 사람은 지극한 기쁨을 얻게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삶이주는 가장 큰 축복 중에 하나가
바로 기쁨이다. 생의 기쁨. 생활의 기쁨. 일상의 기쁨.
아름다움이 주는 기쁨. 평화가 주는 기쁨.
고요가 주는 기쁨. 침묵이 주는 기쁨.
지혜가 주는 기쁨. 사랑이 주는 기쁨.
모든 기쁨은 우주적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영원한 전투의가장 강력한 동력이다.
슬픔이란 바다 위에서 고통의 파도를 헤치면서도
스스로 행복하고 기쁘다고느낀다면
우리는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