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 넥스트 도어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2024) 리뷰
고통만큼 혼자만의 것이 있을까. 조금도 경감되지 않는 고통에 압도당한다면, 그리고 이 고통이 어김없이 반복적으로 찾아올 것이 명백하고 결국 그 끝이 죽음이라면, 누구나 이 지옥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자살하고 싶어 한다. 자살이라는 표현에 동의하지 않거나 반감을 가진 이들은 삶을 중단시키는 이러한 선택을 존엄사나 안락사로 부른다.
영화 <룸 넥스트 도어의 주인공 마사(틸다 스윈튼)는 말기 암 환자다. 자궁에 뿌리내린 암세포가 결국 장기와 뼈까지 속속들이 점유한 상태다. 항암 치료에 지쳤고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병원에서 아프다 죽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어떻게 고통을 끝낼 것인가. 존엄사가 합법화되지 않은 미국에서 그녀가 찾아낸 방법은 다크웹을 통한 약물 구입이었다.
죽을 수단은 찾았지만 한 가지가 난관이다. 혼자 죽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자신이 죽은 후 주검이 오래 방치되어 훼손되기를 바라는 이는 없을 것이다. 또한 죽음에 이를 때까지 하루하루를 비장하거나 지독히 외롭게 보내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얼마간이라도 보통의 날처럼 일상을 보내다 떠나고 싶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죽음을 가까이서 발견해 줄 누군가가 간절하다. 이때 옛 친구 잉그리드(줄리안 무어)가 마사의 투병 소식을 듣고 찾아온다.
마사와 잉그리드는 옛 친구다. 각자 나름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아 자신들의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고 인정도 받았다. 종군기자로 세계 분쟁지역을 떠돈 마사로서는 친구들과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을 뿐 서로에 대한 신뢰는 여전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돈독한 우정을 다지기에는 마사의 상태가 심각하다. 마사는 자신의 병의 위중함을 털어놓고 고통을 내려놓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마침내 잉그리드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함께 해달라고 부탁한다.
마사는 종군기자로 분쟁지역을 떠돌며 목전에서 무참히 파괴되는 죽음을 수없이 목격했다. 분쟁지역 어디에 존엄한 죽음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녀는 저널리스트로서 자신이 목격한 무수한 죽음과 삶을 기록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고통과 싸우는 전쟁에서는 단 한 줄도 남기지 못한다. 육체도 정신도 글쓰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 끌어모아야 하는 집중된 정신도 허리를 곧추세울 척추의 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쇠약해지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게 창조는 불가능했다. 그녀의 삶을 충만하게 했던 책도 음악도 영화도 더 이상 향유할 수 없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지난날을 추억하는 것, 지난날을 얘기하는 것. 하루가 다르게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고 느끼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게 또렷한 것은 과거의 자신뿐이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길어 올린 과거의 가장 아픈 부분에 딸이 있다. 10대에 사랑한 남자와의 사이에서 미셸이 생겼지만 혼자 낳아 키웠다. 미셸에게 아빠는 중요한 사람이지만, 그녀는 남자와 어긋난 인연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었다. 휘몰아치던 순간들의 누적된 감정을 이랬다는 한마디로 정리하기도 불가능했다.
미셸에게 아빠의 부재는 심각한 결핍을 낳고 엄마를 원망하고 미워하게 만들었다. 어떤 순간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한 관계를 되돌리기란 얼마나 불가능한가. 모녀 관계라고 다르지 않았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고막이 터지는 전쟁터에서, 미셸은 부모에게 버림당했다는 절망과 고독의 전쟁터에서, 각자 많이 불행하고 간간이 웃으며 살았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을 서로에게 지우면서 말이다.
보통 삶의 종착지에 함께 다다를 사람으로는 당연히 가족이 지목되지만 마사는 그럴 수 없다. 미셸은 엄마가 암과 벌이는 사투에 냉담했고 마사는 이를 받아들였다. 마지막이 꼭 가족이어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이들의 특권이다. 자신의 마지막을 함께해 줄 이가 젊은 시절 같은 고민과 열정을 공유했던 성숙한 인격의 친구라는 것에 오히려 안도한다.
마사와 잉그리드의 대화는 놀랄 만큼 활달하고 지적이다. 전쟁터에서 꽃 피는 사랑 그 간절함과 필연성. 80년대 뉴을 풍미했던 반짝거렸던 지성과 욕망의 주체들. 비극 속에서도 이어지는 삶의 소극과 아이러니. 그리고 마침내 삶과 죽음. 더 열심히 암과 싸우라는 재촉에 대한 완전한 반대와 거부. 암 투병을 마치 악과 싸워 이겨야 하는 영웅 서사로 만들고 싶어 안달인 암 환우회의 기만에 대한 해학. 그리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자신의 온전한 선택으로의 존엄사.
마사의 마지막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우아하고 찬란했다. 노란 슈트를 입은 채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떠난 마사는 안락해 보인다. 너무나 생생해 죽음이라 느껴지지 않는다. 죽음을 상상하는 빛은 잿빛이겠지만, 그녀와 주변 어디에도 암울한 기미는 없다. 개나리처럼 노란 슈트, 그녀가 누워있는 붉은 선베드, 한 번도 헤엄쳐보지 못한 푸른 수영장, 선베드에서 조망되는 울울한 초록 숲까지, 죽음을 은유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마사의 존엄사는 나도 저렇게 죽고 싶다는 철딱서니 없는 상상을 자아낼 만큼 우아하고 청결하다. 영화 내내 투병으로 파리해진 마사 말고는 모든 공간적 배경이 화려하고 생생한 색들로 채워졌다. 이는 침울한 죽음에 대한 완벽한 역설인 동시에 그가 취한 죽음의 방식이 보통 인간이 누릴 수 없는 어떤 경지임을 함의한다. 누구나 마사처럼 존엄하게 죽을 수는 없다는 진실을 일깨운다.
나는 이 영화를 존엄사에 대한 영화로만 보지 않았지만 결코 이 주제를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사의 존엄사와 대비되는 외롭고 비참한 마지막은 지구 어디에나 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플랜 75가 보여주는 죽음 권하는 사회는 ‘미끄러진 경사길’에서 떠밀려 죽을 수밖에 없는 가난하고 소외될 유사 존엄사를 예견한다. 사회 전반이 양극화로 불평등이 심화되는 지구에서 보통 사람이 조마조마하며 맞닥뜨릴 최후는 마사의 존엄한 죽음과는 거리가 멀다고 암시한다.
얼마 전 남유하의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를 읽고 착잡했다. 말기 암으로 극도의 고통을 겪는 저자 엄마의 소원은 어서 고통을 끝내는 것, 해서 딸인 저자는 엄마의 선택을 조력하기 위해 함께 스위스로 떠났다. 나는 저자처럼 용감할 수 없지만 그의 조력을 존중한다. 하지만 한국에도 시급히 존엄사가 합법화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는 선뜻 동의를 표하기 어렵다. 고통이 극심하고 회복이 불가능한 경우라는 전제가 확고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충분할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위스나 캐나다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를 합법화했다. 저자가 소개한 캐나다의 경우 2022년 기준 인구의 4.1%가 조력 사망으로 떠났다. 4.1%는 2022년 기준 캐나다 인구 약 3900만 명 중 16만이 넘는 수치다. 캐나다 정부로서는 의료비 삭감의 현저한 효과를 보겠지만, 나는 어쩐지 16만이라는 숫자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16만이 넘은 조력 사망이 온전히 자신만의 결정과 선택이었다는 것이 영 믿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