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1995, 신경숙, 문학동네) 서평 에세이
얼마 전 지인과 대화하다 문학 표절로 화제가 옮아갔다. 소설가 신경숙이 불려 나왔다. 표절 논란이 있을 당시 진정성 있는 사과면 수그러들었을 사건을 궤변으로 달아날 구멍을 내는 바람에 더 빈축을 사고 말았다. 당시 표절로 거론된 소설의 문단은 누가 읽어도 표절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지인에게 이런 우스갯소리를 했다. 표절이 명백하지만, 나는 <외딴방 때문에, <외딴방을 쓴 신경숙이기 때문에, 그녀를 용서한다고(표절을 옹호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개 독자의 용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마는 그랬다. 흔히 ‘공순이’로 멸칭되던 여자들의 카지노 쿠폰과 생활상을 어느 작가가 이렇게 구체적이고 연대적 연민으로 구현했는가 해서다.
소설이 직접 경험을 바탕으로 써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소설은 그랬기에 자칫 타자화로 흐를 위험을 줄인다(자기애의 함정도 있지만). 그녀 자신 컨베이어 벨트 위로 쉴 틈 없이 밀려 들어오는 판넬에 기계처럼 나사를 박아 넣던 16세의 공장 카지노 쿠폰자였다. ‘산업 역군’이라 치켜세우지만 실은, 누구도 귀해하지 않았고 착취만 일삼았던 ‘여공’말이다.
이들은 중식비와 교통비를 제하면 고작 하루 오륙백 원에 불과한 일당을 받고도 방세를 내고 생활하고 그 와중에 가족을 부양했다. “치약 하나 사면 그걸로 삼 년” 버티며 기적을 일군 것이다. ‘한강의 기적’은 이들 없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유포되고 공유되는 ‘공순이 혐오’는 소설 속의 소녀 카지노 쿠폰자 ‘나’들처럼 스스로를 사랑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무시와 하대를 기본으로 하는 작업명령, 노조를 ‘빨갱이’ 취급하며 악랄하게 노조 파괴 공작을 일삼는 사용자와 그 수하들, 퇴근 시 벌어지던 모욕적 몸수색, 산업체특별학급에서 주야간같이 쓰던 교실 책상에 “나 같으면 공순이 하느니 차라리 죽는다”고 휘갈겨진 혐오적 낙서. 이 모든 차별과 멸시를 공기처럼 마시며 자신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아버지가 근무했던 학교에서 만났던 소설 속 산업체특별학교 여학생들
내가 이들을 기억하는 방식엔 내 삶의 한 조각이 연루되어 있다. 소설의 화자 ‘나’가 다니던 야간학교는 산업체특별학교(이하 산특)라 불렸다. 미처 학교 공부를 마치지 못한 여공들을 위해 공장 퇴근 시간을 조금 일찍 당겨 밤에 학교로 보낸 것이다. 물론 산특은 공장 사용자들이 이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해서 고안한 것은 아니다. 산특을 하면 사업체 경영에 특혜를 주는 국가 시책에 동원된 것이다. 어쨌거나 배움의 열망이 있던 여공들에게 산특은 작은 숨구멍이었다. 이들이 명실공히 ‘주경야독’을 구현한 곳은 영등포여고 산업체특별학급이었다.
내 아버지도 이 산특의 교사였다. 소설처럼 고등학교가 아니라 중학교였다. 초등생일 때 나는 엄마와 함께 아버지가 근무하는 학교로 저녁 도시락을 배달하러 가곤 했다. 아버지가 식사를 끝낸 후 도시락을 받아 들고 나설 때면 검은 교복을 입고 교문으로 바삐 걸어들어오던 일군의 여학생들을 마주치곤 했다. 분명히 교복 입은 학생인데 어쩐지 내 중학생 언니처럼 앳되지 않은 그들을 어색하게 바라봤던 것 같다. 이들이 바로 소설에서 등장하는 산특 여학생인 ‘여공’들이었다.
