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유럽 열강들의 대립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에서는 대규모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장기간의 평화가 조성됐다. 이 기간 동안 유럽 열강들의 경제 산업은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면서 열강들은 자국의 상품을 용이하게 판매할 커다란 시장을 필요로 했다. 유럽 시장으로는 부족했다.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져 이미 '레드오션'이 됐기 때문이다. 눈을 바깥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식민지 쟁탈전이 가시화됐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진 모습을 보인 것은 영국이었다. 이들은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프랑스도 이에 질세라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늘려나갔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가 우세를 보이는 국제 정세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는 위협적인 국가가 등장했다. 독일이다. 1871년 보불 전쟁에서 승리하고 통일을 달성한 독일은 신흥 강국으로 급부상했다. 앞으로 독일은 계속 치고 올라가려 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집요한 견제에 나서면서, 대립이 격화될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라는 인물로 인해 절묘한 세력 균형과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 탁월한 군사 전략가이자 외교 천재였던 그는, 국제 정세를 면밀히 파악한 뒤 향후 독일이 지향해야 할 외교 전략은 팽창이 아닌 주변국들과의 친선 및 현상 유지라고 말했다. 앞선 나폴레옹 등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지나친 팽창은 되레 독일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전략을 기반으로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3제 동맹'을 추진했다. 영국, 프랑스와 동등한 세력을 구축함은 물론 양면 전선의 위험성을 경감하는 효과도 노렸다. 특히 독일 최대의 적국인 프랑스의 외교적 고립을 획책해 함부로 발호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의도도 강했다. 당시 독일 황제였던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노선을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지지했다. 여러 호재들이 부합되면서 비스마르크의 의도대로 국제 정세가 돌아갔다. 우려됐던 유럽의 전운도 사그라드는 모양새를 나타냈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이 오래가진 못했다. 빌헬름 2세가 즉위하면서 독일과 유럽의 정세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비교적 호전적인 성품을 갖고 있던 그는, 독일 게르만 민족이 다른 민족들보다 우수하며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통해 초강대국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비스마르크의 노선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된 갈등으로 비스마르크가 실각했고 빌헬름 2세가 독일을 전적으로 주도하게 됐다. 우선적으로 외교 체제 개편에 나섰다. 3제 동맹을 대표하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러시아는 독일의 맞수인 프랑스와 손을 잡았다. 비스마르크가 그토록 회피하려 했던 양면 전선의 위험성이 증폭됐다. 표면적으로는 빌헬름 2세의 결정이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당시 정황상 예고된 수순일 수도 있었다. 기실 러시아 내부에서는 급부상하는 독일을 가장 큰 위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독일이 당장은 유화적으로 나올지 모르나 언젠가는 뒤통수를 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민족성 등 여러 측면에서 이질적인 부분이 많다고 느끼는 것도 다분했다. 독일 내부에서도 러시아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동안은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1세의 강력한 의지로 우호적 관계가 애써 유지됐지만, 이것이 오래 지속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던 셈이다. 더욱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예로부터 동유럽과 발칸 반도의 패권을 놓고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이러한 근본적 문제가 일시적 동맹으로 해결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독일은 러시아의 빈자리에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3국 동맹'을 결성했다. 