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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Feb 04. 2025

무관심 속에 살아남기 #4

"계속하기를 계속하는 그 이름, 카지노 게임"


카지노 게임



이 세상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을 때, 우리는 하고 있던 일마저도 하기 싫어진다. 의욕이 떨어지고 동력이 상실된다. 특히나 많은 창작자들은 언제나 이 문제와 씨름하며 산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 내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일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지를 회의하고 또 회의한다.


그러나 그 무겁고 어둡기만 한, 절망적인 무관심의 장막 속에서도 결국에는 또 해나가고 또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아니 이것은 질문이 잘못되었다. 우리는 차라리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들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우리는 숲이 키운 이들의 이름을 묻고 있다. 숲을 닮아 스스로 자생하고 있는 이들의 이름을 묻고 있다.


숲속에서 돌연히 나타나 지치지도 않고 저 아득한 숲길을 계속해서 걸어가는 이들의 그 이름.


카지노 게임. 그들은 바로 카지노 게임다.


카지노 게임는 가장 힘이 센 이가 아니고, 가장 능력이 많은 이가 아니다. 가장 많은 성공을 거둔 이도 아니고, 가장 확실한 안전을 확보한 이도 아니다. 모든 이에게 가장 총애받는 이도 아니고, 모든 이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가는 이도 아니다.


카지노 게임는 그 어떤 자원과 능력, 행위, 성격, 품성, 그 삶의 목적 같은 것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카지노 게임가 카지노 게임인 이유는 단 하나,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짙게 가득 메운 무관심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기를 계속하고 있기에 그는 카지노 게임다.


용사라는 것은 타고난 출생이나, 그의 위업이나, 사람들로부터 받은 훈장의 개수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용사를 규정하는 것은 오로지 그 존재방식이다. 용사는 용사라는 직업이나 활동이 아니라, 용사라는 존재방식이다.


그래서 용사는 존재하는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것이다. 누구나 용사가 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떨까. 인간이면 누구라도 용사가 되고자 이 세상에 온 것이라고.


자신의 삶을 지속하는 일이 너무나 무겁고 힘겹게 경험되는 때라면 이 용사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진다. 아무 결과도 이득도 없는 일에, 고작해야 생존을 위한 현상유지에 불과할 뿐인 이 부질없어 보이는 모든 일에, 미래에는 좋아질 것이라는 신기루와 같은 막연한 환상에만 자신을 위탁한 채 걸어야 하는 이 사막 같은 삶에, 우리가 어떻게 용사를 청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의 구원자를. 쓰러져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 그 불굴의 영혼을.


우리가 용사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이런 나는 어렵지 않을까, 자신이 없고 너무 무섭다, 나에게는 너무 힘든 길인 것 같다. 나는 아마 안 될 거야.'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고민을 하는 이야말로 용사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용사로 드러난 모든 이는 동일한 고민 속에서 용사로 피어났다. 용사는 불안과 두려움이 없는 이를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만 필연적으로 출현할 수 있는 바로 그 용기를 내는 이를 뜻하는 것이다. 용사(勇士)라는 단어의 뜻 그대로다.


틸리히가 말한 '존재에의 용기(courage to be)'라는 표현은 용기라고 하는 것이 더욱 그 자신의 존재방식과만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한층 심화해준다. 불안과 두려움은 우리가 존재하지 못하게 될 것 같은 그 불안과 두려움이다. 우리가 존재를 지속하는 일이 불가능하게 생각되는 그런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존재하고 싶다고 아주 미약하게나마 덜덜 떨면서 일어서는 진실된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용기다. 그리고 그 용기로 인해 모든 것이 반전된다.


용기는 아주 거룩한 것인데, 그것은 자신을 맡기는 일이다. 자신보다 더욱 커다란 것을 향해 자신을 내어주는 일이다. 용기를 낸다는 것은 곧 자신을 낸다는 것이다.


존재를 계속하는 일이 암담해보일 때 용사는 자신의 존재를 내놓는다. 그러나 어떤 대상에게 위탁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존재의 사실에만 내놓는다. 존재 그 자체를 향해서만.


