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서부 전선 공방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유럽 각국은 매우 들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전쟁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듯 기뻐했다. 청년들은 국가를 부르며 자발적으로 입대했고 부모는 웃으면서 자식을 전쟁터로 보냈다. 프랑스에서의 한 장면이 이를 잘 보여준다. 프랑스의 어느 기차역에 수많은 군인들이 모여 '라마르세예즈'를 열창했다. 조만간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으로 가야 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즐거운 얼굴로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이를 지켜보는 군중은 손수건과 모자를 흔들며 화답했다. 그 어떤 곳에서도 전쟁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 당시는 유럽 전역에 애국심과 민족주의의 열기가 달아오르던 때였다. 또한 장기간의 평화가 유지돼 전쟁의 참상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전쟁이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라는 낙관주의와 아름다운 전쟁 서사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이상한 낭만주의도 팽배했다. 한 연합군 병사는 "강력한 우리의 군대가 적군을 금세 물리치고, 나는 그곳에서 영웅처럼 싸워서 승리하고, 명예롭게 훈장과 포상을 받고 제대할 것이다"라고 외쳤다. 한마디로 이때의 유럽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단연 독일군이다. 이들은 서부 및 동부 전선 등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초기에 독일군이 내세운 전략은 '슐리펜 계획'이다. 독일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슐리펜 장군이 양면 전쟁을 대비해 고안해 냈다. 즉 러시아의 경우 국토가 넓고 병력 수송이 재빠르지 않을 것이니, 먼저 벨기에 북부를 거쳐 프랑스 파리를 신속하게 점령한 뒤 모든 병력을 동부 전선으로 보내 러시아를 격파한다는 전략이었다. (앞선 보불 전쟁에서 파리를 점령했던 경험이 독일군에게 커다란 자신감을 갖게 했다.) 독일군은 6주(40일) 안에 결판을 내겠다는 계획 하에 프랑스로 향하는 관문인 벨기에 북부를 침공했다. 앞서 보낸 최후통첩은 벨기에가 거부했지만, 독일군은 무난하게 벨기에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오판이었다. 벨기에는 국왕인 알베르트 1세를 중심으로 항전 태세를 갖췄다. 그는 독일군의 진격을 용이하게 할 교량, 철교, 터널 등을 폭파하고, 방어지점을 철저히 사수하라고 명했다. 벨기에의 군사 요새들은 상당히 탄탄했다. 철근 콘크리트와 장갑판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구경이 최대 6인치에 달하는 포가 400개나 배치돼 있었다.
초전부터 난관이 예상됐지만, 독일군의 에미히 특별기동대는 8월 4일 벨기에 국경을 넘어 리에주를 향해 진격했다. 210밀리 곡사포 중대 2개가 함께 했다. 독일군은 리에주 근처에 도달해 벨기에군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이것이 거부되자 리에주 동쪽 요새들에 포격을 가했다. 뒤이어 보병과 기병이 전진하려 했으나 다리가 파괴돼 여의치 않았다. 특별기동대에 소속된 제43여단 등이 배다리를 통한 뫼즈강 도하 및 방어선 돌파를 시도했다. 요새와 참호에 있던 벨기에군이 격렬하게 응사하며 저항했다. 방어선을 뚫으려던 독일군 병사들이 속절없이 쓰러져 나가면서 사상자가 급속히 증가했다. 예기치 못한 어려운 상황 가운데, 독일군 명장인 루덴도르프가 돌파구를 찾아냈다. 그는 6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크드부아의 마을 등을 거쳐 리에주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고지에 도달했다. 벨기에 방어선 안으로 매우 과감하고 은밀하게 침투해 들어간 것이다. 벨기에군을 이끌고 있던 르망은 당황했고 롱생 요새로 피신했다. 또한 보병 제3사단 등을 브뤼셀 외곽의 헤터 강가에 있는 야전군으로 돌려보냈다. 루덴도르프는 제14여단을 리에주 중심부로 진격시켰다. 병력이 충분치 않아 벨기에군의 거센 반격이 이뤄지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독일군에겐 다행스럽게도 벨기에군의 특별한 저항이 없었다. 