나아가 빌헬름 2세는 군사력의 핵심인 해군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했다. 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해외 식민지를 용이하게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런던 주재 독일대사인 메테르니히가 "해군력을 계속 증강할 경우 1915년 안에 영국과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빌헬름 2세는 메테르니히를 해임한 뒤 해군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당연히 영국의 심기는 매우 불편해졌다. 독일의 조치를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더 이상 좌시하지 않고 견제에 들어가기로 한 결과, 1904년 전통적 숙적인 프랑스와 '영불 협상'을 체결했다. HMS 드레드노트 등 주력함 건조에도 열을 올렸다. 아울러 '러일 전쟁'으로 인해 사이가 안 좋았던 러시아와도 손을 잡았다.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과거의 앙금은 내려놓기로 했다. (팽창 정책을 지양하고 세력 균형을 중시했던 영국 자유당이 1906년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대독 강경책은 더욱 강화됐다.) 이로써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3국 동맹'에 대항하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3국 협상'이 결성됐다. 별안간 유럽 열강들이 양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개선의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악화 일로를 걸었다. 프랑스가 아프리카 북부에 있는 모로코를 식민지화하려 할 때, 독일이 개입해 방해 공작을 펼쳤다. 또한 독일은 베를린, 튀르키예의 비잔티움,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철도 노선 건설을 추진했다. 자신들의 영향력을 동유럽에서 중동까지 확대하려는 의도였다. 인근 지역에서 패권을 행사하고 있던 영국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에 3국 협상을 더욱 강화하며 독일을 압박하는 전략을 취했다. 비스마르크 시대에 사그라드는 것처럼 보였던 유럽의 전운이 조금씩형성되는 모습이었다. 일각에서 제기됐던 국가 간 상호의존성에 기반한 전쟁 불가능론도 힘을 잃어갔다. 자본의 세계적 이동과 국제협의회들의 설치 등은 세계대전을 원천봉쇄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결과적으로 완벽한 허상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악몽의 시간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화약고, 발칸 반도
열강들 간의 대립과 연계해 유럽에서 화약고 역할을 한 곳은 발칸 반도였다. 원래 이 지역은 오스만 제국이 15세기부터 지배했던 곳이다. 그런데 바로 위에 있던 러시아가 남하 정책을 추진하며 발칸 반도를 호시탐탐 노리기 시작온라인 카지노 게임. 이에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에 여러 차례 전쟁이 발발했다. 결정적으로 1878년 제12차 '러시아-튀르크(오스만 제국)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대패함으로써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약화됐다. 이제 러시아가 발칸의 새로운 패권국으로 떠오를 것처럼 보였다. 이때 영국과 프랑스 등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들은 러시아 혼자서 발칸을 독점하게 놔둘 수 없었다. 그 결과 도출된 것이 '베를린 조약'이다. 러시아는 발칸의 일부 지역을 얻었다. 나머지 지역은 세르비아 공국, 루마니아 왕국, 불가리아 공국 등으로 쪼개졌다.훗날 비극적인 암살 사건이 발생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형식상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남았다. 신생 국가들 중 슬라브민족이 주류인 세르비아가 주목을 받았는데, 이곳에선 '민족주의' 열기가 크게 달아올랐다. 세르비아는 보스니아와 헝가리 등에 자국민들이 폭넓게 분포돼 있는 만큼, 자신들이 이 지역을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슬라브계 국가인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있었다. 하지만1908년 청년튀르크당 혁명으로 오스만 제국이 혼란한 틈을 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를 합병온라인 카지노 게임. 게르만 민족이 주류인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세르비아는 불쾌감을 감추지 못온라인 카지노 게임. 보스니아에 살고 있던 수많은세르비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하는 가브릴로 프린치프도 있었다.
