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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피 Jan 16. 2025

초단편소설 4.

진주목걸이

진주의 할아버지는 진주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 그리고 진주를 때마다

"우리 진주는 이름값을 할끼다." 말씀하시곤 하셨다.

이름값을 할 거라던 진주는 다섯 살 때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싸릿눈이 날리던 날 보육원에서 멀지 않은 동네 슈퍼마켓 앞에서 발견되었다.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 쭈그려 앉아있던 진주를 처음 본 슈퍼마켓 주인은 이런 일을 겪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미간을 살포시 찌푸리다가 진주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이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뭐 하니?"

"엄마... 기다려요."

"엄마는 어디 계시니?"

"..."

"아줌마가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니? 친구는 이름이 뭐야?"

"진주... 한진주요."

"그래 진주야. 추우니까 가게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자."


좁은 슈퍼마켓 안은 난로가 있어 따뜻했다. 난로 위에는 작은 양은주전자가 자신이 끓는다는 것을 경고라도 하는 듯 주전자 입 구멍으로 연기를 뿜고 있었고 그 옆에는 은박 포일에 싼 덩어리 두 개가 있었다. 달달하고 꼬수운 냄새가 났다. 슈퍼 주인아주머니는 컵에다가 주전자에 있는 것을 따라서 진주에게 건넸다.

"보리차야. 후후 불어서 마셔."

진주는 아주머니가 시키는 대로 후후 불어서 보리차를 마셨다. 다섯 살은 보리차 마시기 좋은 나이일까. 정말 구수한 맛이 났다. 꽁꽁 얼은 몸과 마음이 풀리는 듯했다.

보리차를 마시고 있는 사이 아주머니는 쟁반 하나와 집게를 들고 와서 난로 위의 은박 덩어리 두 개를 집어 크게 후~후~ 불면서 포일을 벗겼다. 포일이 벗겨지면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는데 안에 든 덩어리는 다름 아닌 고구마였다. 속살이 아주 노랗고 달달해 보였다. 아주머니는 하나를 먼저 다 깐 다음 진주에게 건넸다. 잡을 부분은 휴지로 감싸 뜨겁지 않게 손잡이를 만들어주었다. 진주는 마음속으로 '엄마보다 낫네.' 생각했다. 그래서 진주를 버리고 갔을까. 진주는 이미 자신이 버림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주머니 앞에선 다섯 살답게 모르는 척, 순진한 척했지만 말이다.


아빠는 다른 여자를 만나 진작 도망가버렸고, 사기꾼 엄마와 살 바에는 버림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진주는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주의 불쌍한 표정은 거의 습관이었다. 어린아이의 그런 표정은 살아가는데 의외로 유용했다. 붕어빵집 앞에서 붕어빵이 구워지는 걸 보며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붕어빵 한 개를 틀림없이 받았고, 만두가게 앞에서 찜솥에서 갓 나오는 만두를 보며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왕만두 한 개를 어김없이 받았다.


진주의 불쌍한 표정은 보육원에 도착해서까지도 이어졌다. 그 보육원은 보육원 치고 예뻤다. 진주는 어릴 때부터 예쁜 집을 보는 것이 좋았다. 살게 되면 더 좋겠지. 보육원 원장님은 진주를 보며 몰래 눈물을 훔쳤다. 그러다가 슈퍼 아주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배웅하고는 신속하게 방 배정을 해주었다. 진주의 보육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적당한 교육을 받았고 진수성찬이 아니었더라도 하루 세끼를 잘 먹을 수 있었다.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보육원의 하루는 평안했고 그만큼 빠르게 흘러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진주는 불안했다. 만 18세가 되면 강제 퇴소를 해야 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진주가 18세가 되기 직전 아동복지법이 개정되어 진주의 의사에 따라 보호기간을 연장할 수 있었다. 그래도 만 24세가 되면 보육원을 떠나야 했다. 진주는 퇴소 후의 삶을 위해 준비를 해야만 했다.