옛 성채에 있던 수비대가 항복하면서 루덴도르프의 독일군은 리에주를 점령했다. 방어선 바깥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던 에미히 특별기동대도 결정적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시간이 왔다. 괴물 곡사포가 가세함으로써 이전 대비 강력한 공세를 펼칠 수 있게 됐다. 2000파운드에 달하는 포탄이 무차별적으로 요새를 강타했다. 이의 영향으로 요새의 철근 콘크리트와 장갑판이 허물어졌으며, 화염 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벨기에의 주요 요새들은 차례로 무너졌다. 퐁티스, 앙부르, 쇼드퐁텐, 리에르, 플레롱, 봉셀에 이어 르망이 피신했던 롱생 요새도 파괴됐다. 르망은 큰 부상을 입고 적군에게 사로잡혔다. 독일군은 여세를 몰아 8월 24일 나뮈르까지 산산조각 내버렸다. 이로써 프랑스로 진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벨기에군은 최후의 거점인 안트베르펜 요새로 밀려났다. 한편, 독일군이 벨기에 침공 과정에서 자행한 무자비한 학살을 간과할 수 없다. 디낭, 타민, 안덴, 뢰번, 세예 등 수많은 벨기에 마을들에서 1500명이 넘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남자는 물론 여자와 어린아이, 노인도 다수 포함됐다. 독일군은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 총으로 쏴 죽였다. 때로는 대검으로 사지를 찢어 죽이기도 했다. 도서관 등 주요 건물 파괴도 극심했다. 독일군 지휘부는 자국 군대의 행동이 잔인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앞길을 막는 것들은 누구든 희생될 수밖에 없다고 합리화했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군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바유의 제1군과 카스텔노의 제2군이 독일과 맞닿은 국경을 넘어 사르부르로 진격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역량을 과소평가했고 방어적 태도를 취할 것이라 예측했다. 실제로 독일군은 초전에 별다른 반격을 가하지 않고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프랑스군은 독일의 영토인 샤토살랭, 디외즈, 사르부르를 잇따라 점령했다. 과거 자신들의 영토를 탈환한 셈이었다. 그런데 독일군은 나름의 전략적 판단 하에 움직이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을 깊숙이 들어오게 한 다음 반격을 전개할 속셈이었다. 행운도 따라줬다. 프랑스군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저절로 유리한 상황이 조성됐다. 프랑스군 제1군과 제2군 사이에 연락이 유지되지 않아 협조가 이뤄지지 못했다. 독일군은 부대 간에 유기적 협조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군 제1군이 야간 공격을 했을 때, 독일군은 기다렸다는 듯 적절히 대응해 패퇴시켰다. 뒤이어 독일군 8개 군단이 전면적인 반격을 감행했다. 독일군의 강력한 중포가 불을 뿜었고, 포병의 지원에 힘입은 보병이 맹렬하게 돌진해 프랑스군을 잇따라 격퇴했다. 제1군과 더불어 제2군도 심각한 타격을 받고 뫼르트 강 너머로 퇴각했다. 프랑스군은 뫼르트 강에서 참호를 파고 독일군의 추격 공세에 대비했다. 프랑스군 제1군과 제2군의 위쪽에 있었던 제3군과 제4군의 상황도 심각했다. 이들은 아르덴 숲 지대를 통과해 벨기에 남부의 아를롱과 뇌프샤토로 진격했다. 막강한 정보력을 갖춘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북쪽의 프랑스군 제3군 선발대가 진격하다가 예기치 못하게 독일군의 포격을 받았다. 공포에 빠진 선발대는 곧바로 퇴각했고 제3군의 나머지 병력은 타격을 받은 뒤 멈춰 섰다. 제3군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던 남쪽의 제4군도 지원의 부재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그나마 중앙에 있던 식민지군이 진격해 들어갔는데, 이는 무모한 시도였다. 독일군은 밀려오는 식민지군에게 기관총 및 소총 사격을 퍼부었다. 8월 22일 하루에만 1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며 사실상 식민지군은 전멸했다. 결국 난관에 직면한 프랑스군 제3군과 제4군은 뫼즈 강을 따라 퇴각했다.