처음 <외딴방을 읽을 때도 다시 읽을 때도 내게 카지노 쿠폰자 여학생의 존재는 남달랐다. 보았고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때 수차례 스쳤던 그들을 소설에서 다시 만났을 때 내 감정은 좀 복잡했다. 보았고 알았지만 까맣게 잊고 있던 이들이 돌연 부활했기 때문이다. 무심한 내 기억 상실이 무안하고 미안하자 적잖이 당황했던 것 같다. ‘나’가 그 시절을 소설로 옮기고 당시 산특을 함께 다녔던 급우로부터 연락을 받자 당황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냥 목격자로 남으려 했던 그녀에게 너는 타자가 아니라 ‘당사자’라고 알려왔을 때, 그 어떤 질책보다 따끔했을 회초리의 맛, 부끄러움이었다.
말하지 않을 수 없어 기어이 소설로 쓰고 말았지만, ‘나’는 그때도, 그때의 자신도, 과거로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가 되지 않는 데에는 상처가 있다. 상처를 대충 싸매고 에두르려 했는데 불현듯 죽비를 들고 나타나 “네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걸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냐”는 일갈로 내리친다. 급우가 무심히 던졌을 불평은 ‘나’가 그 ‘외딴방’에서 얼마나 도망치고 싶었던 가를 역설한다. 그런 것이 있지 않은가. 도무지 아무렇지 않은 과거가 되지 않는 순간들 말이다.
오래되어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아버지는 산특의 교사로 일하며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했던 것 같다. 애들이 진짜 열심이라고 했던 것 같다. 내겐 그냥 아버지였던 그가 처음으로 선생님으로 보였던 것 같다. 소설 속 교사의 생각처럼 아버지를 스승으로 만들어준 그들도 “여느 주간 학생들과 똑같은 삶의 희망과 절망, 포부, 자질구레한 일상의 즐거움”을 누렸을까. 그랬기를, 그래서 소설 속 ‘외딴방’들의 인물들처럼 나름의 ‘의젓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를...
다시 ‘여공’들을 생각한다
<외딴방를 다시 읽게 된 것은 문학평론가 백낙청이 이 소설을 평가하는 유튜브를 우연히 보면서다. 그는 이 소설이 카지노 쿠폰운동의 전투성을 강하게 드러낸 카지노 쿠폰소설이랄 수는 없지만, 카지노 쿠폰자 삶의 구체성이 있고 이것이 이 소설의 가치라도 평했다. 그랬나. 아련한 기억을 더듬다 ‘외딴방’의 그녀들을 다시 만나보자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소설가의 변처럼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인 <외딴 방은 78년부터 81년까지의 시대상을 ‘여공’ 카지노 쿠폰과 삶을 중심으로 펼쳐 나간다. 읽노라면 이런 엄혹한 시대를 살아내느라 ‘여공’을 위시한 카지노 쿠폰자 민중이 얼마나 고되고 불안했을까 마음이 아프다. 박정희 유신정권의 폭압적 불법 카지노 쿠폰조합 탄압, 가난한 민초들, 12.12 쿠데타, 광주 학살, 전두환 정권이 벌인 인권 유린의 현장 삼청 교육대 등 정말 가공할 폭력을 겪으며 살아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엔 카지노 쿠폰과 삶을 소외시키는 이데올로기가 없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낸 ‘여공’들의 카지노 쿠폰과 삶이 연민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연민은 값싼 동정으로 쉽게 매도될 수 있는 대상화된 감정이 아니다. 가엽다고밖에 할 수 없는 소녀들의 가혹한 카지노 쿠폰과 박한 임금, 몸뚱이 하나만 누이면 더 이상의 공간이 남지 않던 그 좁은 ‘외딴방’을 쓸고 닦는 소중한 마음, 고된 카지노 쿠폰 끝에 산특 교실에서 꾸벅꾸벅 졸며 못다 한 소녀 시절의 단꿈에 빠지던 학창시절, 각성한 카지노 쿠폰자로 사람답게 살겠다는 ‘여공’들의 투쟁과 좌절, 어떤 좌절 끝에 ‘외딴방’을 무덤으로 만든 젊은 여성 카지노 쿠폰자의 삶과 죽음까지, 이 모두 처절하지만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한편 그녀의 소설에 “교묘한 무공해성”(박해현)이 떠도는 것도 사실이다. ‘여공’들이 모두 무해한 존재로만 그려지거나, ‘나’의 ‘큰오빠’인 23살 가장을 위시해 누구 하나도 삐뚜름하지 않은 완벽한 가족애, 이로 인해 공고히 구축되는 흠결 없는 가족주의, 왜 등장했는가 의구심이 드는 ‘창’이라는 인물의 모호함 등이 그렇다.