진주는 똑똑했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때부터 되는대로 일을 하고 지냈다. 나갈 때 나가더라도 미리 돈을 조금이라도 모아둬야 했다. 진주는 슈퍼마켓 아주머니께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 일자리를 부탁했다. 아주머니는 언제나처럼 진주의 표정에 넘어가주었고 자신의 일처럼 열심히 알아봐 주었다. 하지만 나이도 어린 데다 경력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서 보통은 단기로 일할 곳들 뿐이었다.

그러다 장기 일자리가 하나 들어왔다.

단기로 일하면서 나름의 인지도를 쌓은 진주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누군가가 진주가 일해주기를 원했다. 보육원과 반대 방향으로 15분쯤 가면 있는 개인 별장의 청소 일이었는데 월, 수, 금 일주일에 세 번만 출근하면 됐고 일하는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였다. 그런데도 월급은 꽤 많이 주는 편이었다.


첫 출근을 하던 날 진주는 근무지인 별장까지 걸어가며 몇몇 좋은 집들을 보았다.

"반대쪽으로 이렇게 조금만 걸어 나와도 다른 세상이네."

허름한 슈퍼마켓을 지나 보육원으로만 걸어 다녔던 진주는 자신의 입맛대로 주택을 지어 사는 사람들의 보금자리를 보며 부러움에 닭살이 돋는 지경이었다. 자신이 일할 별장 앞에 선 순간, 돋은 닭살이 오도도독 떨어질 것 같았다. 언젠가 TV에서 본 적이 있는 집이었다. TV로 본 날부터 진주의 판타지가 된 유명한 드라마 작가의 별장이었다.


별장 안으로 들어가니 여자가 서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 드라마 작가는 아니었다.

'내가 잘못 봤나? 아닌데. 분명 그 별장인데.'

그 생각을 하는 찰나 앞에 서있는 여자는 인사를 하며 용건을 전했다. 내용을 들어보니 역시나 그 여자는 주인이 아니었고 주인의 비서인지 매니저인지 쯤이었다. 주인은 되도록 일하는 사람과 마주치지 않았으면 한다는 의도로 정해진 근무 요일과 시간이라고. 뭐 드라마 작가 실물 본다고 딱히 좋은 건 아니니 아쉬운 건 없었다.진주는 마냥 좋았다. 자신의 판타지 안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 일이 비록 청소일이라도. 청소하는 내내 그 집 안에 있을 수 있으니까. TV로만 볼 수 있던 집 안에서 내도록. 진짜 드라마 같았다.

달리 조건이 까다롭지도 않고 다만 1층의 서재만 출입을 금했다. 작가인 주인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공간일 텐데도청소를 만류하다니 작가도 보통 예민한 사람이 아닌가 보다생각했다. 그렇지만 청소할 곳줄어드는 진주에게는 편하고 좋은 일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별장에서의 근무가 시작되고 한 달이 지났다. 별장이 전체적으로 깨끗해 보여도 워낙 커서 손 가는 곳들이 많아서 생각했던 것보다 일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진주는 주말엔 월요일이 오기만을, 화요일엔 수요일이 오기만을, 목요일엔 금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별장에 있는 동안만큼은 진주 자신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분은 어느 날 진주를 잡아먹었다.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휴식을 보내던 진주의 눈에 들어온 서재. 그날따라 서재 문만 튀어나온 것처럼 그 문만 보였다.

'작가의 서재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한번 들어가 보자.'

서재 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 약간 고민이 됐다.

'걸리면 어떡하지. 아 걸리면 또 불쌍한 표정 지으면서 대충 둘러대지 뭐.'

서재 문이 열렸고 눈앞으로 큰 책장이 보였다. 항상 커튼이 쳐져 있어서 몰랐는데 확 걷어보니 정원의 초록색이 잘 보이는 창이었다. 한낮의 빛은 서재 전체를 비췄다. 그때 잠시잠깐 무언가가 반짝하고 굵은 빛을 냈고 진주는 그 빛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빵이라도 진열해 놓은 듯 아크릴 박스 안에 진주목걸이 하나가 진열되어 있었다. 진주목걸이는 별장보다도 아름다웠다.