이후 세르비아는 1912~1913년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발칸 전쟁'을 통해 오스만 제국 및 불가리아를 굴복시켰고 마케도니아를 점령했다. (세르비아가 포함된 발칸동맹 국가들은 1차 발칸 전쟁에서 다시금 발칸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오스만 제국을 패퇴시켰다. 2차 발칸 전쟁에서는 발칸의 프로이센이라 불렸던 불가리아를 무릎 꿇렸다.) 다만 바다를 확보할 목적으로 알바니아까지 점령하려 할 때, 또다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개입해 이를 저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향한 세르비아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사사건건 발목이 잡히면서 감정의 골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이 시기에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 민족운동 단체인 '젊은 보스니아'의 반 오스트리아적 활동도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차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로 유력한 페르디난트가 획기적인 계획을 들고 나왔다. 기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다민족 국가였는데, 페르디난트는 제국 내의 복잡한 민족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대오스트리아 합중국론'을 제창했다. 일종의 연방제 형태로서, 제국 내 여러 민족들에게 광범위한 주권을 부여해 주류 민족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사실상 주류 민족들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인 만큼, 독일계와 헝가리계의 반발을 불렀다. 소수 민족들인 슬라브계, 루마니아계 등은 대체로 공감과 지지를 보냈다. 페르디난트가 합중국론을 내세운 이유는 제국을 안정적으로 존속시키기 위해서였다. 제국 내에 소수 민족들이 절반 가까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들을 끌어안고 가는 게 중요했다. 특히 호전적인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세르비아인들을 효과적으로 온건화시킬 수도 있었다. 조만간 고령인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뒤를 이어 페르디난트가 황제로 즉위해 해당 정책을 신속히 밀어붙일 것처럼 보였다. 극단적인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이 상황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합중국론이 세르비아인들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동화시키려는 술책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현혹되지 말고 세르비아가 보스니아 등을 무력으로 점령해야 한다고 외쳤다. 나아가 기만책의 대가인 페르디난트를 제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전쟁의 불길
위와 같은 움직임은 제1차 세계대전의 결정적 원인이 되는 비극적 사건을 초래하고 말았다. 1914년 6월 28일, 페르디난트가 부인과 함께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암살자 프린치프에게 살해됐다. 사후 조사에서 프린치프를 비롯해 암살에 관여한 자들이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와 연관돼 있음이 밝혀졌다. 다만 세르비아 정부가 이 사건에 얼마나 연루돼 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공격적인 외교전을 펼치며 눈엣가시였던 세르비아에 대해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외무장관인 베르히톨트는 베를린으로 가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간의 분쟁이 불가피하며, 범슬라브주의 정책의 중심축(세르비아)을 제거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어느 정도 설득된 빌헬름 2세는 해당 주장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에 힘입어 베르히톨트는 7월 7일에 열린 제국내각 회의에서 즉각적인 군사 행동을 주창했다. 헝가리의 수상인 티서가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군사 행동 이전에 요구 조건을 담은 문서를 먼저 제시하자고 했다.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는 여기에 동의했다. 요구 조건은 강경했다. 우선 세르비아 정부에게 제국 영토의 일부 분리를 주장하는 모든 선전을 비난하라고 요구했다. 이 비난을 세르비아 군대에 일일 훈령으로 주입시키라고도 했다. 또한 암살에 연루된 세르비아 공무원들을 체포 심문 처벌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무원들이 세르비아 영토에서 관련 절차에 참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요구 조건에 대한 답변 시한은 전달 후 48시간으로 못 박았다. 당초 세르비아 정부는 요구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했다. 영국과 프랑스 등도 가급적 수용하라고 조언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라예보 사건의후폭풍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선에서 해결될 수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르비아가 돌연 입장을 바꾸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이의 배경에는 러시아가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아니꼽게 봤던) 러시아 차르 정부가 세르비아를 전적으로 지지하며, 예방적 차원의 '전쟁준비 태세'를 선언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이에 세르비아 정부는 오스트리아 공무원이 자국의 영토에 들어와 조사하는 것 등을 단호히 거부했다. 나아가 군대까지 동원하는 모습을 보였다.
