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힘"
깨달음은 힘인가?
당연히 힘이다. 그게 어떤 힘인지만이 우리에게 물음이 될 뿐이다.
깨달음은 나를 기대할 수 있는 힘이다.
나에게 기댈 수 있는 힘이라고 해도 좋을 무료 카지노 게임다.
강한 인간,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기대할 수 있는 이를 우리는 강한 인간이라고 부른다. 깨달음은 이 강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길이며, 강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되는 길이다.
우리가 문화적으로 세뇌된 전형적인 방식은 이러하다. 우리는 강한 것을 나쁜 무료 카지노 게임라고 생각하도록 학습되었다. 이에 따라 힘의 속성도 굴절되었다. 진정한 힘을 가진 이는 약한 이들을 위해 그 힘을 쓴다며, 약함의 봉사재로 활용되는 무료 카지노 게임 진정한 강함이라고 생각하도록 최면되었다.
바로 그렇게 약한 이들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에 어른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참된 어른으로 행위하는 일을 절대적 가치처럼 칭송해왔다. 유교주의는 이러한 방식으로 승리를 기획했다.
그러나 약한 이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쓴다는 이들의 사실적인 이름은 따로 있다. 바로 '착한 일진'이 그무료 카지노 게임다. 의적, 협객, 슈퍼히어로 등등, 윤리적 수식어들을 통해 변주된 이름들도 많다. 다 같은 일진판타지다.
이 일진판타지는 자신이 일진에게 당했다고 생각한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들은 일진을 강한 힘을 가진 존재처럼 경험했으며, 그 힘에 양가적인 감정을 느꼈다. 루돌프 오토가 말하듯, 매혹되며 동시에 두려워진 것이다. 그리고 이 일진판타지의 창작자들은 불편한 두려움은 거세하고 매혹의 요소만을 남기려고 시도했다. 그 방편이 바로 도덕이다. 이들은 도덕을 활용해 무서운 일진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통제하기를 꾀했던 것이다.
"자고로 사람이면 약한 이들을 위해 진정한 힘을 행사해야 하는 법이거늘, 하늘 부끄러운 줄도 모르느냐?"
흡사 오성과 한음 같은 꼬마도령의 말투로 일진에게 호통을 치면, 그 도덕의 정론 앞에 일진이 얼굴울 붉히며 개과천선하고 이제는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면서 꼬마도령에게 복종의 절을 올리는 그런 그림을 꿈꾼 무료 카지노 게임다.
그렇게 머릿속 참된 도덕[꼬마도령]의 말씀에 따라 살며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이의 모습을 우리는 유교주의 문화권의 언어로 어른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러니 어른은 강한 인간의 반대편에 있는 셈이다. 강한 인간은 인간의 강한 모습을 더 많이 보고 싶어하며, 어른은 인간의 약한 모습을 더 많이 보고 싶어한다. 약함의 중독자다. 세상이 약한 이들로 가득해져야 이 약함의 중독자는 착한 일진 놀이를 지속적으로 즐길 수 있다. 이에 따라, 약한 인간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어른으로 보이기를 꿈꾸는 이들의 세뇌 및 선동에 의해 인간의 위상이 추락하게 되었다. 어른은 다른 이를 자기보다 못나고 약한 존재로 봐야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그러진 쾌락을 위해 쓰인 제일의 도구는 단연 도덕이다.
니체는 이 사실을 일찌감치 꿰뚫어본 현인이다.
도덕이라는 것은 일진에게 맞고 다녀 원한감정을 갖게 된 이들의 도구적 전유물이 되었으며, 그 목적은 정신승리를 통해 얻어낸 기만적 권력의 쾌락에 도취되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한다. 니체의 종교비판에 있어서도, 강한 인간을 꿈꾸고자 했던 종교가 약함에 중독된 도덕으로 추락하게 된 것을 핵심적인 문제로 지적한다.