자세히 쳐다보니 진주목걸이는 목걸이의 형태만 유지하며 진열되어 있었고 진주알 하나하나는 떨어져 있었다. 세어보니 진주알은 총 43개였다. 진주는 마치 홀린 듯 아크릴 박스를 열었고 진주 한 알을 손에 집어 누가 볼 세라 커튼을 원래대로 해놓고 얼른 서재에서 나왔다. 서재 문을 닫은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주는 너무 놀란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진주를 입에 넣고 삼켜버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작가의 비서인지 매니저인지 아무튼 그 여자였다. 순발력이 좋은 진주는 청소를 하가 본 듯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했다.

"곧 작가님이 들어오실 거라서요. 오늘은 이만 하시고 가셔도 될 것 같아요. 급여는 원래 근무시간대로 계산할 테니 걱정 마시고요."

여자가 말했다. 진주는 알겠다고 하며 얼른 정리를 끝내는 척하며 별장을 나섰다.

보육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진주는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했다. 진주목걸이 삼켰을 때. 진주알 먹어도 되나요. 이런 검색이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비슷한 사례가 없었다. 진주는 다시 인터넷 백과사전으로 진주를 검색했다. 진주조개의 체내에 생기는 딱딱 덩어리, 탄산칼슘이 주성분. 이런 내용을 읽어보니 진주가 진주의 뱃속에 있는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을 것 같았다.


보육원에 도착한 진주는 바로 씻으러 들어갔다. 씻는 동안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구나. 뱃속에 있는 게 문제가 되겠구나. 진주가 설마 소화가 되겠어? 나와야 해.'

진주는 화장실 신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혹여 뭘 먹기라도 하면 같이 소화 돼버릴까 봐 저녁도 먹지 않고 기다리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피곤했는지 잠이 든 채로 아침이 오고 진주는 평소대로 일어나자마자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에 주방에 가서 일회용 비닐장갑 몇 장을 챙겨서 갔다.

용변을 본 진주는 물을 내리지 않고 자신의 변을 자세히 보았다.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으나 쭈그려 앉아 변을 쳐다보고 있으니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하는 시가 떠올랐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진주야 제발 나타나렴.

왼손으로는 코를 꽉 쥐고 오른손에는 비닐장갑 세 겹을 낀 채로 그것을 파헤치다가 반짝하고 펄이 보였다. 진주는 기뻤다. 부모님이 진주를 찾으러 온다고 한들 지금처럼 이렇게 반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주는 그것을 물로 헹구고 아기들도 쓸 수 있는 자극 없는 세정제로 닦고 또 닦은 다음 중요한 것들을 모아두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진주를 찾고 나니 다른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주인이 진주가 없어진 걸 눈치챘으면 어떡하지. 서재에 왜 들어갔다고 할까?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아직 모르는 거겠지.'

진주는 걱정을 하면서 주말을 보냈고 다시 출근날이 왔다. 현관문에 쪽지가 붙어있었다.

'진주 씨. 월요일인데 오늘은 작가님 일정 때문에 못 뵙고 먼저 가네요. 다른 할 일은 없고 내부 정리만 잘 부탁드려요.'

다행히 진주 자신 말고 다른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같았다. 진주는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소파에 앉아 검색을 했다. 진주 가격. 진주 한 알 가격. 가장 비슷해 보이는 진주에 관한 기사를 클릭해 보았다. 해외에서 발견된 천연 진주가 경매로 나왔는데 어떤 한국인이 낙찰했다고 했다. 한 알 가격이 억대라고 쓰여있었다.

진주는 그 한국인이 별장의 주인일 거라고 확신했고 다시금 나쁜 생각이 들었다.

'딱 세 알만. 세 알만 먹자. 그 정도면 주인도 모를 거야.'