다시 벨기에 북부 전선을 살펴보겠다. 독일군이 리에주 등을 함락시키며 프랑스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지만, 당초 프랑스군 지휘부는 이곳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제의식을 갖고 조치를 취했다. 랑르자크가 지휘하는 프랑스군 제5군은 뫼즈 강과 상브르 강 사이로 이동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상브르 강 남안의 고지대에 주둔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독일군의 도하를 저지하고 반격까지 단행해 벨기에 깊숙이 진격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문제에 봉착했다. 지켜야 할 교량이 너무 많았다. 독일군은 정찰을 통해 이러한 약점을 간파했다. 독일군 제2근위사단이 프랑스군이 미처 주목하지 못한 교량을 건너 거점을 마련했다. 독일군 제19사단도 또 다른 교량을 발견한 뒤 곧바로 건너갔다. 이로써 독일군은 상브르 강의 만곡부 2곳을 장악했다. 이 소식을 접한 프랑스군은 당황한 나머지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만곡부 탈환 임무를 부여받은 제3군단과 제10군단이 아침에 사탕무 밭을 가로질러 돌진했다. 엄폐하고 있던 독일군의 기관총과 소총 사격이 뒤따랐다. 여기에 고스란히 노출된 프랑스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밤에도 프랑스군은 참담한 패배를 맛보았다. 더 많은 병력으로 전투를 치렀음에도 더 적은 독일군에게 패했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군 제5군은 뫼즈 강의 제4군, 몽스의 영국군과 연락이 두절됐다. 독일군은 여세를 몰아 대부분의 병력을 도하시켰다. 랑르자크는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음을 깨닫고 상브르 강에서 전면 철수를 단행했다. 그나마 몽스의 영국군이 선방을 하며 독일군을 괴롭혔다. 이들은 몽스-콩데 운하를 사수하기 위해 참호를 팠다. 독일군이 공격해 올 때, 영국군은 조준이 잘 되고 사거리가 긴 리엔필드 소총으로 정밀 사격을 가했다. 진격하던 독일군 병사들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총탄에 맞고 쓰러졌다. 소총을 쏘는 영국군 병사들 뒤에서 포병들이 지원 포격까지 하면서 방어력은 극대화됐다. 독일군은 50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지휘관인 폰 클루크는 독일군의 진격을 재촉했다. 마지못해 진격할 때마다 영국군의 효과적인 방어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영국군은 상당한 전과를 올리면서 크게 고무됐다. 그런데 별안간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벨기에로 함께 나아가려 했던 프랑스군 제5군이 퇴각했기 때문이다. 손발을 맞춰야 할 동맹국이 무너진 만큼, 혼자서 무언가를 계속 도모하기는 어려웠다.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14일 동안 대퇴각을 단행했다. (총사령부가 파리 센 강의 샤틸롱쉬르센으로 옮겨졌다.) 이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단행할 수 있는 위치까지 퇴각하려 했다. 독일군은 적군의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뚫었으며, 최종 승리까지 거둘 수 있다는 판단 하에 힘차게 전진하려 했다. 목표는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였다. 이에 연합군은 퇴각하면서도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기즈, 랑드레시, 마루아유, 르카토 등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프랑스군은 기즈 전투에서 과감한 작전으로 독일군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맹장인 프랑셰 데스페레의 지휘 하에 프랑스군 제10군단과 제3군단이 위치 사수를 넘어 반격에 유리한 거점까지 확보했다. 이의 영향으로 프랑스군 전체의 사기가 올랐다. 부분적으로 연합군의 선방이 이뤄지긴 했으나, 여전히 주도권은 독일군에게 있었다. 이들은 저항을 뚫고 파리를 겨냥한 공세의 고삐를 당기려 했다. 다만 독일군 지휘부는 어느 방향으로 진격할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쉽사리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맹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파리 오른쪽으로 남서진하면 독일군의 외곽이 파리 요새지대에 있는 수비대에게 공격받을 수 있었다. 파리 왼쪽으로 남동진하면 독일군 본대와 외곽 부대 사이에 상당한 간격이 발생할 수 있었다. 행선지 선택에서부터 독일군의 발목이 잡히는 모양새였다. 아울러 독일군은 병력을 분산시키는 전술적 실수도 저질렀다. 적잖은 병력을 러시아군과의 전투에 대비해 동부 전선으로 돌려버렸다.파리를 표적으로 하는 제1군과 제2군도 산개시켰다. 제1군은 파리를 포위하기 위해서쪽 방면으로 진격하고 제2군은 도시를 직접 겨냥하게 했다. 독일군은 규모의 우세를 점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제1군을 지휘하는 클루크가 군대를 파리 남동쪽으로 진격시키기로했다.