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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Jan 04. 2024

16화 나 오늘은 술집여자가 아니야, 영진 씨.

"여보, 내 장갑이 어디 갔을까? 혹시 당신 못 봤어요? "

아침부터 술집여자는 장롱을 뒤지고 있다.

"참 이상하네. 내가 분명히 장롱 서에 두었는데……. 이게 발이 달렸나?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장갑 그거 다시 사면되는 거지. 내가 또 하나 사줄게."

"거 당신이 결혼 전에 사준 거란 말이야. 이걸 어디서 살 수 있다고. 세상에 이걸 낄 날이 오다니. 나 정말 믿어지지 않아."


술집여자는 세상이 무너질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꿈이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술집여자는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동해가 갑자기 솟아올라 독도까지 육지로 연결되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이것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식당 문을 닫고 나서는데 아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어머니, 지훈이예요."

술집여자는 숨이 멎어오는 것을 느꼈다. 들숨이고 날숨이고 꽉 막혀버렸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결혼한 지 7년 만에 얻은 아들을 금이야 옥이야 키우면서 정혜는 행복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아들은 잘 자라주었고, 용접일을 하던 남편과 시골에 내려와 남편은 꽃을 기르고, 정혜는 꽃집을 운영하면서 늘 웃음이 끊이지 않는 나날을 이어갔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농장에서 일하던 남편이 트랙터 사고로 허리가 부러져 병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의사는 하반신이 마비될 거라었다.수술하고 또 수술하고,남편은 2년을 병원에 누워 있었다. 정혜는 모든 일을 놓고 남편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정혜가 남편을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보, 당신 잘못이 아냐. 지훈이가 못돼먹어서 그런 거야."

남편은 넋을 놓고 울고 있는 정혜를 부둥켜안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휠체어에 의지해 살고 있는 아빠 생각해서라도 지가 그러면 안 되는 거지."


침대에 누워 있는 남편을 남겨 두고 밥을 팔고 술을 팔아 살림을 꾸려갔고, 아들을 뒷바라지해서 서울법대에 입학시켰다. 물론 아들이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서 이루어낸 결과이지만, 어쨌든 동네가 시끌벅적할 정도로 잔치를 했고, 남들은 우리를 부러워했다.


아들은 군대를 마치자마자 국가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떠났고,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다. 미국 여자를 만나 자기들끼리 결혼을 했고, 자기들끼리 살고 있다. 그리고 거의 소통이 되지 않았다. 정혜는 울음을 먹고살았다.


기적처럼 남편은 몸을 일으켰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집안일을 다해 주고 있다. 정혜는 감사했다. 남편이 몸을 일으켜서 감사했고, 아들이 그렇게라도 미국에서 잘 살고 있어서 감사했다. 식당으로 찾아오는 동갑내기 늙은 친구들과 세상을 나눌 수 있어서 감사했다. 그러나 저 잘났다고 부모에게 전화도 하지 않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생각할수록 서운했다.


"어머니, 눈물을 거두시고 가게도 닫고 아버지와 편하게 사세요. 제가 두 분이서 사용할 만큼 넉넉히 보내드릴게요. 미국에도 한 번 오시고요."

정혜는 몇 번이고 볼을 꼬집었다. 꿈이 아니었다. 세상은 비만 내린다고 투덜거렸었는데, 그 비 속에 커다란 태양이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은 살아볼 가치가 있는 거라니까. 나에게 이런 일이 있을 줄 꿈에서라도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제 당장 죽어도 좋아. 정말 행복해."

정혜는 잘 삶은 수육을 가득 담아내왔다.

"잘 됐다. 너도 너지만, 집에 있는 형님이 팔짝팔짝 뛰었겠다."

꽁지머리가 더 좋아했다. 그는 이런 기쁨은 같이 나누어야 한다며 집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큰 소리로 통화를 했다.

"이게 다 하나님의 축복이다. 네가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온 것에 대한 하늘의 보상이야. 하여튼 축하한다. "

찰랑머리도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야, 술집여자. 아니 정혜야. 너 잘 찬 볼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술은 니가 사라. 어때? 내 말이 맞지? "

흰머리는 뭐가 그리 좋은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야, 어디 오늘뿐이겠냐. 앞으로 니들 술판은 내가 벌여 줄게. 걱정 마라. “

정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마음이 들떠 있었다.

”그래, 형님이랑 어디로 놀러 가는 거야? 우리도 데리고 가면 안 될까? "

흰머리가 주책맞은 소리를 늘어놓는다.

"야, 너는 꼭 그렇게 욕먹을 소리만 하냐. 이 형아처럼 정혜에게 축하금을 좀 줄 생각을 해라."

꽁지머리가 10만 원을 정혜에게 내밀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여보, 고마워.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어."

정혜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야. 이정혜. 나 최영진이야. 나는 니 안에서만 살고 있는 최영진이라고."

아들이 휠체어에 앉은 채 탑승할 수 있는 차량을 보내온 날, 남편은 소백산 자락에 잠들어 계시는 정혜의 부모님 묘소를 찾아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했다. 정혜는 울고 또 울었다. 이제 정혜는 더 이상 흘릴 눈물이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울었다. 행복했다.


"형님, 겨우 간다는 게 장인 장모님 산소입니까? 나 같으면 해운대 최고급 호텔에 앉아 부산 앞바다를 바라보며 진하게 한 잔 마시겠네요."

"맞아요. 모처럼 정혜랑 나갔는데……. 하기야 앞으로 더 좋은 데로 다니시면 되죠."

"그럴 때는 저희도 좀 데리고 가주세요. 이렇게 같이 한 잔 마시니 얼마나 좋아."

"좋지. 우리 자주 만나서 같이 놀자고. 나는 그대들이 우리 정혜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만으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어떻게 이런 인연이 닿았는지. 정말 고마워. "

여행을 다녀온 정혜가 늙은이들을 자기 집으로 불렀다. 그들은 술잔을 부딪쳤고, 흥이 돋았고, 그래서 그들은 노래를 불렀다.


“사아아아아랑해애애애애애애 다아아아아아앙신을 사아아아아랑해애애애애애애”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신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우리 아들놈은 뭐 하는지 몰라.”

“돈은 안 주어도 좋으니까 장가라도 갔으면 좋겠다.”

지들이 뭐가 부족해서 딩크족이 뭐야, 딩크족이.”

"딩크족이 뭐냐고? 그래도 비혼주의보다는 낫잖아 인마."

“우리 지훈이도 언젠가는 한국에 오겠지. 우리 만나러 말이야.”

밤은 깊어갔고, 늙은이들의 술판은 무르익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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