이것은 비유하자면,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숨쉬는 일을 포기하고 폐에게 맡기는 것이며, 우리의 의지로 심장을 움직이는 일을 멈추고 심장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알게 된다. 원래부터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숨쉬거나, 우리의 의지로 심장을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의 힘이나 의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 우리에게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가정되는 어떤 상대적 대상의 힘이나 의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존재 자체에만 근거해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세상의 그 무엇이 감히 우리를 존재하지 말라고 명할지라도, 심지어 발악할지라도, 우리의 존재 자체가 "ㄴㄴ 님 얼마든지 존재해도 됨 ㅇㅇ"라고 하면 우리는 끄떡도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카지노 게임는 어떻게 해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가? 쓰러져도 쓰러져도 대체 어떻게 또 일어나서 계속하기를 계속할 수 있는가?


그의 존재 자체가 그가 존재해도 된다고 하니 그 사실에 따르는 것뿐이다.


이 세상에 아무도 그의 편이 없다고 해도,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유일한 사실적 법칙인 존재 자체가 그의 편이니, 용사는 그 존재의 일에만 충실하다.


이것은 비유적으로 여신의 가호를 받는 용사의 모습으로 여러 서브컬쳐물에서 묘사되기도 한다. 여신은 언제나 용사를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주고 지켜주는 영원한 용사의 편으로 묘사된다. 용사는 따르기만 하면 된다. 거대하고 두려운 용과 싸울 때도 "괜찮아. 저게 당신을 멸할 수 없고 당신은 존재를 지속할 수 있어."라고 여신이 신뢰의 언약을 속삭여주니 그냥 단순하게 칼질을 하면 된다.


이처럼 용사가 자신의 존재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존재 자체가 용사의 존재를 결코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에게 무관심할 때, 그의 존재 자체만은 그를 지극히 관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사실로 살 때 '무관심 속에 살아남기'에 성공한다. 용사는 그러한 이름. 자신의 존재를 계속하기를 계속하는 이름. 존재 그 자체에 자신의 존재를 맡기고 살아 언제나 해내는 그 존재방식, 바로 그것이 용사다.


용사와 여신의 비유를 다시 떠올려, 용사는 여신에게 사랑받는 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 일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용사가 여신을 사랑하겠다고 약속해서가 아니다. 용사는 다만 여신에게 사랑받고 싶다고만 했다. 말보다 더 강력하게 그 자신의 존재를 여신에게 내어놓음으로써 그 소망을 전했다. 그리고 소망하던 그 현실을 정확하게 얻었다. 여신이 자신에게 속삭이는 그 말들만을 잘 들음으로써.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틸리히의 도움을 얻으려 한다.


틸리히는 존재가 사랑받는 현실을 '듣는다'고 하는 일과 연결지어 묘사한다. 자신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곧 귀를 연다는 것이다. 이것은 용사의 핵심적인 특성이다.


모든 용사는 귀가 열려 있다. 그의 용기란 결국 귀를 열어 들으려는 그 용기다. 용사라는 것은 곧 '듣는 존재방식'인 것이다.


이제 이렇게도 생각해보자. 더욱 본격적인 심리학적 주제다.


카지노 게임가 그의 여행길에서 끝내 만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마왕이다. 마왕은 가장 두려운 존재, 가장 존재를 거부당할 것 같은 그 불안의 모습이다.


용사는 이제 그러한 마왕을 들을 용기를 낸다. 이것은 용사가 용사로 드러나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일 것이다. 여기에서도 여신은 안내한다. 마왕이 결코 용사를 존재하지 못하게 할 수 없으니 한번 마왕성으로 향해보라고.


그리고 카지노 게임는 저 깊은 마왕성에서 만나고야 만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이것만은 절대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며 가장 강렬하게 거부해왔던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가장 큰 무관심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무관심. 이미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그것에 대해 자기 모습이 아니라며 그 존재방식을 부정하려고 하는 바로 그 무관심.


용사는 가장 무관심하게 거부되었던 자신의 그 존재방식을 향해 나아간 이, 자기가 마왕이었다는 사실에 다가가는 용기를 낸 이,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이해해보려는 용기를 낸 이다.