그는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 제5군의 좌측면을 타격해 격파함으로써, 파리와 분리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상관인 몰트케의 방침(서쪽 방면 진격)을 거스르는 것이었지만, 그대로 수용됐다. 어느 정도 방향성이 정해지자 독일군은 파리를 향한진격을 거듭했다. 여러 지류로 갈라진 수계를 힘겹게 통과했고 연합군과 산발적인 총격 및 포격을 주고받았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독일군은행군을 지속했으며, 중간에 지쳐서 낙오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런데 독일군 제1군이 노렸던 프랑스군 제5군은 동쪽으로 빠져나와 측면 타격 위험성을 없앴다.클루크는 파리 포위 기동을 하지 않고프랑스군을 추격해 섬멸하려 했다. 이는 패착이었다. 독일군 제1군이 적군을 추격하는동안 제2군과의 간격이 크게 벌어졌다. 원래 제1군과 제2군이 긴밀하게 연결돼야 원활한 공세가가능했는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더욱이조프르의 주도 하에 대규모 프랑스 기동군이 신속히 조직되고 있었다. 발달된 철도망을 통해 여러 지역에 있던 병력이 빠르게 모였다. 영국군까지 가세해 총 36개 사단으로 불어났다. 이 군대는 독일군 제1군의 측면, 적군 간 벌어진 틈 등을 겨냥할 것이었다. 기동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갈리에니는 파리 안팎에 참호를 파고 무기들을 대거 배치하기도 했다. 만약을 대비해 수도를 요새화시키는 작업이었다.
프랑스 기동군 일부가 9월 6일 독일군 제1군의 측면에 대한 기습 포위를 시도했다. 자칫 위험해질 수 있었던 위기 상황에서 독일군 포병 장교인 폰 그로나우의 군대가 맹활약을 펼쳤다. 이 덕분에 독일군 제1군은 기사회생했지만 우르크 강으로 퇴각했다. 어느덧 독일군이 서부 전선에서 승리를 거머쥐어야 한다고 판단한시한인40일이 다 돼가고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이때 프랑스 파리를 점령한 뒤 러시아를 상대하기 위해 병력을 동부 전선으로 돌려야 했다. 하지만 연합군에게 반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등 전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설상가상으로 기동군에 배속된 영국군이 독일군 제1군과 제2군 사이에 벌어진 틈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이의 여파로 폰 뷜로우가 이끄는 독일군 제2군은 안전을 위해 후퇴했다. 특히 적군의 압박으로 군대의 우익을 마른 강까지 후퇴시키면서 제1군과의 간격이 40마일로 벌어졌다. 연합군이 마른 강으로 치고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다만 독일군의 기세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었다. 폰 하우젠이 이끄는 독일군 제3군과 폰 뷜로우의 제2군 좌익이 생공 습지에서 포슈의 프랑스군 제9군을 맞아 전과를 올렸다. 습지를 사이에 두고 이틀간 치열한 포격전을 펼친 뒤,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해 적군을 일시적으로 격퇴했다. 여전히 파리를 넘볼 수 있는 여력도 존재했다. 클루크의 독일군 제1군은 우르크에서 프랑스군 제6군을 압도했다. 결정적으로 제1군에 소속된 폰 크바스트의 제9군단이 프랑스군 제61예비군사단을 패퇴시킨 뒤, 파리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젖혔다. 파리까지는 30마일 정도였고, 진격로 상에서 강력한 저항은 없을 것으로 예상됐다. 독일군은 마침내 목표한 바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갑작스러운 반전이 일어났다. 클루크가 리하르트 헨치 중령의 조언을 받아들여 퇴각 명령을 내린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상술했듯 연합군이 독일군 제1군과 제2군의 벌어진 틈으로 들어왔다. 제2군이 퇴각을 한 상태에서 제1군이 단독으로 파리로 진격했다가 파국적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했다. 결국 독일군 제1군과 제3군은 퇴각을 단행했다.제4군과 제5군도 뒤를 따랐다. 목표 지점에 근접했던 독일군으로서는 매우 뼈아픈 순간이었다. 독일군은 다급하게 엔강까지 후퇴한 다음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참호를 파는 데 능숙했던 독일군은 엔강 고지대 산마루를 따라 기다란 참호선을 구축했다. (참호는 베르됭, 뫼르트 강, 보주 산맥, 바젤, 스위스 국경으로까지 이어졌다.) 독일군은 무리한 진격과 전투, 퇴각으로 지쳐 있었다. 당분간 공세적인 면모를 보이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참호에 의존했다.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이를 돌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몇 차례에 걸쳐 공세를 전개했지만여의치 않았다. 독일군은 참호를 기반으로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방어선은 갈수록 두터워졌다.
