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자화상
나를 본다는 고약함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내 방을 가지게 되었다. 방에는 책상과 침대등 나를 위한 집기들을 들여놓았다. 오빠가쓰던 물건을 물려받아서 쓰던 내게 나만의 방이 생겨난 것이다. 내 방에아버지가거울 하나를 사다가 걸어주셨다. 테두리가 화려한 무늬로 장식된 바로크풍의 타원형 거울이었다. 플라스틱으로 된 조악한 품질이었지만 내 방에 있는 물건 중에 그 거울을 가장 좋아했다. 초등학교 내내 치마나 분홍색 같은 여성적인 치장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지겹도록 듣고 살았던 내게 화려한 거울은 억압되었던 여성성을 위로해 주는 듯했다. 나는 그 거울 앞에서 몰래 엄마 옷을 꺼내 입어보기도 하고, 화장을 하면서 어른 놀이를 했다. 거울은 내게 억압된 욕망을 비춰주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입시 준비를 하며 그 방에 갇힌 것 같았다. 나는 그 방에서 몰래 소설책을 읽거나 거울 속에 내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유심히 봤다. 가끔은 머리를 틀어 올리고 머리 스타일에 따라 바뀌는 내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관찰하기도 했고 때로는 거울을 보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거울은 나의 친구였다. 그 뒤로 십여 년간 거울에 대한 별다른 기억이 없다. 거울은 단순히 몸치장을 도와주는 도구였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꾸민 후놀러 나가거나 직장으로 출근했다. 거울을 오래 들여다볼 틈이 없었다.
회사에서 퇴직하고 나서 갑자기 거울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때론 가짜 같기도 했다. 마치 거울은 진실을 비추는 것만 같았다. 한심하고 어리석고 모자란 내 모습을 비추는 것만 같았다. 그런 내 모습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화장실에 가서도 거울을 똑바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도망쳐 나올 때도 있었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 숨어든 영혼을 찾아
우리 몸에서 옷을 입어도 가릴 수 없는 것이 얼굴이다. 의복이나 몸치장으로 자신을 그럴듯하게 꾸밀 수 있지만 얼굴은 가릴 수가 없다. 우리는 얼굴을 통해 나를 드러내고 타인과 만난다. 얼굴 속에는 한 사람의 성격, 개성, 인품 등이 스며있다. 얼굴에는 한 사람의 삶이 들어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있다. 얼굴 속에서 드러난 표정을 보며 우리는 한 사람의 마음을 추측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지나온 과거의 흔적도 느끼게 된다. 얼굴은 단순한 생김새 너머 내면을 비추는 창과 같다.
예로부터 예술가들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많이 그렸다. 누군가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고 자기얼굴을 그렸다. 초상화가 자신을 기록으로 남기고 과시하는 목적으로 그려졌다면 자화상은 자기 탐색의 의미를 지닌다. 화가가 대상에 주의를 기울여 묘사하는 것처럼 자화상은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행위이다.
미술사에서 인상적인 자화상을 그린 이들이 여럿 있지만 그중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특히나 치열하다. 렘브란트 (Rembrandt, 1606-1669)는 평생 약 80편가량의 자화상을 남겼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에는 수많은 자신의 인생이 들어 있다. 인생의 굽이마다 일기를 쓰듯 자화상을 그렸다. 저마다의 자화상 속에는 야망, 자신감, 허영, 욕망 그리고 노년의 복잡한 감정이 배 있다.
자신을 어디까지 바라볼 수 있을까?
렘브란트는 제분업을 하는 중산층의 가정에서 태어나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비록 길지는 않았지만 대학교육과 미술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20대 초반에 고향에 화실을 차리고는 일찍이 전업 작가생활을 시작했다.<22세의 자화상(1629년)에는헝클어진 머리를 한 소박한 농부와 같은 모습으로 자기를 그렸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얼굴을 그리며 명암기법을 연구하기도 했고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감정에 따른 표정 변화를 연구했다.
렘브란트는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932년)을 기점으로 초상화 화가로 명성을 얻게 된다. 상업의 중심지이자 돈이 모이는 암스테르담에서 인기 있는 화가가 된다. 그리고 부유한 귀족 사스키아와 결혼을 한다. 그는 부와 명예 모두를 가지게 된 것이다. 1640년(34세의 자화상)에 성공한 렘브란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의 얼굴은 이미 모든 것을 이루었지만 거만하거나 과시적이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보석으로 장식한 모자와 섬세한 자수의 블라우스를 입고 있으며 목에는 모피 장식을 하고 있는 등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표정은 겸손하고 우아한 귀족처럼 느껴진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고상하게만 표현하지 않았다. 아내 사스키아와 자신의 모습을 함께 그린 <렘브란트와 사스키아(1935년)에는 유흥과 소비를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방탕아의 모습으로 솔직하게 담았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성공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초상화가로 유명했던 그는 초상화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야간 순찰대원의 모습을 그린 <야경(1642년)을 그린 이후로 그는 고초를 겪게 된다. 신흥 부자로 등장하던 시민계급에서는 당대 최고의 스타 화가였던 렘브란트에게 자신들의 초상화를 의뢰하였지만, 렘브란트는 의뢰자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았다. 집단 초상화에서는 한 명의인물이 개성 있게드러나길 기대했지만, 렘브란트는 어떤 인물은 얼굴의 옆면을, 어떤 인물은 얼굴 반이 가려진 채 그렸다. 그 작품 이후로 렘브란트에게는 초상화 의뢰가 들어오지 않았다. 렘브란트도 대중의 입맛을 맞추며 팔리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신화나 성서 이야기와 같은 내면과 관련된 주제에 집중했다. 렘브란트는 파산 이후에 오히려 그림이 자유로워 보였고 인물의 내면이 섬세하게 드러나게 된다.
