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그대로의 쪼글쪼글한 육체를 닮은 선굵은 소설...
"수작업으로 사흘 걸릴 굴착 작업을 삽차는 하루에 해치웠다. 땅을 파는 것이 아니라, 지면에서 흙을 뜯어내는 느낌이었다. 흙은 어차피 흙이겠지만, 카지노 게임에게는 곡괭이로 일궈서 삽으로 퍼낸 흙과 기계로 도려내고 뜯어낸 흙과는 분명히 달라 보였다. 근육을 사용해서 곡괭이로 파낸 흙은 언제나 숨을 쉬고 있었다. 갓 파내어 축축한 흙은 하얗게 건조되어 말라죽을 때까지 바람 소리, 풀잎 소리, 매미 소리에 공명했다. 흙의 숨소리는, 파는 사람의 숨소리였다."
책을 읽는 중간 즈음에 이 구절을 발견하고는 아,이 소설의 장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구나 싶었다. 나카가미 겐지의 카지노 게임』은 육체적인 소설이다. 그것도 매끄럽고 인공적인 육체가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거칠고 울퉁불퉁하고 쪼글쪼글한 육체를 닮은 소설이다.
작가는 카지노 게임라는 주인공의 몸,그리고 그 몸의 움직임을 통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시대 정신의 혼란스러움,주인공의 개인사와 그를 둘러싼 가족사의 굴곡,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또는 못하는 우직한 사유 등을 일체의 가감없이 보여준다.
실생활로부터의 유리를 통해 독자를 끌어당기는 요즘의 소설들과는 달리 생활이 곧 삶으로 일체화된 인물들의 일상사는 발가 벗겨져 있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을 쑥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주인공 카지노 게임의 가족사는 복잡하고 현재 진행형이어서 험난하다. 성경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누가 누구의 자손이고 또 누구는 누군가의 자손이라는 수직적인 계보가 아니라 옆으로 평행선을 그리며 뻗어나가는 계보를 가진 가족이다. 그 가계가 얼마나 복잡한지 친절하게 카지노 게임를 둘러싼 가계도가 책의 맨 앞장에 나와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이 앞장의 가계도를 참고로 하지 않으면 엉켜버린 등장인물들을 풀어 헤치기가 힘들다.
나 다케하라 카지노 게임는 어머니 후사와 아버지 하마무라 류조의 자식이다. 하지만 이건 순전한 피의 섞임으로 보았을 때이고,실제로는 양부인 다케하라 시게조와 후사 사이의 자식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카지노 게임의 엄마인 후사는 니시무라 가쓰이치로라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이쿠오, 후미코, 미에, 기미코라는 자식들이 있다.그리고 다케하라 시게조는 후사와 합치기 전에 전부인과 낳은 후미히토라는 자식이 있었다. 그리고 류조는 후사와의 사이에 낳은 카지노 게임말고도 요시에와의 사이에 낳은 도미코, 도모카즈, 히데오와 기노에라는 첩의 딸인 사토코라는 네 명의 자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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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이들로부터 또다시 뻗어나간 많은 인물들이 있다.그리고 이 인물들이 가레키나다 해안(이것의 일본식 표기, 아마도 그 표기를 우리식 독음으로 바꾼 것이 카지노 게임이다)의 조그마한 지방에서 동시에 살아가고 있다. 친부와 양부, 이복동생, 이복형, 이복누나들이 이리저리 엉켜서 소도시의 구성원으로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카지노 게임는 이복형인 이쿠오의 죽음,친부의 딸인 사토코와의 동침이라는 어두운 가족사를 업보처럼 젊은 가슴에 얹고 지낸다. 거기에 자신의 친부인 하마무라 류조에 대한 애증은 식을 줄을 모른다. 결국 소설의 말미에 카지노 게임는 배다른 동생인 자신을 죽이려했던 그러나 실제로는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은 이쿠오의 감정을 되풀이하기라도 하는 듯, 자신의 이복동생인 히데오를 죽이고 경찰에 자수한다.
그 사이사이 작은 마을을 들쑤시고 다니는 무성한 소문과 그 소문들 틈에서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리는 진실들이 이야기를 엮어내고 있다. 시간적으로는 얼마 되지 않는 구성이지만 현재의 시간을 존재케하는 과거의 시간들이 중첩에 중첩을 거듭하며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영역을 넓히는 듯하다. 하지만 한 인물이 다음인물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타잔이 줄을 옮겨가며 밀림을 누비듯 훌쩍훌쩍 잘도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요즘의 소설들이 자잘하게 챕터를 나누고,그 안에서 짧게 단명하는 호흡으로 진행되는 것과 달리 『카지노 게임』은 이야기 자체에서 동력을 얻어 불필요한 챕터의 구분없이도 일사천리로 독자를 포획하고 있다. 일본문학에 대한 거부감이 심대하거나 세련되고 매끄러운 문장의 세뇌가 뿌리깊은 사람이 아니라면 읽어볼만하다.호들갑스럽고 과장되어 있는 듯한 선전문구가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다, 라는 생각 든다.
나카가미 겐지 / 허호 역 / 카지노 게임 / 문학동네 / 366쪽 / 2001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