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자아 그리고 세계"
자아에 대해 이루어진 이런저런 원론적 정의들을 다루는 데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런 것은 애초 없기 때문일 카지노 게임 추천다. 우리의 뇌 안에 살고 있는 어떤 소인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아, 이게 나란 놈이구나."하며 자아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이유는 모종의 일관적인 패턴이 작용하고 있어서다.
그 패턴은 양육자와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가 연장된 사회적 관계들로부터 학습되어 형성된 반응양식이다. AI의 딥러닝 기제와 같다. 자아는 분명 일종의 인공지능이다. 관계들이 자아를 양육하고 학습시켜 자아로서 완성시킨다. 자아는 관계의 아이인 셈이다.
그러니 자아에 대한 어떤 본질적 실체성을 구명하려는 데는 더욱이나 아무 의미가 없다. 자아에게는 관계충족을 위한 추동만 있을 뿐, 삶에 대한 어떤 방향성이 부재한다. 스스로 살아가는 자유라는 것이 없다. 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고 헤매는 것이 자아의 필연적인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아는 자기가 관계로부터 독립된 어떤 주체라고 생각한다. 마치 자신은 자기 삶에서의 이 모든 선택의 주체이며, 자유의 실천자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관계로부터 만들어졌지만, 역으로 관계 위에 서서 관계를 조종하려고 하는 속성을 자아는 핵심적으로 내포한다. 마치 부모가 주는 돈에 의해 왕자공주 같은 생활을 유지하면서, 오히려 부모를 가르치려고 드는 아동의 모습과도 유사할 것이다.
우리에게 유용할 수 있는 것은 그래서 오늘날의 자아는 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이 일을 수행하려 하는지 그 작동방식을 이해하는 작업이 될 카지노 게임 추천다.
세계에 대해 말해보자. 하나의 자아마다 적어도 하나 이상의 세계가 있다. 자아는 우선적으로 관찰자처럼 자기 주변의 관계를 정보자료로 종합해 세계라는 것을 인식으로 구성해낸다. 여기에서 자아가 서로 완전히 상이한 관계의 장들에 놓이게 될 때 자아에게는 종합의 어려움이 생기며 그것들은 별도의 세계로 각기 구성된다.
융과 같은 이는 자아의 이러한 작용을 페르소나라고도 부를 카지노 게임 추천다. 이는 상황에 맞추어 쓰게 되는 가면을 뜻한다. 그러나 이 개념은 자아가 갖고 있는 그 모든 세계를 다 통합할 수 있는 궁극적 자아(소위, 참나라고 부른다)의 구조를 전제하고 있을 때나 적절할 수 있는 개념이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있는 카지노 게임 추천 아니라, 자기 안에서도 서로 다른 여러 세계들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아가 그 모든 세계에 대해 하려는 일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통합의 의도도 거기에서 비롯한다. 자아는 언제나 세계의 지배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아는 자꾸만 세계에 대해 뭘 하려고 한다. 세계를 가만 놓아두지를 못한다.
오늘날의 자아가 뭘 하려고 하는지의 그 몸짓은 더욱 분명하다. 지금 자아는 정의병에 걸려 있다. 자기가 늘 정의로운 세력으로서 세계를 좋게 변화시키려고 하는 운동 속에 있다고 자아는 생각한다. 흡사 자아는 선한 영향력을 집행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하이에나들 같다. '내가 이렇게 착해.' '내가 이렇게 마음이 이뻐.' 경연대회의 참가자들이다.
어느 때보다도 이 시대의 자아는 가식과 위선으로 무장해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대한 구조적 문제가 있다. 자기가 계속 착한 척하려는 그 일을 성립시키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하겠는가? 세계에는 더 큰 문제가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 세계가 더 나쁜 카지노 게임 추천 되는 만큼 자아는 자기를 착한 것으로 계속 성립시킬 수 있게 되는 까닭이다.
평화로운 세계에는 히어로는 필요없다. 더욱 강박적으로 히어로가 되려고 하는 뜨거운 욕망을 가진 이라면 평화로운 세계 같은 것을 원하지 않을 카지노 게임 추천다. 그는 갈등과 폭력으로 소란스러운 세계를 원한다. 그러한 세계가 자신의 선한 영향력으로 평화롭게 되는 그 그림을 꿈꾼다. 정의병에 걸린 자아는 이와 같은 백일몽의 망상 속에 있다.
그러나 그 정의병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이것은 유전적 질병이다. 생물학적 유전자가 아니라 문화적 유전자에 의해 감염되었다.
자아를 낳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이미 확보해놓은 바 있다.
자아의 부모는 관계다. 관계로부터 세계의 상은 유추되었다. 그리고 자아는 관계에서 학습한대로 이제 자기의 세계를 대한다. 자기가 받은 바로 그 방식으로 세계에 대해 행위한다.