내면의 심연에서는 무엇을 만나게 될까?
1657년 그의 재산은 경매에 부쳐져 가구와 식기류 모두 팔려나갈 정도로 가계상황에 심각해진다. 렘브란트는 이때부터 죽기까지 10년 사이에 가장 많은 자화상을 남긴다. 노년의 자화상에서 렘브란트는 허름한 옷을 입고 있으며 자신을 조금도 치장하고 있지 않다. 얼굴 근육은 느슨해지고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평온함도 엿보인다.
전성기 시절의 자화상과 비교해 보면인물의 변화뿐 아니라 빛의 사용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렘브란트는 빛의 화가라고 불릴 정도로 빛과 어둠을 잘 사용한 화가였다. 그는 대상의 구체적인 묘사보다도 빛과 어둠의 충돌과 대립을 통해 대상을 카지노 게임 사이트게 표현했다. 젊은 시절의 그의 그림에서는 빛나는 장신구, 화려한 의복 등으로 자신을 과시했다면 노년의 그림에서 강조되는 것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 그 자체이다. 그는 장식이나 배경이 아닌 나약해지고 늙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강조하고 있다. 나약함과 늙음은 추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왜 자신의 추함을 강조했을까? 어째서 자신의 추함을 지극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이 노인은 어째서 웃을 수 있는가?
<제욱시스로 분한 자화상에는 쭈글쭈글한 피부의 노인이 웃고 있는 얼굴을 하고 있다. 처음에 이 그림을 볼 때는 얼굴의 주름이 너무 거칠어서 오래 보기 거북했다. 순간 생전의 늙은 부모님 생각이 스치기도 했고 노년에 다가올 나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추함을 오래 쳐다보는 것은 불편한 일이기에 찾아온 기억은 재빠르게 도망쳐 사라졌다.
이 작품에서 렘브란트는 자신을 고대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로 표현했다. 제욱시스는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그림을 그린다고 알려진 화가이다. 벽에 그린 포도 그림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새가 포도를 먹으려다가 벽에 부딪혀 죽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그런 제욱시스에게 한 돈 많은 노파가 찾아와 자신을 모델로 한 여신을 그려달라고 의뢰한다. 제욱시스는 그 노파를 그리는 도중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
렘브란트는 제욱시스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제욱시스는 당대 최고의 화가임에도 노파를 여신으로 그릴 수 없다는 한계 받아들여야 한다는 허탈함이었을까? 늙어서도 젊은 여인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이 어리석은 욕망에 대해 웃음을 터뜨린 것일까? 진짜 아름다움은 겉모습이 아니라는 뒤늦은 깨달음이었을까? 그것이 무엇이었건 제욱시스의 웃음에는 무언가의 한계를 만난 허탈한 심정이었음이 분명하다. 화가로서 자신의 한계이거나 세속적 욕망을 가지는 인간의 한계를 만난 것일 테다.
렘브란트의 웃음은 자조가 섞여 있다. 이제야 알았다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던 전성기에도 알 수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알았다는 깨달음의 미소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한계에 비통해하지 않고 자신또한 제욱시스처럼 웃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예술가로 죽고 싶다는 바람을 담은 것이다.
이 그림을 계속 바라볼수록 처음에 느꼈던 거슬림이 사라진다. 늙음의 추함보다는 초연함이 보인다. 그림 왼편에는 죽음을 암시하는 그림자가 있지만 렘브란트는 그 앞에서 초조함이나 두려움이 없다.렘브란트는 자신의 얼굴, 자기 내면을 찾아 바닥 끝까지 내려간 인물이다. 렘브란트는 끝내 자신의 내면과 마주했다. 그것이 추함인 것을 알고도 좌절하지않았다.제욱시스처럼 웃다가 죽더라도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로 죽어가기를 희망했다.
나의 생과 화해할 수 있기를
이전에 내가 거울을 보기 힘들었던 것은 나의 허약함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라고 믿고 있었던 사회적 성취, 명함에 찍힌 회사의 이름과 직위, 그리고 젊음이 나를 포장해 주고 있었다. 그 포장지가 벗겨지고 나자 나는 민낯의 나를 만나서 놀라게 된 것이다. 내 얼굴이면서도 낯설다며 손사래를 친 꼴이다. 나는 헐벗은 나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었기에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자기 인식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인식의 과정은 나의 관심사나 취향을 알아가는 감미로운 과정이 아니다. 때로는 나조차도 알고 싶지 않은 헐벗고 상처 입은 나와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그러기에 어쩌다 의도치 않게 자신을 만나게 되면 화들짝 놀라 도망가거나, 화를 내거나, 혹은 못 본척하거나, 부인하게 된다. 진짜 나를 본다는 것은 나의 연약함을 마주하는 것이다. 상처 입고 헐벗은 나를 있는 그대로 견디는 일이다. 낯선 나를 만나더라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일 없이 친숙해지는 것이다.
렘브란트는 오랜 시간 자신과 만나왔다. 야망을 품던 젊은 시절에도,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던 전성기에도, 그리고 이룬 모든 것을 잃던 순간에도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가 끝까지 잃지 않은 것은 두려움 없이 자기 자신을 바라본 것이다. 그 끝에 그가 알게 된 것은 결국 인간의 한계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한계에서도 죽는 날까지 붓을 손에 쥐고 싶은 진지한 삶의 태도였을 것이다. 나를 알아가는 일을 두려워하지않는다면, 나를 알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연약한 나를 만나도 놀라지 않고 반갑게 미소 짓는 순간이 찾아오게 되리라는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노인의 얼룩덜룩한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서 흐르는 웃음을 눈과 마음에 담아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