일주일에 3일 출근이지만 3일 내내 그 짓을 했다가는 들킬 확률이 크니 한 달에 한 번씩 먹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때부터 진주는 한 달이 금방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천지에 비싼 것 투성이인 것치곤 별장 입구와 현관문 쪽을 제외하고는 CCTV가 없었던 곳이라 진주 먹기 계획은 의외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머니에 넣어 나오는 게 아니라 먹는 방법을 택했다. 벌써 두알을 먹었고 마지막 한 알이 남았다. 진주의 업무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주인은 여자를 통해서 인센티브까지 두둑하게 챙겨주었다. 진주는 양심에 찔렸지만 태연히 생각했다.돈 잘 버는 독신인데 뭘.엄마에게 버림받은 보상심리가 왜 별장 주인에게 작용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그런 마음이 있었다.


계획에 있던 마지막 세 알째를 먹는 날. 아무도 없는데도 서재는 슬금슬금 들어가졌다. 진주의 그런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했다면 아마 도둑질을 하러 들어가는 모습이라고 대번에 알았을 것이다. 마지막 진주를 입에 넣고 서재를 나서는데 서재 앞에 못 보던 사람이 서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했다. 아뿔싸. 드라마 작가! 별장 주인이었다.


"진주 씨죠? 세 달이나 됐는데 이제야 처음 뵙네요."


진주는 그제야 화들짝 놀라 진주를 삼키다가 진주가 목에 걸려버렸다. 콜록콜록 대다가 점점 호흡 곤란이 오는 듯했다. 주인은 침착하게 뒤에서 진주를 안고 가슴 쪽 압박을 반복했다. 몇 번을 반복했더니 한순간 진주알이 튀어나와 거실 바닥에 떨어졌다. 진주알처럼 진주 역시 바닥에 떨궈졌다. 진주알이 입에서 튀어나오자마자 주인은 분명히 진주를 팽개치듯 했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모를 줄 알았죠. 저 상당히 예민한 사람이에요. 사정이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인센티브까지 챙겨줬는데 또 그럴 줄이야. 모르는 척할 테니 지금까지 가져간 진주 제 자리 갖다 놓고 일은 오늘까지만 해요. 저한테는 불쌍한 척해도 안 통하니까 얼른 나가주세요. 거지근성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니까... 쯧."

주인은 서재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별장을 나와서 보육원으로 돌아갔다. 주머니에 있던 진주를 털어 주머니에 넣고 다시 별장으로 갔다. 식탁 위에 진주를 놓고 죄송하다는 말을 쓴 메모지를 옆에다 두고 나왔다. 그렇게 썼지만 화가 났다. 뭐가 그렇게 잘나서 사람을 무시하는지. 별장 앞에서 서재 창쪽을 째려보던 진주는 보육원으로 들어가기가 싫어서 시내로 나갔다. 정처 없이 걸어 다니다가 귀금속 상가 앞에 이르렀다. 진주는 상가 안으로 들어가 둘러보는 척했다. 마침 옆에서 상담을 하고 있던 남자가 진주목걸이를 고르고 있었다. 두 개 중에 고민하다가 둘 중 더 비싼 진주목걸이로 마음을 정하고 현금으로 계산했다. 진주는 눈치가 빨랐다. 가정이 있는 남잔데 아내가 아닌 여자에게 주려고 현금 계산을 하는 거였다. 모든 계산이 끝난 후 남자는 들뜬 표정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눈빛이 싹 바뀐 진주는 남자를 따라나섰다. 바람을 피우고 도망가버린 아빠에 대한 보상심리가 또 이상하게도 이 남자에게 작용됐다.


남자는 들키지 않을 위치에 있는 모텔이라도 찾는지 골목골목으로 계속 들어갔다. 진주는 들키지 않게 조용히 따라갔다. 남자가 갑자기 섰다. 이때다 싶어서 주변을 돌아보니 CCTV는 없었다. 진주는 바닥에 있는 돌덩이를 하나 집었다. 생긴 것이 꼭 버림받은 날 슈퍼마켓 난로 위에 있던 은박 포일에 쌓인 고구마 덩어리 같았다. 진주는 뒤에서 남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넌 좀 당해도 싸. 진주목걸이가 든 가방을 뺏어 들어 골목길을 나서는 진주의 귓가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진주는 이름값을 할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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