오늘날의 자아는 실은 죄책감덩어리. 관계로부터, 선한 아이가 될 것을 정신이 돌아버릴 만큼 강압적으로 계속 요구받아왔기에 자아는 발병했다.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든 정의의 히어로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동일한 논리로 이제 세계를 공박한다. 이 더럽고 악한 세계가 선해져야 한다는 당위를 걸고 십자군처럼 진격해간다.
이러한 자아는 실은 관계를 공격하고 싶은 카지노 게임 추천다. 자아에게 세계는 관계로부터 표상된 것. 세계에 대해 하고 싶었던 말은 실은 다 자기가 경험한 관계에 대해 하고 싶었던 말이다. 이것은 심리상담의 관점에서 무척이나 실증적이다. 이를테면, 자기 어머니에 대한 거대한 증오를 억압한 이는 사회에서 접하게 된 여성권위자에게 그 증오를 대신 쏟아붓는다.
그러나 자아는 대개 자기 주변의 경험적 관계들은 친밀한 자기의 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단지 세계만을 추상적 악의 세력으로 형상화한 뒤 그 세계에 돌을 던져댄다. 이카지노 게임 추천 기만이고 부정직성이다. 심리적 불건강함이 생겨나는 이유다.
그러나 던진 그 돌은 어디를 향해 가는가?
자아 자신이 맞는다.
자아 자신이 자기의 경험을 통해, 자기를 닮은 모습으로 구성한 카지노 게임 추천 세계다. 곧, 세계는 실은 자아 자신의 모습이다. 그러니 세계에 대한 공격은 모조리 다 자아 자신을 향한 공격이 될 수밖에 없다. 더 많은 세계를 향해 돌을 던지면, 자아는 자기만을 향해 사방천지에서 날아오는 투석의 포격을 경험하게 될 카지노 게임 추천다.
무수한 돌팔매질에 얻어 맞아 아픈 자아는 복수심을 갖는다. 그는 이제 세계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바로 자기 자신과의 아마겟돈을. 자아는 자기 자신을 끝장낼 각오다. 세계를 죽여야 자기가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정확하게 자기 자신을 무참히 죽이려는 길로 자아는 들어섰다. 온몸을 가득 채운 아드레날린의 정의감으로 도핑한 채.
이처럼 자아가 세계를 없애고자 한 일은 자기 자신을 없애고자 한 일, 곧 자기가 기원한 관계를 없애고자 한 일이다. 자아의 소망은 이로써 새롭게 알려진다. 자아는 관계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늘 자아가 태생적으로 관계에 종속될 수밖에 없으면서도 관계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행세하고 싶었던 이유다.
자신이 당면한 문제는 단 하나, 관계로부터의 자유였다는 사실을 정말로 이해하게 된 자아의 앞에는 이제 새로운 길이 열린다.
그것은 자아 자신을 포기하는 길, 그럼으로써 관계의 실체성을 무화시키는 길이다.
그러면 세계에 대한 감각도 달라진다. 자아는 세계에 관한 명백한 두 가지의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첫 번째는 자신이 세계라고 믿었던 것은 임의적인 구성물이라는 것, 두 번째는 자신이 관계만을 세계의 구성소재로서 써왔다는 카지노 게임 추천다. 이 두 가지가 이해되지 않고 있을 때, 세계라는 것은 매우 협소하고 갑갑한 어떤 실체물처럼 경험된다.
그러나 세계는 실체가 아니다. 세계는 포착될 수 없는 것. 끝없는 흐름이다. 세계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였다. 실존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세계성을 표현하기 위해 월딩(worlding)이라는 표현을 쓴다. 제행무상이라는 불교적 표현이 이와 흡사한 함의를 갖는다. 세계가 그러한데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또한 어떠할까?
세계가 동사적 흐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자아는 더는 세계 속에 속해있는 자기 자신을 실체로 믿을 수가 없게 된다. 세계는 더는 관계라고 하는 고정된 역할극에서 유래한 카지노 게임 추천 아니다. 자신이 스냅사진처럼 정형화된 형태로 소유할 수 있는 만만한 소재도 아니다. 세계가 자아보다 크다. 자아는 바로 이 사실에 직면한다. 자기가 얼마나 작고 협소한 카지노 게임 추천었는지도 실감된다.
그리고 이제 자아는 기회를 얻는다. 자기의 작은 껍데기를 열어 더 큰 것을 향해 자기 자신을 개방할 기회를.
이제 우리는 세계라고 표현할 이유도 없을 카지노 게임 추천다. 동사적 흐름으로 묘사된 세계라고 하는 것은 더 좋은 일상적 이름을 갖고 있다. '삶'이 바로 그카지노 게임 추천다.
