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사용법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에피쿠로스에게 있어 쾌락은
고통의 부재(aponia)와
영혼의 평정(ataraxia)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에게 행복이란
고통이 부재한 상태에서
선물처럼 주어지는 영혼의 평정 상태였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욕망의 충족으로서의 쾌락은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느끼는 쾌락에는 반드시 불쾌감이 따르며,
따라서 인간은 진정한 목적인
고통의 부재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되면 불행하다.
행복은 지속성이 없기 때문이다.
행복에 집착해도 행복에서 멀어진다.
행복은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이 없는 상태가 행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삶은 매우 단순해진다.
삶은 기본적으로 고통과 불행이라고 생각하면
역설적으로 행복을 얻을 확률은 높아진다.
행복을 물질적 또는 육체적 쾌락이라고 생각하면
행복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인간은 만족을 모르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행복에 집착하는 현시대.
우리의 사회는 유별나게
불행한 사람들의 사회이다.
고독하고, 불안하고, 억울하고,
파괴적이며,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들.
그렇게 아끼려고 애쓰는 시간을 한편에서 낭비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모두가 더 많이 갖기를 바라는 한,
계급이 형성되게 마련이고, 계급투쟁이 있기 마련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나라 사이의 전쟁이 있기 마련이다.
평화가 없다면 행복은 불가능하다.
평화는 행복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탐욕과 평화는 서로 어울릴 수 없다
우리들은 모두 갈 길을 알고 있는 척,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체함으로써
우리의양심과 생존에 대한소망을 마비시키고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낳은 이기심 때문에
지도자들은 사회적 책임보다 개인적 성공을 중요시한다.
동시에 일반 대중도 그들의 개인적인 일에 이기적으로 전념하는 나머지개인적인 영역을 초월한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요구되는 생활태도의 변화가
너무나도 극단적인 경우,지금 치러야 할 희생보다는
장래의 재난을 택하려고 한다.
현재 우리는 치명적인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 왔던 생활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인류에게 미래는 없을지도 모른다.
전 세계에 독가스처럼 스며든 소비주의에 내재된 물신주의적 태도는 온 세계를 삼키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강력한 축인 소비자는
우유병을 달라고 울고 있는 영원한 젖먹이이다.
이미 배가 불러도 더 먹으려고 울부짖는 젖먹이.
현대인들은 존재하기 위해 소비하는 게 아니라,
끝없이 소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비는 카지노 쿠폰의 한 형태이다.
카지노 쿠폰 양식의 삶이란 무엇이든
많이 쌓으려고만 하는 삶이다.
재물, 권력, 학력, 명예, 인기 등이
모두 카지노 쿠폰와 축적의 대상이다.
반면 존재 양식의 삶은
사람, 무생물, 동식물을 가리지 않고
모든 존재에 대해 이 존재 자체를 존중하며
이 존재들과좋은 관계를 맺는다.
이미 명품 가방이 있음에도 하나, 둘, 셋 이상의 가방을 가지려 한다면 그것은 카지노 쿠폰 양식의 구매이다.
반면 명품 브랜드는 아니지만 튼튼한 가방 하나라도 소중히 사용한다면 그것은 존재 양식의 구매이다.
여행을 가는 경우, 짧은 시간에 좀 더 많은 곳을 구경하고, 사진도 많이 찍고, 많은 것을 먹으려 한다면
그건 카지노 쿠폰 양식의 여행이다. 반면 한 두 곳만 가더라도 그 지역을 좀 더 깊이 만나고 느끼고자 한다면 그것은 존재 양식의 여행이다.
악기를 배울 때도 가능한 진도를 빨리 나가려 하는 게 카지노 쿠폰 양식이라면, 천천히 가더라도 스스로 느끼면서 배우는 건 존재 양식이다.
집을 지을 때 공사 기간, 비용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은 카지노 쿠폰 양식이고 좀 천천히 지어도 노동자의 건강과 안녕을 생각하며 그들과 교감하며 건강한 집을 짓는 방식은 존재 양식이다.
친구를 사귈 때도 마찬가지다. 친구가 많을수록 인기도 많고 타인의 인정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고 '좋아요'나 친구의 숫자, 구독자 수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건 소유 양식이다.
반면 한두 명이라도 속마음을 나누고 서로 배우고 성장하는 우정을 유지한다면 그건 존재 양식이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가능한 많은 상대방과 사랑의 관계를 맺거나 상대를 자기 방식으로 통제하려 한다면
그건 카지노 쿠폰 양식의 사랑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며 깊이 있는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건 존재 양식의 사랑이다.
카지노 쿠폰의 양식으로 살아가는 한, 행복은 존재할 수 없다.
소유 양식이 제공하는 행복은 마치 움켜쥔 모래알처럼 손아귀에서 빠져나간다.
카지노 쿠폰의 정반대 지점에 존재가 서 있다.