러시아가 젊은 예비군을 소집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사실이 전해지자, 독일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독일 대사는 "러시아의 군사 조치들이 중단되지 않는다면 독일도 동원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전쟁'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세계 각지에서 우려가 터져 나왔다. 영국 외교관인 조지 뷰케넌 등은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겨냥해 동원을 선포할 경우 발생할 '부정적 연쇄효과'를 걱정했다. 실제로 부대 배치까지 이뤄지면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다행히 러시아가 완화된 태도를 보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세르비아에 대한 요구 조건을 경감하자는 취지의 협상을 제안했다. 세르비아에 있는 열강의 대사들에겐, 세르비아의 강경한 태도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압력을 행사하자고 했다. 독일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직접 협상에 우호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강경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 기회에 건방진 세르비아의 버릇을 고쳐놓기 위해 7월 28일 전쟁을 선포했다. 러시아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세르비아를 보호하기 위한 군사 조치를 내려야 했는데, 문제는 얼마만큼의 강도로 조치를 내릴 것인지였다. 니콜라이 2세는 부분동원과 총동원 사이에서 고민했다. 의외로 강경한 조치가 내려졌다. 일부 장군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부분동원은 물론 총동원도 승인한 것이다. 독일과 인접한 지대에서의 동원까지도 포함하는 후자는 곧 독일과의 전면전을 각오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니콜라이 2세는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독일의 반응을 예의주시하며 초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러시아의 의도는 어디까지나 세르비아 보호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억제에 국한됐다. 독일과의 전쟁은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조만간 빌헬름 2세가 차르에게 전보를 보냈다. 러시아가 다른 국가들의 분쟁에 개입하지 말아야 끔찍한 전쟁을 피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독일의 중재자 역할을 암시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니콜라이 2세와 정부 각료들은 독일의 경고성 전보를 무시할 수 없었다. 총동원을 취소하고 부분동원만 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것으로는 독일을 안심시킬 수 없었다. 독일 군부는 부분동원도 위협적이라고 판단했다. 전쟁장관인 폰 팔켄하인은 물론 참모총장인 몰트케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더욱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칫 독일의 동부전선이 큰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결국 몰트케는 러시아의 동원에 맞서서 독일도 강력한 동원령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빌헬름 2세는 사라예보 사건으로 전쟁까지 가는 것을 원치 않았었지만, 마음이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었다. 독일의 강경한 분위기를 직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총동원령까지 선포하며 확전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러시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움직임에 심대한 위협을 느꼈다. 특히 외무장관인 사조노프와 군부 지휘관들이 그랬다. 기저에는 발칸 지역과 러시아의 흑해 출구인 보스포루스 해협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존재했다. 상호 간 느끼는 위기감의 증폭이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사조노프는 차르를 만나 위기의식을 고스란히 전달했고, 세계대전의 가능성을 크게 높이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러시아의 총동원령이었다. 독일은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전쟁위험상태'를 선언한 뒤 러시아와 프랑스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에 따르면 러시아는 12시간 이내에 군사 조치를 중단할 것을 확실히 보장해야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독일의 총동원령이 뒤따를 것이었다. 프랑스는 18시간 이내에 독일과 러시아의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해야 했다. 전쟁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갔다. 이번에는 프랑스가 움직였다. 이들은 1892년 러시아와 맺은 협정에 따라 러시아가 독일에 공격받으면 자연스럽게 참전하게 돼 있었다. 프랑스 수뇌부에게는 독일에게 유럽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침략당할 수 있다는 공포감이 상존했다. 평소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프랑스군 원수 조프르도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얼마 뒤에 그는 대통령을 만나 총동원령을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8월 2일 프랑스의 총동원령이 선포됐다. 1시간 뒤에 독일도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조지 뷰케넌이 우려했던 부정적 연쇄효과가 현실화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국도 움직일 태세였다. 그동안 영국은 물리적 충돌보다는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을 선호했다. 이제는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프랑스가 위기의식을 공유하며 양국 간 협정에 기반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것을 요구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도 영국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독일이 벨기에를 겨냥해 최후통첩을 보낸 게 결정적이었다. 이에 따르면 독일은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 벨기에 영토를 사용해야 하며, 만약 벨기에가 길을 내주지 않을 경우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했다. 앞서 1839년에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 바 있었다. 이에 근거해 영국 내각은 8월 4일 벨기에를 겨냥한 독일의 군사작전 계획을 중단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독일은 영국의 통첩을 무시했다. 결국 영국도 이날 자정을 기해 프랑스, 러시아와 함께 전쟁에 돌입하게 됐다. (영국과 프랑스는 1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도 선전포고했다. 3국 동맹의 한 축이었던 이탈리아는 일단 중립을 선언했다.) 사라예보라는 작은 도시에서 발생한 암살 사건의 후폭풍에 모든 유럽 열강들이 휘말려 들면서, 인류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 고개를 쳐들고야 말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