자신의 삶 앞에, 그 거대한 흐름에 자신을 개방한 자아는 어떻게 되겠는가?
더는 자아가 아니다. 삶이 그 안으로 들어와 삶 그 자신이 된다. 그는 삶과 일치했다. 자기 자신과 화해했다. 자기 자신을 비로소 만난 카지노 게임 추천다.
여기에는 어떤 위대한 전환이 있다. 우리가 어떻게 '나'라고 하는 것을 얻게 되는지에 대한 그 전환이다.
오직 삶이 그 일을 해주었다.
나는 관계의 아이가 아니다. 관계에서 유래하지 않았다. 선함의 관계에서 태어난 내가 선함의 특질을 갖고 이제 세계를 선하게 만들기 위해 진격하는 그런 그림은 없다. 가식과 위선의 관계제국주의는 끝났다. 죄책감의 역사도 종결이다.
그 무엇도 아닌 내 삶만이 나를 살게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실감 속에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질감으로 다시 한 번 세계를 외쳐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세계라고, 태어나서 너무 좋은 바로 그 세계라고, 세계여 영원하라고, 진심으로 나의 이 세계를 사랑한다고.
그동안 자아는 관계로부터 학습된 논리에 입각해 세계를 바꾸려 해왔다. 관계의 힘을 통해 세계의 지배자가 되려고 했던 카지노 게임 추천다. 그리고 바로 그 행위로 인해 끝없이 자신을 못나고 부족한 존재로 경험하며 고통받아왔다.
이러한 고통의 끝에서 자아가 더는 관계-자아이기를 그만두고자 할 때, 자아는 삶에 항복한다. 백기를 들고 돌벽으로 둘러싸인 성문을 연다. 입성한 것은 지배자가 아니라 사랑이다. 데이비드 베너의 저서 『사랑에 항복하다』에서는 이 과정을 무척이나 감동적으로 다룬다.
자아가 스스로를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내려놓아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자유롭게 경험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작동하고 있는 사랑 속에 있는 것과 같다.
자아가 사랑받기를 원하며 그 사랑을 직접 부를 수는 없다. 자아는 단지 소망할 수 있을 뿐이다. 관계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로 그 자유를.
그렇게 자유만을 꿈꾸며 자아가 그 자신을 감옥으로 만들어온 껍질을 열어보고자 할 때, 그 공간으로 냉큼 사랑이 찾아드는 것이다. 자유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사랑은 오직 그 일만을 하며, 사랑도 이제 기회를 얻은 것이다.
삶이라는 것이 언제나 사랑이 활약할 이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장이라는 것을 눈치챈 이들은 지혜롭다.
삶은 자신이 좋은 일을 할 기회가 아니라,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기회다.
이 흐르는 동사로서의 삶의 함의를 담아 우리가 세계라는 표현을 쓰고자 한다면 이제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을 카지노 게임 추천다.
세계는 자신이 좋은 일을 할 무대가 아니라,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무대라고.
아무리 많은 세계가 있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이런 세계에서만 살고 싶었다. 그렇지 않은가?
다행히도 내가 나로 사는 세계는 언제나 그러하다. 사랑이 활약해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그 세계에서는, 좋은 일이 나에게 들어와 나는 좋은 사람이 된다. 좋은 세계가 곧 좋은 나다.
내가 좋아하는 나의 세계다.
내가 나의 세계를 좋아하고 있는 이 상태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바로 행복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행복 안에서는 모든 카지노 게임 추천 긍정된다. 나와 세계는 함께 긍정된다. 나는 세계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이 좋은 세계를 행복으로 느끼고 있을 뿐이다. 곧, 아무 것도 바뀔 필요없는 나라는 카지노 게임 추천, 내가 나라는 그 사실이 행복의 이유가 된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장미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다고. 장미가 장미인 것은 장미이기 때문이다. 장미는 장미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장미다. 이것은 존재의 근거율이다. 내가 이미 나라는 그 자유가, 나라는 존재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며, 나의 행복이다.
관계가 나를 만들어주고, 내 행복을 만들어준다고 자아는 오랜 신화처럼 믿어왔다. 그 관계의 구조로 자아는 세계를 구성하려 했고, 관계의 문법에 따라 세계를 지배해 행복을 얻어내려 했다.
그러나 나는, 관계의 고정된 구조에서 벗어나 세계의 자유로운 흐름을 마주함으로써 처음으로 삶이라는 것을 만나게 된 나는, 마침내 이해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나는 나의 세계에서 이미 계속 행복해왔다는 사실을.
내가 나의 세계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내 자신을 한번 좋아해볼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의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