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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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람 Apr 22. 2025

카지노 쿠폰 폐기하시겠습니까?

기억을 버릴 수 있다면, 사람들은 조금 더 견딜 수 있었을까?

세상은 점점 더 빠르고, 복잡하고, 정확해졌다. 기계는 실수를 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스스로를 기계처럼 움직였다. 정보는 빛보다 빠르게 쏟아졌지만, 마음은 점점 말라갔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아무에게도 닿지 못하는 시대. 극단적인 개인주의는, 서서히 사람들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 끝엔— 우울의 팬데믹이 찾아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무기력, 정체불명의 외로움,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가슴속에서 썩어갔다.


자살률은 폭등했고, 정부는 마침내 ‘기억관리청’을 설립했다.


기억을 추출하고, 삭제하거나 보관할 수 있는 기술. 사람들은 고통을 견디는 대신, 기억을 버리기로 선택했다.


나는 그 기억을 수거하는 사람이다. 기억수거부 0427. 사람들이 지우고 싶은 순간을 대신 모으고, 없애거나, 봉인하거나, 혹은 되돌려주는 사람.


오늘의 첫 의뢰는 마포구의 한 아파트. 중년 여성의 요청이었다. “아들의 마지막 눈빛을 없애주세요.”


나는 그녀에게 기억추출기를 건넸다. 그녀는 눈을 감고, 침묵 속에서 하나의 장면을 끄집어냈다.


병실. 하얀 이불. 비워진 눈. 죽음 직전, 그녀를 바라보던 아이의 시선. 숨을 참은 채, 마지막으로 담아둔 그 표정.


추출된 기억은 8초짜리 영상으로 홀로그램 캡슐 위에 떠올랐다. 나는 장치를 들고 묻는다.


“정말 폐기하시겠습니까?”


그녀는 떨리는 손끝으로 입을 막고,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캡슐을 감싸 폐기 슬롯에 넣었다. 기억은 불타지 않는다. 단지, 감각이 닿지 않는 깊은 곳으로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 다음 의뢰는 젊은 남성. “군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는 말이 적었다. 추출된 영상은 흐릿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소리 없는 절규, 철모가 떨어지는 소리, 누군가의울부짖는 얼굴이 담겨 있었다.


그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물었다.


“이거 지우면, 죄책감도 사라질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이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누군가의 과거를 접하고, 그 속에서 점점 무뎌진다. 그건 아픈 걸 넘어서, 무의식이 닳는 일이다.


며칠 뒤, 내 집 앞에 익명의 기억이 도착했다. 흰 봉투 하나, 안엔 단 한 줄.


“카지노 쿠폰 수거하는 너의 기억은 누가 치워주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처음으로나에게 추출기를 사용했다.


곧,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여섯 살 무렵의 어느 새벽.

이불 속에서 눈을 떴을 때,

거실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였다.


어둠 속 그녀는 외투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채

현관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옆엔 작은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이불 안에서 그 장면을 지켜봤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

그 순간 집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그날 이후로, 그 일은 우리 가족 안에서 아무 말 없이 덮여졌다.


그 기억은 너무 조용해서,

더 오래 남았다.


캡슐은 생성되지 않았다.


나는 그 기억을 버릴 수 없었다. 왜냐면 그 기억은 내가 지금 이 일을 하게 된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는 의뢰인들에게 한 가지를 묻기 시작했다.


“정말 이 기억이 없어지길 바라시나요? 아니면… 견디는 법을 잊으신 건가요?”


그 질문에 어떤 사람은 울었고, 어떤 사람은 화를 냈고, 어떤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기억을 되가져갔다.


나는 더 이상 모든 기억을 폐기하지 않는다. 어떤 기억은 다시 품도록 도와주는 편이 낫다. 그건 고통을 다시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날은, 나 자신에게도 묻는다.


“넌 아직도 그 기억을 버리지 못했니?” 그러면 나는 가만히 앉아 그 장면을 꺼내본다. 엄마젖은눈,떨리는 어깨와목소리, 그리고 그날의 새벽 공기.


나는 그 기억을 지우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 기억이 나를 만든 조각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기억을 수거한다. 하지만 이제는 가끔, 기억을 되돌려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내가 잊게 해주는 줄 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조용히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그 기억을 다시 품을 수 있을 만큼 단단해졌을 때—


비로소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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