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을 맘껏 먹고 자란 아이들
마당 넓은 집으로 이사하자 아버지는 키우는 닭의 마리 수를 대폭 늘리셨다. 카지노 게임 형제들의 입으로 들어올 달걀 수요를 훨씬 초과하는 미니 양계장 수준이 되었다. 전문 양계장의 케이지(cage)를 흉내 내어 이층 구조로 이동이 가능한 닭장을 만드셨다. 각목과 판자로 만들어서 장정 네 사람이 겨우 들 수 있을 정도로 무거웠다.
일층과 이층의 닭들이 싸는 똥이 각 층 아래의 똥 받는 판자 위로 쌓이게 해서 카지노 게임을 치우기 쉽게 했지만, 초등학생, 중학생에겐 좀 버거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병아리를 사 오셨지만 닭 사육은 우리 형제들 일과의 주요한 부분이 되었다.
다음날 학교에서 시험을 보든 뭘 하든 일요일이면 형제들은 닭똥을 치우는 것이 우선 과제이다. 일주일 동안 일층과 이층의 케이지 아래 받침에 쌓인 똥을 넉가래로 닭장 뒤편으로 밀어내면 아래로 떨어져서 모아진다. 수북이 쌓이는 허옇고 검은 덩어리가 섞인 잿빛 닭똥을 부삽으로 퍼서 양동이에 담아 헛간 옆 보관장소로 운반한다. 철버덕 붓다가 튀긴 질퍽한 똥 세례를 받으면서도 우리는 끽끽 댔다. 똥치우기 싫다며 그 시절 그 나이에 맞게 불평도 하고 내뺄 궁리도 했겠지만 싫어했던 것은 전혀 생각나지 않고 여름 장대비 내리던 날 물똥 치우던 날마저도 그리울 지경이다. 생각해 보면 참 건강한 아이들이고 도시 복판의 촌놈들이었다.
닭똥을 다 치우면 형제들은 리어카를 끌고 양동 시장 닭전머리 지나 언덕 위에 있는 가축 사료가게에서 닭사료 대여섯 부대를 실어온다. 셋이서 밀고 끌고 낑낑대며 시장통을 가로질러와서 집 헛간에 쌓는다. 이렇게 일요일 오전의 축산(畜産) 노동을 마치면 꿀맛 같은 휴식과 인센티브가 기다리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카지노 게임 치우고, 닭장을 청소하고, 일주일에서 보름치 사료 준비까지 마치면 아버지는 거금 오십 원을 주셨다. 그 오십 원에 대한 전결권은 전적으로 우리 형제들에게 있었고 우리는 다수결로 거금의 활용 방안을 결정했다. 저금을 한다든가 가계에 유용한 물건을 산다든가 하는 착하거나 배부른 옵션은 없었다. 가끔 그 돈으로 몽땅 국화빵을 사다 먹을 때가 있었다. 동네 국화빵이 1원에 두 개 하던 시절이다.
풀빵가게 아저씨는 그런 일요일이면 한가하게 계시다가 우리 때문에 바쁘셨다. 가스불을 붙이고 버너 위의 둥근 풀빵 기계가 풀 스피드로 돌아가고 심부름 특사인 둘째 형과 나는 특권처럼 노릇노릇하게 갓 구워져 나오는 국화빵을 마음대로 집어먹을 수 있었다.
풀빵가게 재산인 나무 판 가득 담긴 백개의 카지노 게임에 덤으로 주신 열개까지 들고 와서 카지노 게임 잔치판을 차린다. 단팥이 듬뿍 든 풀빵을 각자 알아서 물리도록 먹고도 남은, 풀 죽은 풀빵은 나중에 또 먹는다. 어머니의 밥 좀 먹으라는 야단은 귓전으로 넘기고 그날은 종일 카지노 게임이 주식이 된다.
지금의 카지노 게임 풀빵 값으로 비교해 보면 당시 오십 원은 지금의 오륙만 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
닭들은 달걀을 퐁퐁 잘 낳았다. 아침마다 닭장 케이지 앞으로 굴러 도열한 연한 갈색의 알을 성난 닭의 부리를 피해 집어서 바구니에 담아 오는 것 또한 일과의 작은 일부였다.
형제들의 도시락에 계란프라이가 빠진 적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엄마표 진짜 카스텔라 빵도 자주 만드셨다. 어머니가 분리해 준 미끈한 계란 흰자위를 팔이 저리도록 열심히 저어 어머니의 합격 판정이 내릴 때까지 거품을 만드는 일은 당연히 우리들 몫이었다. 서로 교대하며 백번씩 횟수를 세가며 거품기를 힘차게 젖는다. 빨리 합격이 되어야 맛난 카스텔라를 빨리 먹을 수 있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 안에 거품이 부풀어 그릇을 거꾸로 뒤집어도 거품이 흐르지 않아야 합격이었다.
우리 형제들이 부쩍부쩍 자랄 때 몸 안의 단백질 근육은 거의 틀림없이 단연 계란으로부터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먹고 저렇게 먹어도 부엌에 남는 계란이 항상 수북했는데, 내다 팔지는 않고 어머니는 여기저기 계란을 갖다 드리는 배달 심부름을 자주 시키셨다.
한 번은 학교에서 선생님들 간 친목 모임이 있었는지 어머니가 커다란 양은 주전자 가득 계란을 삶으시더니 나를 불러 학교 교무실로 가져다 드리라고 하셨다. 투덜투덜 낑낑대며 삶은 계란으로 가득한 무거운 주전자를 들고 학교를 한번 더 다녀왔다. 날계란을 열개정도 담은 그릇을 보자기에 싸 들고 심부름 다녀온 곳 중에는 이웃한 선생님댁도 있고 우리 집 단골의 연탄가게도 있었다.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절에 계란을 맘껏 먹고 자란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싶다. 우리 형제들은 먹는 것만큼은 남부럽지 않았다고 해도 된다. 그래서인지 잔뜩 흐린 날 닭똥을 치울 때의 고약한 냄새마저 아련한 소년시절의 흐뭇한 추억이 되었다. 아마도 소박한 가계를 꾸리던 부모님도 형제들이 서로 도와 닭똥을 치우고 받은 용돈을 서로 다투지 않고 다채롭게 사용하는 것을 보며 흐뭇해하셨을 것 같다.
가끔 키우던 닭 중에 늙은 닭을 잡아먹을 때도 있었는데 닭을 잡던 날의 난감한 기억은 나이가 들어가도 추억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 풀빵은 아무래도 그 옛날 카지노 게임 맛이 아니다. 붕어빵이어서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