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리는 일 들 중 넷. 보풀 있는 옷들을 다 버렸다.
한 동안 미니멀리즘에 심하게 매료된 적이 있다. 잘못된 미니멀리즘에 대한 생각으로 나도 모르게 버리는 행위 자체에만 집중하였다. 그냥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그 물건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와 쓰임을 돌아보는 대신 버리는 행위 그 자체에만 빠져 버린 물건을 또 사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물건을 버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샤프심 통 하나도 다 쓰면 바로 버리는 법이 없었다. 이것으로 무언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한쪽에 두었다가 결국 버리기를 반복했었다. 다시 쓸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버리지 못했던 것은 물건만은 아니었다. 인간관계도 그러했다.
그렇게 미니멀을 숙제처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방 옆 작은 다용도실을 청소하며 쓸데없는 물건, 망가진 물건을 버리려고 내려놓다가 발의자 밑에 수북이 쌓여 있는 물건들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다시 다용도실 선반들을 보았는데 더 놀랐다. 왜냐하면 그 공간이 넓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많은 물건을 버리려고 하는데 여전히 많은 물건이 쌓여 있다는 사실을 보며 이 작은 다용도실이 이러한데 우리 집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공간을 편안하게 만들고자 하는 마음을 더 이상 미루기 힘들어 다시 미니멀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물건을 버리기로 마음먹고 유튜브로 미니멀에 대한 영상을 들으며 정리와 청소를 했다. 그런데 정리를 하면서 나에게 필요한 건 물건 정리뿐 아니라 인간관계, 그리고 나 스스로 가지고 있는 무수히 많은 생각을 버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족들에게 미니멀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 내가 주로 사용하는 공간부터 비워보자고 마음먹었다. 한 번에 모든 공간을 바꿀 수는 없으니 하나하나 시작하자는 마음이었다. 다용도실, 주방, 신발장, 옷장, 화장실 순으로 시작하여 거실, 방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쓰지 않고 보관만 하던 그릇들, 다이소에서 구매한 작은 주방 소품들, 플라스틱으로 된 보관용기들을 과감히 버렸다. 그릇이 무겁고 생김새가 복잡할수록 버리고 나서 마음이 더 가벼워졌다. 그러고 나서 내가 제일 버리기 힘든 물건들이 모여있는 옷장으로 갔다. 옷장에는 내가 사고 싶어서 샀다기보다 사고 싶은 옷을 사지 못해서 대체품으로 저렴하게 산 옷들이 가득했다. 질이 좋은 것을 사기보다는 한 철 입고 버릴 옷들을 사고는 했다. 한 번 세탁하면 보풀이 잔뜩 일어나 다시 입기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 옷들이었다. 그 보풀들을 보며 나는 조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좋은 옷들을 왜 나에게 사주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사실 좋은 옷을 사지 않은 것은 나였다. 나의 판단이었다. 살을 빼면 그때 좋은 옷들을 사야지 마음먹으며 그 옷들을 장바구니에 넣고 결제한 것은 바로 나였다. 누가 나한테 이 옷들을 입으라고 한 적도 없다. 나에게는 격식을 차리고 가야 하는 자리에 입을 옷들이 없었다. 좋은 옷, 명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깔끔하게 잘 정돈된 옷이 없다는 뜻이다. 이제 나는 나의 물건을 내가 산다.
누군가의 허락이나 지원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를 사더라도 제대로 된 걸 사는 것, 조금 비싸면 돈을 모아서 카지노 게임에 드는 걸 사는 것, 이것들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그러질 못하고 있었다. 이건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라기보다는 나에게 내가 어떤 것을 주고 있었는지의 문제였다. 그 사실을 느끼며 나는 과감히 보풀 있는 옷들을 버렸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색상의 옷들과 함께 버렸다. 안 입은 지 오래되었지만 버리고 싶지 않은 옷들을 한쪽에 모아두고 그건 추후에 고민하기로 했다. 나의 옷을 시작으로 배우자의 옷, 아이들 옷을 차례대로 정리했다. 이건 집에서 막 입을 때 입어야지, 이건 캠핑 갈 때 입어야지 했던 옷들도 다 정리했다. 옷장이 한결 가벼워졌고 옷장의 색상구성도 단순해졌다.
나는 옷을 살 때 어떤 재질의 옷을 살 것인지 결정하였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옷장을 정리하고 옷을 산 적이 없다. 예전에는 옷을 쌓아두고도 옷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옷이 적어졌는데 옷이 필요하지 않았다. 깔끔하게 세탁해서 옷걸이에 걸어두고 필요할 때 꺼내 입으면 그만이었다. 마음에 드는 옷은 자주 세탁해도 변함이 없었고, 입으면 입을수록 세탁하면 세탁할수록 더 편안해졌다. 미니멀은 인간관계와 닮아있다. 옷정리, 그릇정리도 마음과 닮아있었다. 좋은 관계일수록 단순했고 질이 좋았다. 손이 자주 가고 잦은 흔들림에도 변함이 없었다. 삶을 살아가며 나는 나와 나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 보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나는 옷장을 정리하며 나와 나의 관계,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복잡한 것들은 버리고 단순한 것들로 채우는 것이 행복이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나의 옷을 선택할 수 있듯 나에 대한 생각들, 마음, 감정들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