애초에 일진을 강한 힘이 있는 존재로 보고 있던 것부터가 착각이다. 그러니 이 시선이 일진에게 얻어 맞은 이의 시선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일진은 누구보다 약하다. 자기가 힘이 없으니까 남이나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남을 괴롭힌다는 것은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 밖에 있는 세상을 바꾸려는 의도다.
그러나 정말로 힘이 있는 이는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바꾼다.
강한 인간은 자신을 바꾸는 이의 이름이다. 설령 그 변화로 인해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을 잃게 되더라도, 거기에서 그는 또 나로 설 무료 카지노 게임라며 그렇게 나를 기대할 수 있는 모습이다.
이것을 우리는 존재의 힘이라고 명명할 것이며, 깨달음의 힘이라고도 말할 것이다.
존재는 사실적으로 존재한다. 이를 실존(實存)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존재의 힘은 실제적인 힘일 수밖에 없다. 표현 그대로 실력(實力)이라고 말한다. 실존은 실력이다.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가 아니다. 틸리히가 말하듯 오직 존재 그 자체에서부터만 존재의 힘은 기원한다. 다시 말하자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력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강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인간의 유일한 문제는 자기를 약한 존재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판타지소설 같은 구조를 공상해서, 모든 인간에게는 강함과 약함이 필연적 대극을 구성하는 한쌍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허구의 언술도 남발한다. 그러니 오히려 인간은 반드시 약해야만 그가 진정으로 온전하게 강할 수 있다는 식이다. 자신이 일진에게 얻어 맞은 일을 미화하고 신성화하기 위해 갖은 소설을 다 쓴다.
붓다라면 아주 단순하게 두 가지만을 말할 것이다. 우선은, 그는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인식하고 때린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운 뒤 그 거울상을 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잘못한 존재였다고 자책하며 자신을 또 한 번 때리지 말 것. 다음으로는, 맞았으면 아플테니 빨리 쉬며 상처를 아물게 할 것. 이것은 저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로 자주 소개된다.
더 분명한 심리학적 논점에 대해서도 우리는 밝혀볼 수 있다. 그는 왜 우리를 때렸는가? 자기 눈앞에서 우리가 이동되거나 사라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싶었다. 왜인가? 우리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약한 인간은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온갖 센 척을 하며 위력을 가용한다. 그러나 그 위세는 다만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알릴 뿐이다.
강한 인간은 더 쉽게 산다. 그는 그냥 "너무 두렵다."라고 말한다. 그는 센 척을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자신이 두려울 때는 두렵다고 말할 수 있는 강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어서다.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일, 이것이 바로 실력이다. 존재는 꽃이 피듯 자연스럽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스스로의 존재방식을 표현한다. 마음은 그러한 존재현상이다.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 마음이며, 그 일을 자연스럽게 하는 이는 존재의 힘을 아주 수려하게 집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마음은 아주 멋있고 힘있다. 어떤 불모지에서도 아무 문제없다는 듯이 당연하게 자기 존재를 피워내고 있는 강한 생명력의 들꽃과도 같다.
그렇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당연하게 또 나인 것이다. 멋있고 힘있는 마음의 표현으로 말미암아 또 나로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는 실력이다. 실력이 있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고 있기에 실력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약함에 중독되어, 약한 것을 지켜야 한다느니, 진정한 힘은 약자를 위해 쓸 때 발휘되는 것이라느니 등의 판타지소설만 쓰고 있을 때, 우리는 이 존재의 힘을 망각하게 된다. 그러면 실력도 잃어진다.
실력이 없을 때 언제나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있어보이는 척'이다. 표현 그대로, 자기가 그럴 듯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남들에게 보이려는 그 일만을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주로 활용되는 소재 역시 도덕이다.
이를테면, 노래나 연기를 못하니 도덕을 내세우며, 도덕으로 실력을 우회하기를 꾀하는 연예인들의 모습을 우리는 종종 목격하곤 한다. 오늘날은 아예 도덕이 성공의 필수조건으로 자리잡은 듯도 싶다. 이런 것이 다 존재의 힘을 잃어 실력이 없으니, 도덕으로 대신 '있어보이는 척'의 자기신화를 만들려고 하는 모습이다.
