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게임의 자아에 꽂히는 칼, 그리고 붉은 피를 닮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카지노 게임니스트라는 영화의 원작이 되는 소설이다. 한달전 쯤에는 영화를 보았던 것 같다. 여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는 것이 중평이지만, 실은 그 여배우가 맡은 배역인 소설 속 주인공의 난해한 성격이 점수를 후하게 준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나싶다.
소설은 두 개의 치명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에리카 코후트와 그녀의 어머니라는 모녀의 관계. 다른 하나는 에리카 코후트와 발터 클레머라는 선생과 제쟈, 카지노 게임와 남자라는 관계.
그리고 이처럼 주요한 두 관계는 모두 비정상적이다. 이러한 비정상의 이유는 사회적인 허용이나 거부가 아니라 개인들의 허용이나 거부에 의해서 그렇게 만들어진다.
살아오는 내내 어머니의 소유물이었던 한 카지노 게임가 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랑의 방식, 한 남자의 소유물로 위치를 바꾸고자 했던 사랑의 이야기인 소설은 그래서 가혹하다.
“...에리카는 사실 어머니 몸 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가 따뜻한 양수 속에서 부드럽게 흔들리고 싶다. 몸 안에 있으면 주변이 모두 따뜻하고 축축할 텐데...”
어려운 시련이 있을 때마다 에리카는 스스로를 어머니의 부속물로 여기면서, 그 원초적인 기억에 근거하여 극복하고자 한다. 물론 그것이 쉽지 않다.
“점점 더 심각하게 카지노 게임는 다른 사람이 전혀 알지 못하는 내적 삶의, 멀리 날아올라가는 풍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그 핵심 내부에서 카지노 게임는 초지상적인 존재처럼 아름답지만 이 핵심은 카지노 게임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환상일 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이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카지노 게임는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원하는 얼굴을 자신의 얼굴에 얹어놓는다....”
이러한 불안은 한 남자를 만남으로써(과거에 남자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거의 그것과 현재의 그것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선생과 제자라는 관계와 더불어 예술가와 청중, 천재적 예술가와 평범한 예술가라는 또다른 관계가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대화된다.
끊임없는 감시 속에서도 에리카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클레머를 향한다. 어머니의 감시와 통제도 소용이 없는 지경에 이른다.
“...어머니는 카지노 게임가 밤중에 아래를 만지지 않고 이불 위로 손을 내놓고 자는지는 감시할 수 있겠지만, 불안감까지 감시하려면, 딸의 머리통을 갈라 손수 이 불안감을 파내야 할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순탄치 않다. 어머니의 통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되는 순간 카지노 게임는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또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그에게 속한다. 이제 어머니의 자리를 그는 대신하려 한다. 카지노 게임는 자신의 어미에게 속은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또다른 어미인 그에게도 속는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육체로 비춰지는 바로 그 순간 그들의 모든 인간관계가 끊어졌다. 메시지, 편지, 표시를 상대편에 보낼 수 있는 전령들도 없다. 더 이상 한 육체가 다른 육체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한 육체가 다른 육체에게 수단이 된다. 즉 육체는 그 안으로 고통스럽게 스며들기를 원하는 타자의 속성을 띠고,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조직은 더욱 심하게 썩고 깃털처럼 가벼워져, 서로 낯설고 적대적인 두 개의 대륙은 멀리 날아가 버린다. 이 두 대륙은 크게 충돌하여 함께 추락하고, 아주 작은 접촉에도 먼지가 되어버리는 아마포 걸레를 걸친 덜컹거리는 골격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내내 별다른 감응을 갖지 못했던 나는 마지막 순간 에리카가 자신의 몸에 칼을 꽂는 장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언제나처럼 좀체 표정의 변화 없이, 자신의 감정이나 표정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를 통해 표현되는, 카지노 게임의 자아에 꽂히는 칼과 옷을 통해 스며나는 붉은 피...
선명한 것은 항상 육체적이다. 육체일 뿐은 아니지만...
엘프리데 옐리네크 / 이병애 역 / 피아노 치는 카지노 게임 / 문학동네 / 2002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