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털기 16번- 김범석 지음, 흐름출판 펴냄, 2025-
‘밤마다 우리는 죽는다.’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이라면…’ 화장대 거울에 붙여 둔 쪽지 두 장. 이 메모를 보면서 나는 아침저녁으로 마음을 새로이 한다. 내일 눈을 뜰 수 없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도 가시 돋친 말을 내뱉기 어렵다. 나도 사라지고 너도 사라지는 마당에 (너를 미워하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너에게 휘둘려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도 않다. 금방 자신과도 헤어져야 하기에 주어진 시간을 뜻깊게 보내고 싶다. 마음이 복잡하고 어지러울수록 여러 번 메모를 떠올리며 의지를 다진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카지노 게임의 존재를 잊어버린다. 마치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처럼 헛된 욕망과 자책, 분노에 휩싸인다. 때론 이유 없이 생의 끝자락에 서 있는 기분으로 불안하다. 경계선을 오가는 감정에 시달릴 즈음 메모보다 강력한 효과를 지닌 책을 만났다. 김범석 님의 책 ‘카지노 게임 직선이 아니다’가 심장을 흔들어 놓았다.
처음 봤을 땐 썩 내키지 않았다. 항암치료로 고생 중이거나 고생만 하다 사망한 지인들 때문에 현대의학에 대한 약간의 불신이 생겼다고나 할까. 암을 제거와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이 과연 최선일까.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라는 회의감도 있었다. 소제목에 ‘암’ ‘도전’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어 더욱 망설여졌다. 현재의 치료법을 옹호하는 글을 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삶과 카지노 게임에 관한 진솔하고 신중한 식견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열일곱 소년 시절 저자는 폐암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가장의 카지노 게임은 엄청난 고통을 가져왔고 소년은 궁금했다. 우리가 죽는 까닭은 뭘까. 암을 극복할 방법이 있을까.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긴 여행을 시작했다. 의대에 진학하고 종양내과 전문의가 되기까지 암에 관해 연구했다. 자신이 겪은 어려움을 다른 사람이 겪지 않길 소망하며 혼신을 바쳤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그는 암의 탐구를 넘어 카지노 게임, 자아의 실체를 파악하게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가 전하는 생의 신비. 호기심이 생겼다면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인류는 암을 물리치기 위해 긴 시간 노력해 왔다. 조직제거 수술을 시작으로 방사선치료, 화학요법, 표적항암제, 면역항암제까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하지만 어김없이 마주하는 좌절 앞에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면역세포는 흔히 암세포를 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연구의 초점이 정상 세포에서 암세포로 전환하는 과정에 맞춰졌다. 여기서 암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봉착한다.
우리 몸은 30조 개-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연구 방법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 한다. 필리프 데트머의 책, ‘면역’에는 40조 개로 기재되어 있었다-의 세포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이 거대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30억 개의 글자로 이루어진 행동 지침이 DNA에 저장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의 수정란이 만들어질 때 생겨난 정보 (30억 개의 DNA염기쌍)는 세포가 30조 개가 될 때까지 복사된다. 게다가 우리 몸의 세포들은 1초에 380만 번의 세포분열을 해야 하므로 핵이 없는 세포를 제하면 초당 약 1200조 개의 염기서열이 복사된다. 이 어마어마한 복제 메커니즘에서 오류발생은 불가피하고 누적된 오류로 세포가 변이 된다.
그 상태로 시간이 흐르고 돌연변이가 반복되면 유전자 결핍을 가진 자손 세포가 태어난다. 여기에 DNA 복구 유전자의 손상과 우연이 겹쳐서 변이유전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빨리 분열할수록 복사도 대충 이뤄진다. 또 다른 유전자 변이가 생기고 이렇게 세대를 거듭하다가 임계점을 넘으면 암이라고 불릴만한 세포들이 나타난다. 수명이 늘어날수록 세포분열이 많아지기에 암도 따라서 증가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우리 몸에 저지르는 해악들을 상기해야 한다. 담배, 술, 맵고 짜고 달고 기름진 음식들 말이다(나도 떳떳하지 못하다). DNA 오류를 촉진하는 발암물질을 가리지 않고 탐닉하는 습관이 세포들을 궁지로 몰고 가고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지 않는 유전자가 활성화된다. 이 세포가 면역 회피 기전까지 사용하면 분열과 증식이 조절되지 않아 무제한 자라나는 비정상 세포 덩어리가 된다. 인간의 생물학적 수명이 40세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평균 수명까지 암에 걸리지 않는 것은 기적이라 불릴만하다. 우리가 단순히 ‘살아 있다’고 표현하는 상태는 실로 경이로운 일이며 희박한 확률의 행운이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상황이 행운임을 알게 되었을 때 저자는 삶과 카지노 게임의 주체인 ‘나’로 시선을 돌린다. 초당 380만 개의 세포가 죽고 새로 태어나며 평균 7년이면 우리 몸의 세포가 모두 바뀌는데 순간순간의 몸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정신적인 부분 또한 몸과 마찬가지로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그나마 기억의 연속성에서 ‘나’라는 동일성을 찾을 수 있겠지만 기억은 정확하지 않고 재구성되기 일쑤이다. 결과적으로 고정불변의 영속적인 실체로서의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에 따라서는 고정불변의 ‘나’가 없다는 사실에 혼란을 느낄 수 있으나 또 다른 누군가는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계기로 삼고 해방감을 가질 수 있다. 특히 내 몸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 죽으면 안 된다는 허상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다. 몸이 마음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암과의 공존을 이해하며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더욱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다.
암을 탐구하다가 그는 암과 암이 아닌 것, 정상과 비정상, 셀프와 넌셀프, 삶과 카지노 게임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상반되는 개념은 인간이 그려놓은 선일뿐 실제와는 판이했다. 우리는 살아있기도 하지만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다. 카지노 게임은 온오프 스위치가 아니라 삶과 맞물려 있는 스펙트럼이다. 개체의 소멸이라기보단 나와 주변이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저자는 소년 때 품었던 의문과 동일한 질문을 하는 환자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사람들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암과 카지노 게임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길, 새로운 시선으로 질병을 대하길 바랐던 것이다.그의 말처럼 카지노 게임은 직선이 아니라 일련의 흐름이다. 이 사실이 나에게 안도감을 준다. 오늘 이 순간이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