깨달은 척하는 이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돈을 많이 벌거나, 유명인이 된다거나,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도덕적 존재로 인정받게 되면, 그게 바로 자기가 깨달았다는 증거라고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자기 능력으로 증명하려 하는 이 행위 자체가 존재의 실력이 없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강한 인간은 있어보이는 척을 하지 않는다. 그냥 단순하게 있어버린다.
'있어보이기'와 '있어버리기'는 음가적으로 가까운 것 같지만 완전히 다른 현실이다.
고양이, 왠지 고양이 얘기를 하고 싶다. 고양이들은 '있어버리기'의 대가들이다. 한 반려인이 방에서 쉬고 있는데 부엌에서 우당탕 큰 소리가 들려온다. 서둘러 나가보니 식탁 위에 올려놓은 반찬그릇들이 다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다. 부단히 연습해온 냥냥펀치의 결과일 것이다. 반려인은 이 끔찍한 상황을 정리할 생각을 하니 화가 치솟는다. 소리를 지르며 고양이에게 다가간다. 모든 존재는 도덕적으로 똑바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도덕이 진정한 힘을 발휘할 시간이다.
고양이는 도덕의 용자가 정의의 심판을 집행하기 위해 혼돈의 마왕성으로 들어서자, 그 앞에서 바닥에 냅다 누워버리고는 배를 내민 채 왼쪽 오른쪽으로 연달아 몸을 뒤집어대며 꼬리를 살랑거린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춘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Kill me, if you dare."
고양이는 그냥 있어버리는 중. 그리고 오늘도 존재가 이겼다.
고양이가 약한 존재라서 긍휼히 여긴 것이 아니다. 스스로 발하는 그 존재의 당당함 앞에 다른 모든 것이 초라해진 것이다. 사람들이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은 바로 이 '존재의 뻔뻔함' 때문이다. 뻔뻔하기에 멋있고 또 힘있다. 고양이는 집주인 눈치를 살피는 위축된 세입자처럼 살지 않는다. 자기가 그 자리의 주인이다. 당연하다. 모든 존재는 그의 고유한 질량만큼 우주를 점유하고 있고, 실은 주인이기에 그 점유가 성립되고 있는 것이다.
우주에 당연하게 내 자리가 있으며, 어느 곳에 가든 그 자리가 또 나의 자리다. 어디에서나 주인처럼 당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나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한 나에게 기댈 수 있다. 이것이 존재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존재의 현실이다.
강한 인간은 이 존재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존재하는 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존재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 자신을 바꿨다. 너만 없으면 내가 진정한 나일 수 있는데, 라며 자신을 온실 속 비루한 화초처럼 착각하는 일을 그만 두고, 여기도 아주 멋진 내 자리라며 한 송이의 담대한 들꽃이 되었다. 강한 마음으로 피어나버렸다.
그냥 있어버리려고만 했는데, 원래 우리의 것인 자연스러운 이 존재의 힘이 당연하게 집행된 것이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처럼 반드시 힘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 우리는 내일이 기대될 것이다. 내일은 더는 두려움의 소재가 아니다. 내일의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모습으로든, 문제없이 또 강하게 존재하고 있을 나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런 나에게 기댈 수 있다.
이제 나에게 자꾸만 관심이 가는 일은 이상하지 않다. 나만 있으면, 나에게로만 향하면 된다는 사실이 세포에 새겨져가는 일도 자연스럽다. 나로 무르익어가는 것이며, 나를 향해 성숙해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도덕을 사는 어른이 아니다. 깨달음을 사는 강한 인간이다.
저 들꽃이 피어난 높은 바위 위로 갈매기는 약한 것들을 위해 날아오르는가?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 약한 존재가 없음을 알리기 위해 나는 들꽃이었고, 바위였으며, 갈매기였다. 그렇게 또 나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