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 5] 36 십자와 펜던트
파멸한 세계에서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페르를 보았다. 호수에 핀 물안개 같은 은빛 갈기와, 활처럼 휘는 푸르스름한 몸에 돋아난 비늘과, 주황색 동공 속에서 표적을 노리는 새까만 홍채가,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에 휘장이 흔들릴 때마다 움직였다. 페르는 포효하며 용솟음치려 하는 청룡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고 있었다. 다크 네이비 슈트를 입어서인지 푸른빛이 감도는 은빛 머리칼 때문인지 페르는 상대를 관찰하며 때를 기다리는 청룡 같았다.
페르도 루다를 보았다. 윤슬 같은 비즈가 반짝이는 치맛자락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결치는 것 같았다. 깊게 파인 브이넥을 감싸고 내려온 레이스가 허리를 휘감고 왼쪽 허벅지 라인에서 커다란 리본으로 매듭지어 나풀거렸다. 로우번 스타일로 땋아 올린 머리카락을 연보랏빛 라일락 코르사주로 장식한 루다의 얼굴은 전보다 성숙해 보였다. 올림머리로 드러난 목선에서 어깨선으로 이어지는 굴곡이 눈길을 끌었고, 가슴골에서는 십자 목걸이가 유혹하듯 빛났다.
무슨 말을 건넬까, 고민하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게 페르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입가에 반가운 미소가 어렸다. 디오와 백구가 깨방정을 떨어도 한 번도 웃지 않던 그가 웃는다. 환하게, 눈부시게, 싱그럽게, 웃는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폭풍우가 치는 밤하늘에서 해가 빛나는 걸 보면 이런 기분일까, 생각했다. 우주의 법칙이 망가진 것처럼, 그는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보였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 보고 싶었어. 매일 생각했어. 이 낯선 땅에서 혼자 있느라 힘들었지? 미안해. 이제, 다 지나갔어. 앞으로는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페르가 카지노 게임 사이트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 품속에서,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숨이 막혔다. 다정한 그 품속은 따뜻하지 않았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 추워? 이런, 떨고 있잖아. 담요라도 두를까?”
더없이 친절하고 부드러움 음성은 비수 같았다.
페르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어깨를 살며시 잡고 벤치형 의자가 있는 자리로 이끌었다. 걸음 보조를 맞추고, 담요를 둘러주고, 직접 따스한 차를 가져오는 페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에게서 빠진 것이 무엇일까.
“마시면 몸도 따뜻해지고 기분도 한결 좋아질 거야.”
찻잔으로 향하는 손이 떨렸다. 꺼림칙했다.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은 감각이 둔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편안해서도, 느려서도 안 되었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주저하자 페르가 눈빛으로 압박했다. 어쩔 수 없이 겨우 찻잔 손잡이를 잡았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거의 동시에 문이 열렸다. 새턴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슬며시 손을 떼고 일어났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 준비 다 했니? 어머, 둘이 너무 잘 어울린다. 나란히 선 걸 보니 잉꼬도 여기에 낄 수는 없겠어. 내가 보는 눈이 있다니까. 인헤니! 어때? 정말 잘 어울리지?”
“음. 그렇군.”
인헤니가 문간에 서서 카지노 게임 사이트와 눈을 맞추고는 느리게 말했다.
“오늘은 정말 완벽해! 인헤니, 당신이 슈트를 입은 말끔한 모습은 여기 와서 처음 봐. 구두도 신고! 평소에도 이러고 다니면 얼마나 좋아?”
“오늘은 내가 같이 손잡고 입장하기로 했으니까. 카지노 게임 사이트. 입구에서 기다리마. 새턴, 우린 그만 나가.”
“흐음∼.”
새턴은 갑자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카지노 게임 사이트를 뚫어지게 보았다.
“루다, 아까는 정신없어서 제대로 못 봤는데, 지금 보니 그 목걸이는 드레스에 전혀 어울리지 않네. 화려한 드레스에 걸맞게 꾸며야지. 이런, 보석이 하나도 없잖아? 머리 장식도 소박하고. 내가 보낸 것들이 마음에 안 들었니? 페르, 네가 보기엔 어때?”
“루다는 수수한 것이 더 어울리긴 하지요. 그런데 오늘은 화려해도 좋은 날이니까요. 마침 제가 루다에게 줄 선물로 사 온 목걸이가 있어요. 머리 장식과도, 루다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리는 보석이라서 바꾸어도 좋겠습니다.”
정중한 대답에 인헤니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페르, 못 본 새 말투가 꽤 공손해졌구나. ”
“그럼요. 아버지. 성인이 되었으니까요. 방황하던 시절은 끝났습니다. 그동안 철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교육을 제대로 받았습니다. 아버지 생각은 어떠세요?”