<외딴방을 두 번째쯤 읽었을 때인가. ‘나’가 존경하고 연민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큰오빠’에 대한 강한 공감이 지나치게 무공해 하게 그려졌다고 생각했다. ‘나’가 16살일 때 23살이었던 ‘큰오빠’는 동사무소(지금의 행정복지센터를 당시는 이렇게 불렀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공무원으로 일했다. ‘나’가 상경하자 함께 살기 위해 방을 얻고 아등바등 살아간다. 동생을 보살피는 23살의 가장을 ‘나’는 “...시퍼런 청춘인 그의 어깨엔 장남이라는 책임감이 천형처럼 짊어져 있었다”고 썼다.
아버지보다 더한 가부장으로 여동생들을 폭압적으로 다룬 내 오빠에 대한 반동이었나. 나는 23살 오빠를 향한 ‘나’의 연민이 가부장의 그늘이 만든 그림자로 여겨졌다. 16살 소녀가 10시간은 기본이고 잦은 밤샘 잔업까지 하고 집에 와서는, 잠깐 쉬지도 못하고 큰오빠의 밥을 차리고 도시락을 싸고 외딴방을 쓸고 닦고 야간학교를 다녔다. 어린 ‘나’의 카지노 쿠폰과 가사카지노 쿠폰과 학업이 ‘큰오빠’의 천형을 초과한다고 생각해, ‘큰오빠’를 향한 연민이 공감되지 않았다.
다시 읽어도 ‘나’가 더 딱하다. 하지만 23살의 ‘큰오빠’도 이제는 장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 오빠를 향한 저항이 ‘큰오빠’에 대한 책임감 있는 가부장을 저평가하게 만들었음을 시인한다. 군대 ‘방위’(지금은 ‘대체 복무’라고 한다)로 생활하면서, 방세와 생활비를 조달하기 위해 가발을 쓰고 학원 아르바이트를 하는 헌신이 그 시대 누구나 해냈던 가부장의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관식’의 초월적 가부장이 허위적 신드롬을 만든 것처럼, ‘큰오빠’의 그것도 그랬기에 모든 오빠들로의 동일시는 경계한다.
위에 언급한 소설의 흠결은 이를 넘어서는 미덕으로 상쇄된다. 여느 카지노 쿠폰소설이건 카지노 쿠폰자를 각성시키는 매개자로 어김없이 전태일이 동원되지만, 이 소설은 같은 ‘여공’이었던 YH무역의 김경숙을 각인시킨다. 겨우 21살의 나이에 폭압적 농성 진압에 몰려 건물에서 투신한 소설가와 이름이 같았던 김경숙. 소설은 그녀를 이름도 희미해진 박제된 열사로서가 아니라, ‘여공’으로 카지노 쿠폰과 삶을 일구었던 어느 ‘외딴방’의 그녀로 호명하고 있다. 카지노 쿠폰자의 날에 ‘외딴방’의 그녀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존경과 사랑으로 그녀들을 불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