존재는 생명, 능동성, 탄생, 재생, 분출, 창발, 생산성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존재는 카지노 쿠폰, 자기 속박, 자기 중심주의의 반대이다.
능동적이고 살아 있는 인간은 채워짐에 따라 커지며
결코 채워지지 않는 그릇과 같다
능동성은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자기 밖으로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란 끓는 과정, 낳는과정이며
자기 안에도 흐르고
자기 밖에도 흐르고 또 흐르는 그 무엇이다.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은 물건을 카지노 쿠폰하는 것이나
끝없이 소비하는 것에 있지 않다.
생의 가장 큰 환희는 살아있음을 제대로 느끼는 것이다.
사람은 자라면서 그의 자발적이고 진정한 욕구와 관심, 그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자율적이 아닌, 사고와 감정의 사회적 유형에 의해 억지로 떠맡겨진 의지, 욕구, 감정을 택하도록 강요받는다.
문명과 경제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사회와 국가는 ‘한 사람의 의지를 어떻게 하면 그가 모르게 꺾을 수 있느냐’ 하는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교화, 보수, 징벌, 적당한 이데올로기 등의 복잡한 과정을 통해 이 과제는 대체로 아주잘 해결되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그들의의지 자체가 조정되고 조작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카지노 쿠폰 양식에서 행복은 타인에 대한 우위 속에,
자기의 힘 속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정복하고, 빼앗고 죽일 수 있는 자신의 능력 속에 있다.
존재 양식에서 행복은
사랑, 공유, 그리고 주는 행위 속에 있다.
카지노 쿠폰하는 것에만 전념하는 인물은
신경증적이며 정신적으로 병든 인물이다.
대부분의 구성원이 항문애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회는 분명히 병든 사회이다.
항문애적 성격이란,
삶의 에너지를 주로 감정, 몸짓, 말, 정력뿐만 아니라
돈과 물건을 카지노 쿠폰하고 절약하며 축적하는 데 쏟는 성격이다.
이러한 성격은 인색한 사람의 성격으로
보통은 다른 특성, 예를 들면지나치게 규율 바르다거나, 지나치게 깔끔하다든가, 지나치게 고집이 세다든가
하는 특성들과 결부되어 있다. 또한 공정을 부르짖으며
각자의 몫이 타인의 몫과 아주 똑같아야 한다는 의미의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그들 역시 강한 카지노 쿠폰지향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카지노 쿠폰가 죄악인 것은 아니다.
존재를 위한 카지노 쿠폰, 생존을 위한 카지노 쿠폰는 필요하다.
인간의 삶은 우리가 생존하는 데 있어서
어떤 물건을 카지노 쿠폰하고, 지키고, 손질하고
사용하기를 요구한다.
우리의 육체, 음식, 주거, 옷,
그리고 필수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도구류가 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생존적인 카지노 쿠폰는 존재와 충돌하지 않는다.
정당하고 성스러운 사람들일지라도 그가 인간인 한,
생존적인 의미에서 틀림없이 카지노 쿠폰하기를 바란다.
생존적 의미에서의 카지노 쿠폰는 존재와 충돌하지 않는다.
반면에 성격학적 카지노 쿠폰는 필연적으로 존재와 충돌한다.
항문애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보여주는
카지노 쿠폰 양식의 삶은결코 존재 양식의 삶과 양립할 수 없다.
카지노 쿠폰가 관계하는 것은 물건이며,
물건은 고정되어 있어 그 물건의 내용과 특징을
있는 그대로 열거하거나 기록하여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가 관계하는 것은 ‘경험’이며
인간의 경험은 원칙적으로 그 내용과 특징을
있는 그대로 열거하거나 기록하여 설명할 수 없다.
완전히 기술할 수 있다면 그것은 페르소나,
즉 각자가 쓰는 가면, 남에게 보이는 자아이다.
왜냐하면 본래 이 페스소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인간은 죽은 이미지가 아니며,
따라서 물건처럼 기술할 수 없다.
물론, 나에 대해서 내 성격에 대해서,
인생에 대한 나의 모든 지향성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할 수는 있다.
통찰에 찬 지식은 나 자신의 또는
타인의 정신구조를 이해하고
기술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총체로서의 나,
나의 지문처럼 나만이 갖고 있는
나의 본질은 설령 감정이입에
의하더라도 결코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우린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함께 존재할 수는 있다.
서로를 막아서는 장벽을 허물수만 있다면.
서로 살아가는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만
타인과 나는 양자를 갈라놓은 장벽을 극복할 수 있다.
함께 삶의 무도회에 참가하는 한, 우리는 그 장벽을 허물고 불어오는 생의 바람을 맞으며 함께 춤출 수 있다.
존재하는 삶, 끊임없이 소유하고 소비하는 삶이 아니라
존재하는 삶, 그 아름다운 춤 속에 진정한 자기 이해가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