심리상담의 장면에서 모든 내담자는 카지노 게임라는 말은 결코 겉치레가 아니다. 상담의 핵심적인 목표를 이러한 말로 형상화해보자.


"그럼에도 존재하기."


상담은 바로 이 경이로운 존재회복의 순간을 위해 기능한다. '그럼에도 존재하기'는 물론 '계속하기를 계속하기'의 다른 표현이다.


계속되는 비유 속에서, 용사가 실은 마왕이었다는 사실이 만나졌을 때 여신은 용사를 거부할까? 그렇지 않다. 애초 용사를 마왕성으로 인도한 것은 여신이다. 여신은 오히려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마왕이어도 자신이 함께하겠다고. 마왕이라는 존재방식으로도 당신이 존재하는 일을 누구도 금지할 수 없다고, 존재 자체인 내가 그 존재를 허락한다고.


용사가 용사를 그만두어도 용사는 용사다. 용사의 여신에게는 언제나 '나의 용사님'이다. 존재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므로, 더욱더 존재 그 자체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므로, 바로 그렇게 존재 자체인 사랑 속에 계속 거하기를 택했으므로.


이 세상 모든 것이 무관심으로 가득할 때, 그렇다면 이제 내가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겠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그것은 오늘날 유행하는 히어로라고 부르는 것. 자기가 사랑을 준 만큼 언젠가는 그 보상으로 자기도 사랑받을 것이라고 믿는 길이다.


용사는 그 길을 가지 않는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무관심으로 가득할 때, 용사는 사랑받을 수 없는 자신의 존재방식을 존재 자체에로 내어놓는 길로 간다. 그럼으로써 그것이 이미 존재 자체인 사랑 속에 놓여있던 그 현실을 발견해낸다. 용기는 돌아가지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서만 정직하게 바로 간다.


카지노 게임가 계속하기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지루한 반복이 아니라 모험이기 때문이다. 결과와 이득이 반드시 있다. 생존이 불가능해보이는 그것으로도 생존할 수 있게 되며, 상황마다 계속 살아남는다. 살아남을수록 깊어져서 꺼내 쓸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며, 쓰는 방식이 더 대담하고 자유로워진다. 가용자원이 증대하고, 가용방식이 경이적인 창의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성공적인 창작자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분명하다. 그들은 불굴의 카지노 게임들이다.


그 삶의 방향성도 분명하게 달라진다. 그들은 왜 자꾸만 깊은 숲을 향하는가.


거기에 모험이 있기 때문이며, 아직 만나지 않은 자기 자신의 존재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존재방식을 만나가는 만큼 그것이 이미 허락되어 있던 자신의 존재 자체의 감동적인 실재를 또 만나게 되는 일이 아주 기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라는 그 사실이 기쁘고,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해도 된다는 그 사실이 기쁘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처럼 기쁨의 과정이 되기에, 이제는 삶의 방향성이 명확해진다. 자기 자신을 위해 기쁜 그 길로만 가면 된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만 살면 된다.


어쩌면 다시 비유를 통해 묘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용사는 여신님의 미소가 떠올라지는 그 길로만 간다. 그런데 어디로 가더라도 여신은 '나의 용사님'을 향한 그 미소를 떠올린다. 길이라는 것은 그 하나된 미소의 깊이. 용사가 든 검에 비추는 것은 용도, 마왕도, 고블린도 아니라, 언제나 미소짓고 있는 자기 자신의 얼굴. 그 하나된 얼굴. 그 얼굴을 자꾸만 보고 싶어서 길은 깊어진다. 계속하기를 계속한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기쁘게 하는 그 삶을.


아무도 관심없는 그 일을 홀로 외롭게 하고 있는가? 그럼에도 그 일을 하며 자기 자신이 충실하게 기뻤다면 완벽하게 다 한 것이다. 정말로 기뻤다고 용사의 여신님이 전해달라고 한다. 밤을 지샌 새벽의 여명으로, 몸을 뉘인 강둑의 풀벌레소리로, 그 얼굴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으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그 존재 자체가 얼마나 기뻤는지 다 전하고 싶다고 한다. 그럼 이제,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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