프랑스군은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전술을 모색했다. 현재 전선의 북쪽, 즉 엔강과 바다 사이의 틈을 장악해 승기를 잡는 것이었다. 100마일에 이르는 이 지역은 어떠한 군대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을 선취한 뒤 진격을 거듭해 독일군의 방어선을 배후에서 무너뜨릴 계획이었다.그러나 독일군 역시 프랑스군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즉각 북쪽으로 병력을 급파했다. 신설된 독일군 제6군은 북쪽의 백악토 고지대에서 남동쪽으로 밀고 내려가려는 프랑스군 제10군을 겨냥해 공세를 펼쳤다. 여기서 적군을 무너뜨려 북부 프랑스를 꿰뚫고, 다시 파리를 향한 공세를 도모하려 했다.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승리를 장담했던 독일군의 예측과 달리 프랑스군이 강력히 맞대응하면서 실패했다. 또한 8개 기병사단으로 플란데런 해안을 휩쓸려했으나 프랑스군의 증원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그나마 안트베르펜에서 벨기에군을 비롯한 연합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대체로 북쪽 지역에서도 뚜렷한 승기를 잡는 진영은 존재하지 않았다. 10월이 되면, 고대 성채도시인 이프르 인근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우선 영국군 제2군단과 제3군단이 이프르 동쪽으로부터 솟아오른 능선을 향해 공격을 감행했다. 독일군 제7군단, 제13군단, 제19군단이 효과적으로 방어하면서 격퇴됐다. 이후에는 독일군 24개 사단이 전선 전역(남쪽의 라바세 운하~북쪽의 에이저르 강)에 걸쳐 전면 공세를 펼쳤다. 이번에는 영국군이 성공적인 방어력을 선보였다. 비록 포병 전력에서 절대 열세였으나 우수한 소총(머스킷)으로 대응했다. 독일군은 비좁게 정렬해 들어오다가 맹렬한 소총 사격을 받고 쓰러졌다. 독일군이 기관총으로 오인할 정도로 영국군의 소총은 무시무시했다. 결국 5만 명에 달하는 막대한 전사자만을 남긴 채 공세는 실패했다. 제1차 이프르 전투는 11월 20일까지 지속됐다. 이 과정에서 독일군은 파베크 부대를 활용해 유의미한 전과를 올렸다. 후허와 수녀의 숲 등에 무자비한 중포 공격을 퍼부어 적군에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연합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무력화됐다.약 4개월 간의 공방전이 정신없이 이어지는 사이, 어느덧 서부 전선에는 추운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 시기에 연합군도 기다란 참호를 구축하면서, 양 진영은 더 이상의 공세 없이 참호를 기반으로 대치하는 형국이 조성됐다. 참호선은 북해에서 스위스의 국경 산악지대까지 475마일에 달했으며, 양 진영의 참호선 사이에는 중립지대가 놓였다. 웬만한 공격으로도 무너지지 않는 강력한 참호선이 형성됨에 따라 악명 높은 '참호전'이 예고됐다. 서부 전선 초기 전황은 무승부로 보이지만, 사실상 독일군의 패배라고 할 수 있다. 슐리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43년 전 보불 전쟁의 영광을 재현할 수 없음은 물론 양면 전선의 늪에 빠졌다. 반면 프랑스군은 수도의 위기에서 벗어나 주변부 영토에서 독일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단기간의 공방전 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이 수반된 점이 특기할 만하다. 프랑스군은 30만 명 이상, 독일군은 24만 명 이상이 전사했다. 전쟁 발발 직후, 비정상적으로 발생했던 '전쟁의 열광'은 빠르게 사그라들었고 처참한 비극만이 존재하게 됐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