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아있는 죄와 벌
집에서 유동 쪽으로 백오십 미터 정도 내려가면 꽤 큰 이층 건물이 있는데 길보다 아래인 반지하층에 복싱 체육관이 있었다. 그 길을 지나다가 보면 쭈그리고 앉아 구경하는 사람들이 꼭 있었다. 길에서 내려다보면 창살로 막힌 유리 창문을 통해 땀으로 범벅이 되어 권투 연습하는 무시무시한 형들의 다이내믹한 모습을 구경하게 된다. 60년대는 레슬링과 복싱의 시대였다.
그 복싱 도장이 있는 건물의 이층에는 내가 잊지 못할 이용학원이 있었다.
내가 초등 3학년때이니 막내가 네 살 때 일이다. 어느 여름날 엄마가 막내 데리고 함께 카지노 쿠폰하고 오라고 카지노 쿠폰 삯 십 원짜리 지폐 두 장을 주셨다. 받은 카지노 쿠폰 삯에 맞게 당연히 동네의 단골 카지노 쿠폰관에 가야 할 일이었다.
동생의 손을 잡고 이발관으로 가는 네거리 한편에 얼음과자 즉 아이스케이크를 파는 리어카가 있었다. 모처럼 환한 거리에 나온 어린 동생의 눈을 그 리어카가 사로잡았다. 리어카 바큇살을 잡고 막무가내로 리어카에 엉겨 붙었다.
‘사줘’
일원에 두 개인 팥 아이스케키가 아닌 오 원짜리 아이스케이크를 사달라고 졸랐다. 뽀얀 우유 빛의 고급스러운 그것은 나도 그때까지 먹어본 적이 없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도록 ‘저거 사줘’만 반복하는 네 살 짜리는 고집불통 떼쟁이였지만 달래면서도 나도 먹고 싶은 맘이 슬슬 요동했다. 내게는 이발 삯으로 이십 원이 있었다.
‘그래 에라 먹고 보자’ 십원을 내고 아이스크림을 각자 손에 쥐었다.
천상의 맛이었다.
아이스케이크를 핥으며 흡족 해하는 동생의 손을 잡고 나는 돌연 걱정스러운 후회로 아이스케이크를 베어 물며 걷다 보니 이발관 앞이었다. 이발관엔 흰 가운을 입은 이발사가 여럿이었다. 문간의 이발의자에 붙어 서있는 이발사에게 용기를 내어 부탁했다. 내 생애 최초의 상업적 흥정일 것이다.
‘아저씨 오원어치씩만 카지노 쿠폰해 주세요’
‘뭐라고?’
‘동생 머리도 깎아야 하는데 돈이 십원밖에 없거든요’
‘이 녀석들 오다가 엄마가 준 돈 까먹었구나’ 동생의 손에 들린 이 이스케이크 막대기는 모든 것을 말해주는 꼼짝없는 증거물이었다.
‘저 모퉁이 돌아서 가다 보면 있는, 오원에 깎아주는 학원에 가봐라’
귀가 번쩍 띄었다. 반값에 깎아주는 카지노 쿠폰관이 동네에 있다니!
과연 복싱체육관 위에 이용학원 간판이 보였다.
그런데,
동생은 너무 어려 머리를 깎아줄 수 없다고 했다. 머리카락에 가위질을 하는 중에 졸다가 다칠 수 있어서 실습생들이 깎을 수 없다는 거였다. 안 졸게 할 테니 깎아달라고 졸랐더니 어린 녀석들이 귀여워서인지 학원장이 직접 깎아주겠다고 했다.
내 머리는 실습생이 이발기로 깎았다. 내 머리통을 학원생들이 실습용으로 이용하는 것이니 반값도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생의 이발을 생각하니 고맙기만 했다.
스르르 혀에 녹아드는 아이스케이크를 즐긴 짧았던 만족이 나와 동생의 머리통을 이용학원 실습용으로 이끈 셈이었다. 다행히 동생은 이발 중에 졸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잠이 오는데 서툰 실습생 형이 걱정되어 잠들 수 없었다.
이용학원에서는 머리를 깎고 나서 머리를 감아주지도 않았다. 다 깎고 난 머리가 왠지 어색했지만 동생의 머리통은 괜찮아 보였다. 아무튼 맛있는 아이스케이크도 먹고 이발도 해낸 성공적인 날이었다. 동생 손을 잡고 여기저기 해찰하며 나들이를 즐기고 집에 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동생이 형들과 엄마에게 경쾌하게 자랑했다. ‘나 아이스께끼 먹었다.’
그날 이실직고와 함께 조금은 억울했지만 엄마한테 아주 혼났다. 나만 한참을 무릎 꿇고 양손 높이 들고 벌을 서야 했다. ‘배임 횡령에 대한 벌’을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단단히 받은 추억이다.
어릴 적 맛있었던 것은 늙어서도 맛있다. 아이스크림이란 게 원체 맛있는 것이기는 해도 어릴 적 좋아했기 때문에 지금도 좋아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몸에 좋지 않고 특히 나이 든 몸에는 더욱 좋지 않다는 협박이 난무해도 평생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