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리는 일 들 중 둘. 자기 확신 배우기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많이 불리고 들리는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만큼 자존감 이슈는 사람들에게 관심 있는 주제고 또 숙제 같은 존재이다. 자존감, 자신감 등등의 단어들을 들으면 여러 가지 감정이 든다. 어떨 때는 그 단어 자체에 질투가 난다. 나에게는 없는 것 같아서 더 그 단어가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없으니까 바라게 되고 바라니까 더 멀어지는 것 같다.
나에게 자존감 혹은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에 대해 강렬한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기 위해 여러 학교를 두고 1 지망 2 지망을 써야 하는데 그 당시 부모님은 어디 하나 정해주지 않으시고 나에게 정하라고 하셨었다. 나를 존중해서라기보다는 그 당시 나의 고등학교 진학 문제는 부모님에게 닥친 여러 문제들 앞에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학교 선택을 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는 부모님께 두 곳 중 하나를 정해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런 나를 보며 부모님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답답해하셨고 그 표현이나 표정의 기억은 나에게 강하게 남았다. 누군가에게는 답답하리만큼 사소한 문제를 내가 결정도 못 했다는 생각에 스스로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이후로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결심을 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선택을 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나를 더 짓눌렀다. 나의 결정을 누군가가 내려줬으면 하는 생각은 사실 책임지고 싶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결과였다. 그 사실을 처음에는 몰랐으나 나이를 먹으며, 심리학 도서를 읽으며 알게 되었다. 그것을 알게 된 순간도 참 부끄러웠다. 나는 비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 것에 대한 자기 책임. 나는 책임은 지고 싶지 않아서 혼자 결정을 하지 못하고 미룬 걸까?라는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나를 따라다녔다. 물론 모든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미루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한 행동에 대한 결과도 잘 받아들이며 살아온 순간도 많았다. 그렇지만 부정적인 피드백이 올 것 같은 상황에서 회피하고 싶었다.
왜 나는 그토록 갈등을 피하고 싶었을까? 어떤 결정을 할 때는 상대에게 거절을 해야 할 수도,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해야 하는 순간들도 존재하는데 왜 나는 그 과정을 피하고 차라리 나에게 뒤집어 씌우고 싶었을까? 그렇게 어리석은 선택 후에는 항상 후회와 자책의 과정이 동반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나는 자존감보다는 자기 확신이라는 단어가 더 공감이 되고 좋았다. 정말 너무 명확하다. 자기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것과 없는 것. 확연히 다른 세계라고 생각한다.
내가 배우지 못한 나에 대한 것 중 하나는 자기 확신이다. 나를 주로 양육하였던 분의 시선에 맞추며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나는 대부분 착하고 순응적인 사람으로 성장했다. 나의 어떤 모습이라도 사랑해 줄 양육자라는 신뢰를 가질 상황은 아니었다. 일부러 나쁘게 , 상처 주며 키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양육자의 시선이 전부이고 그 시선에 맞춰야만 칭찬받으며 사랑을 확인했던 나는 항상 상대의 목소리와 행동, 눈빛 그 안에 들어있는 함의까지 파악해야 했다. 왜곡된 안경을 쓰며 자꾸 사람을 보게 되니 이상하게 다른 사람의 표정과 말투, 감정을 읽는 데는 능숙해졌는데 정작 나의 마음을 알고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다.
나 이외의 타인은 무수히 많은데 그 타인 중 의미 있는 타인을 알 수 없으니 나와 엮인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고 좋은 감정을 심어주고 싶어서 노력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여우 같아 보이기도 하고 누구에게는 곰 같아 보이기도 하는 이상한 일이었다. 즉, 내 행동을 타인들은 자신의 상황과 감정에 따라 판단하고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부정확하고 주관적인 타인의 피드백이 마치 나인 양 살았던 시간도 존재했다. 이런 뒤죽박죽 한 시간들을 보내니 나는 자기 확신을 배울 수 없었다. 아니 배우기보다 스스로에게 시간을 주지 못했다. 내가 스스로 옳은 판단을 했다는 것에 대해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도록 객관적인 증거들이 늘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건 가능하지 않았다. 타인을 해치거나 나를 스스로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내가 스스로 하는 판단은 온전히 나의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설령 잘못되고 오류가 있다고 한들 내가 납득하고 이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타인이 나의 선택에 조언을 가장한 말들을 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항상 맞는 말을, 항상 옳은 판단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나의 가치관과 생각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나는 보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여전히 흔들리고 복잡한 상황 속에 놓여있는 문제들이 많다. 무조건 내 말이 맞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결정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그리고 타인을 만족시키지 못하더라도 (심지어 실망시키더라도) 나의 생각을 밀고 나가야 한다. 설령 틀리다고 한들 그 잘못된 판단에 대한 시간도 비용도 다 내가 지불하는 것이니 타인이 주인처럼 행세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아이에게 자립심을 가르치듯 나도 나 스스로에게 작은 일부터 결정하고 판단하기로 했다. 어떤 상황이 왔을 때 바로 대답하거나 결정하지 않고 나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내고, 내가 평소 어떤 기준과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지 자꾸 생각해야 한다. 거창하게 정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 시작점으로 나를 속이지 않는 것으로 두었다.
내 생각이나 판단이 나중에 지나고 나면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정확한 건 그 순간의 나의 생각과 판단은 내가 가장 최선의 것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카지노 게임 추천에 들든, 들지 않든 말이다. 언제나 옳은 길로 가고 싶었다. 완벽한 선택을 하고 싶은 카지노 게임 추천에 늘 나는 주저하고 고민했다. 그런데 그런 선택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나의 선택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세상은 늘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나의 의지, 의도와 상관없이 말이다. 그러니 옳은 길, 실수 없는 길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결정하는 길로 가는 것이 그나마 나를 지키고 나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내 원초적인 감각과 본능을 숨기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집중하며 나의 카지노 게임 추천과 행동일 최대한 일치하도록 나의 시간을 확보하기로 했다. 나에게 닥친 문제들과 관련성이 없다고 생각해서 늘 미루기만 했던 나의 숙제. 이 숙제는 어색하고 어려울 것 같지만 타인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하는 거니까 해 볼만 하지 않을까? 이 세상 누구도 자신을 속이지 않고 더 좋은 것을 선택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