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리는 일 들 중 셋. 미워해도 미움받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기
상대를 배려해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돌려서 표현하면 “너는 솔직하지 못하게 말하는구나. “라는 식의 이야기를 듣고, 돌려서 말하지 말라고 해서 최대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너는 사람 배려하는 말을 안 하는구나.” 이런 대답을 들어야 했다.
아버지가 간식을 좋아하셔서 간식을 사가면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 간식 같은 것만 사 오는구나. 술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술을 사가야 하나 고민하면 이렇게 말했다. “ 아버지가 술을 매일 마셔서 걱정이다.”라고 말하며 타박했다.
예전에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인기였는데 아마 미움받을 용기들이 일본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꽤나 필요했나 보다.
미움받을 용기라니, 책 제목이 꽤나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움받는데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꽤나 가슴 묵직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미움받는 것도 싫은데 그걸 굳이 용기라는 거창한 말까지 붙여서 받아야 한다는 것일까?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용기가 나에게 없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고 불편한 마음과 동시에 엄청난 끌림을 받았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아들러라는 심리학자를 알게 되었고 아들러의 심리학이 마음에 들어서 비슷한 류의 책을 한동안 읽기도 했다.
그 당시의 나는 꽤 오랫동안 어쩔 수 없는 과거의 일들, 상처들에 지배당하고 있었고 해결방법이 전혀 없는 문제들을 현실로 데리고 와 나를 꾸준히 괴롭히고 있었다. 지금도 그러한 날들, 순간들이 종종 있다. 책을 한 번 읽는다고 나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결이 비슷한 심리학 도서들을 찾아 헤맸고 도움받은 순간들도 있었지만 더 복잡해지기도 했다. 알 것 같다가도 모를 것 같은 시간들의 반복이었다.
나는 미움받는 게 너무 싫었다. 미움받고, 누군가에게 비난을 듣기 싫어서 그것들을 피해 도망 다녔다. 그 도망은 주로 상대에게 맞춰주거나 상대의 요구를 수용하는 쪽이었다. 내가 겪을 그 감정들이 싫어서 상대의 요구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상대가 나를 비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그런 류의 말들을 들을 때마다 받아치는 대신 나는 침묵 혹은 긍정을 표현했다. 당신의 말이 다 맞다고 말하면서 나는 속으로 이렇게 해결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사실 괜찮지 않았고 상처받았으며 괴로웠는데도 나는 스스로를 속였다. 괜찮다고 말이다.
적어도 무료 카지노 게임가 나를 욕하거나 비난하는 눈빛은 보내지 않았기에 나를 지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끔찍한 사실은 무료 카지노 게임는 한 번만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자주, 나에게 직접적으로 혹은 남들에게 나의 흉을 보면서 계속된 험담과 비난을 퍼부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는 내 행동과 상관없이 무료 카지노 게임가 나를 미워하고 욕하고 싶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이다. 그간 나는 내가 어떤 노력을 하면 무료 카지노 게임가 나에게 비난을 하지 않을 거라는 그릇된 희망을 품었었다. 그래서 더 노력하고 맞추려 했었다. 그런데 무료 카지노 게임는 그런 나를 자신이 컨트롤 가능한 장난감쯤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구미에 맞게 나를 조종하려 했었다.
“ 너무 무서워요”
한 번은 너무 속상하고 두려운 마음에 이렇게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나를 힘들게 한 상대는 놀라지도 않고 “내가 무섭다고? “라고 물으며 아주 잠시 말을 시작하기 전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너무 놀랐다. 내가 상대를 무섭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상처 주는 일이라 그것에 대한 비난을 듣게 되면 사과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내가 자신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기뻐한다고 생각하니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이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시간이 지나 나르시시스트에 대해 알게 되면서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나르시시스트에 대해 알면 알수록 퍼즐이 맞춰지듯 상대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라고 해도 사람이라는 존재가 타인의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타인에 의해 변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해도 나를 비난하고 저렇게 해도 나를 비난할 거라는 사실이 확신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나니 그분이 같은 행동을 해도 무조건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눈에 보였다. 그 순간도 그분이 무조건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웠다. 나와 무엇이 다르기에 저 사람들은 저런 대접을 받고 나는 이런 대우를 받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안다. 나는 그 좋아하는 사람에 낄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 안에 끼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욕먹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나는 더 비난을 받았고 깨진 독에 물을 붓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무료 카지노 게임에게 잘하려고 하고 미안해하던 모든 감정노동을 그만두었다. 처음에는 무서웠다. 내가 틀렸을까 봐. 내가 이런 선택을 한 이유로 더 큰 비난과 고통을 받게 될까 봐 두렵고 무서웠다. 그 결과 또한 묵묵히 받아들여야 하는데 쉽지 않다. 강한 기억이어서 그런가 지금도 무섭고 두려운 감정들이 버릇처럼 나에게 나타난다.
결국 나는 여러 사건들, 무수히 많은 비난을 듣고 나서 그들과 인연을 끊기로 선택하고 실행했다. 비난받는 것, 상대에게 지적당하고 그들의 지적을 듣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그리고 가능한 피하고 싶은 일이다. 그런데 삶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내가 실망을 하는 그 순간들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실망을 하는 상대가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상대의 몫인 것처럼, 나도 실망시키고 실망하는 순간들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여전히 어렵다. 그런데 안 할 수는 없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사람은 자기가 해 볼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지, 할 수 없는 일에 집중할수록 괴로워진다.
상대가 신체나 경제적 피해를 주는, 정확히는 눈에 보이는 학대를 보인 것이 아니라 나도 상대에게는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괴로운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의 기억이 맞고 내 기억이 조작된 것은 아닐까? 내 생각에 의존한 것이 아닐까?라는 무료 카지노 게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부분에서는 그럴 수 있으나 나는 내 기억과 감정들을 믿어주기로 결심했다.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고 그로 인해 겪는 감정들이 중요한 것이기에 나는 내 편을 들어주기로 했다. 자기 확신은 결국 자신이 만드는 것이니까 말이다. 지금 상황에서 정확한 건, 나는 상대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는데 상대방은 나에게 자신의 것을 들이밀며 자신을 위해 행동하길 바라며 안 할 경우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간다는 사실이었다. 상대가 가하는 괴롭힘의 정도를 피해를 본 사람이 이해해 줄 필요가 있을까?
머리 포함 무료 카지노 게임으로 알아야 한다. 욕먹을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욕하는 사람의 무료 카지노 게임까지 내가 이해해 주고 해결해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말이다.
상대의 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그 말들을 안 듣는 것은 내 선택으로 가능하다.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사실을 지금이라도 알아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