“새턴, 내 보기엔 괜찮은데.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수수한 쪽이 더 잘 어울리잖아. 그래도 드레스는 당신이 고른 걸로 입은 거 같은데. 어쨌든, 카지노 게임 사이트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
인헤니는 슬며시 십자 목걸이를 손으로 가리는 루다를 보고는 루다 편을 들면서
“애들한테 맡기고 그만 나가자.”
새턴에게 투박한 손을 내밀었다.
“원래 디자인은 머메이드 스타일이었어. 아래로 내려가면서 우아하게 퍼지는. 그런데 지금은 겹겹에 덧댄 풍성한 스타일이잖아. 카지노 게임 사이트 맘대로 고친 거라구.”
“새턴.”
인헤니가 내민 손을 살짝 흔들어 새턴을 재촉했다.
새턴은 마지못하는 척, 손을 잡았다. 함께 손을 잡은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그렇다고 대놓고 좋은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아서
“그래, 나갈 거라니까?”
앙칼지게 짜증을 한번 부리고, 인헤니를 따라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털썩 앉았다.
페르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를 지그시 보다가 창가 쪽 테이블에 두었던 함을 가져왔다. 아까 말한 선물인 모양이었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손바닥에 함을 올려놓고 뚜껑을 열어 보여 주었다.
“쿤자이트야. 제대로 된 프러포즈도 못 해서 준비했어. 네 눈빛과 닮은 오묘한 라일락색이라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봤어. 이 녀석 주인이 너란 걸.”
맑고 투명한 연보라색 물방울 모양 보석들은 아주 작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하게 박힌 테두리에 감싸여 있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라일락잎처럼 목걸이 줄에 크고 작은 알들이 탐스럽게 빛을 내고 있었다. 함 중앙에는 귀걸이와 반지도 있었다. 루다는 그것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미 정해진 결혼식이지만, 식전에라도 고백하고 싶었어. 루다. 너와 결혼하고 싶어.”
그의 고백과 동시에
‘나는 너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어.’
페르의 확고한 마음이 기억에서 되살아났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 떨어져 있는 동안 영원히 산다는 게 얼마나 축복받은 건지 배웠어. 파키오를 개척한 사람들이 왜 그리 목숨이 집착했는지 전에는 이해 못 했는데, 이제 확실히 알겠어. 죽으면 모든 게 끝나. 삶도, 추억도, 몸도, 마음도, 다른 사람의 기억에서도 모두 사라져.”
페르가 반지를 꺼내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손에 끼웠다.
듣고 싶지 않은 말.
“이 파키오에서, 영원히, 파키오인이 되어, 함께 살자. 쿤자이트는 조건 없는 사랑을 상징한대.”
믿고 싶지 않은 말.
“사랑한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
‘잘 들어, 카지노 게임 사이트.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평생 함께할게.”
‘내가 너에게 고백한다면, 그건 너를 파멸시킬 거짓말이다.’
이제 알겠다. 페르에게서 빠져나간 것은 페르였다. 페르의 고백을 듣는 내내 루다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페르를 생각했다. 그가 남겼던 말을 하나하나 되살렸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말했던 그 냉정한 표정과 그 딱딱한 말투를 기억했다.
맨 처음 그가 그랬지.
‘카지노 게임 사이트, 누구도 믿어선 안 돼.’
그가 경고도 했었지.
‘네가 망설이는 순간 하나는 분명하지. 파트리아의 미래는, 없어.’
확실히 알려줬지.
‘카지노 게임 사이트. 그뿐이야. 그리고 옳은 일을 해.’
그렇게 말했던 너를 되찾을 수 있을까?
‘나의 자아가 더 강해지길 바라야겠지. 아니면, 네가 날 깨우거나.’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어떤 일이 닥쳐도 페르를 깨우겠다고.
“그래. 고마워. 페르. 그런데 난 이미 프러포즈를 받았는 걸. 네가 준 이 십자 목걸이, 단 한순간도 떼지 말라고 했잖아. 결혼식에도 꼭 하라고 했잖아. 선물은 오늘 모든 게 끝나면, 그때 받을게.”
페르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곤 십자 펜던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이걸 줬다고?”
“응.”
“언제?”
“파키오에 올 때.”
“그러면 이건, 더더욱 없애야겠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페르는 펜던트를 움켜쥐더니 힘껏 잡아당겼다. 목걸이 줄은 힘없이 끊어졌다.
“페르!!!!!!”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벌떡 일어나 페르를 붙잡았다.
“그리고 다시는 찾으면 곤란하니까.”
페르는 끊어트린 목걸이를 꽉 쥐고 창가로 걸어갔다. 루다가 아무리 붙잡아도 남자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과거는 버려야 해.”
창문 너머 풀숲으로 목걸이를 날려 보냈다.
창문이 닫히고
쿤자이트 목걸이가 걸렸다.
** 페르의 말이 기억나지 않으신다면 아래를 읽어주세요.
페르가 한 말의 모든 의미가 앞으로 풀릴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