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신형철 <카지노 게임 공부하는 슬픔
건축학을 잘 모르면서도 글짓기는 집 짓기와 유사한 것이라 믿고 있다. 지면(紙面)이 곧 지면(地面)이어서, 나는 거기에 글을 짓는다.
- 신형철, <카지노 게임 공부하는 슬픔 -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글은 세월호 그 참사 이후에 처음만났다. 사회적 재난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모으던 중 그의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라는 표제의 글을 발견하였다. 말 그대로, 글자 그대로 발견이었다.글의 방향과 사유의 단계, 심지어 카지노 게임까지 모든 것이 닮고 싶은 전형(prototype)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생각은 딱 거기까지였고 십 년도 훌쩍 넘은 시간의 강을 건넌 후에서야그의 글을 다시 마주했다.
옛 기억을 더듬어 그의 글을 찾아 읽고자 했던 책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영화평선집이었다. 온라인 전자책 서비스에는 찾을 수 없고 병원 길에 들린 대형 쇼핑몰 지하 서점에도 재고는 없었다. 독서가 부담이 되는 변변치 못한 살림에 차선으로 골라 든 것이전자책 무료구독 중인 플랫폼에 있는<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산문집이었다. 이런저런 매체와 지면에 기고한 글과 그 시기에 적어낸 산문들을 엮은 책이었다.
사실 이 책을 집어 들기까지 적지 않은 주저함이 있었다. 이유는 표제에 수미쌍관으로 강조하고 있는 '슬픔'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슬픔은 내게 커다란 핸디캡이었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고의 배제하고 차별한 지 꽤 오랜 시간을 살아 내었다. 슬픔이라는 감정에 한치도 발을 들이기 싫어서인지 그 단어마저 외면했다. 그런데 슬픔이 중심이고 그것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자신이라니, 선뜻 책을 열어볼 수 없었다. 대안이 없는 궁색함 때문인지 이젠 대면 가능하다는 근거 미약한 자신감 때문인지 몰라도 책을 펼쳐 열었다.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라고 말한다. '바로 타인의 슬픔'이라고. 이 카지노 게임에 가슴이 덜컹 울렸다. 내가 슬픔을 부러 밀어낸 이유는 가장 소중한 것이지만 배우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작 내 가족과 아내의 슬픔에는 무심한 척 넘기면서 건너 들은 타인의 이야기와 영화, 드라마를 보면서 코끝이 찡해지곤 했다. 펑펑 울고 싶은 마음이 일어도 애써 멀리했다. 이를 두고 신형철은 다음과 같은 카지노 게임으로 내 슬픔을 마주 보라 무심히 도 권유하였다.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 신형철, <카지노 게임 공부하는 슬픔 -
슬픔을 마주하고 슬픔을 공부한다는 것은 글을 쓰고 짓는 사람에게는 슬픔을 묘사하는 일이다. 그 슬픔을 공감하여 다독일 수 있는 카지노 게임을 쓰는 일이다. 신형철은 '카지노 게임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필사의 유행같이 증명된 카지노 게임을 가져온다는말일수도 있지만, 진정한 카지노 게임은 어렵지만 중요한 타인의 슬픔에서 찾는 일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문학은 나태한 정신을 고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한다는 그의 카지노 게임이 답을 준 듯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 중 하나는 자신이 슬픔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슬픔이란 말에도 밑줄을 그으며 책을 오래간만에 깊게 읽었다. 문학과 영화, 그리고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며 성찰의 카지노 게임들이 가득했다. 서사라는 이야기 구조를 설명하며 서사란 시간의 축 위에서 ‘사건’, ‘진실’, ‘응답’이라는 기능소가 차례로 전개되는 담화의 구조물이라 설명한다. 이는 타인의 슬픔을 나의 슬픔에서 답하는 일종의 고해이자 보속의 행위다. 서사를 만드는 일은 결국 타인의 슬픔에 함께 답을 찾는 일이라는 말이다.
전자책에 그어 놓은 카지노 게임이 181개나 되었다. 이 카지노 게임들을 주욱 나열하는 것만으로 굉장한 잠언집이 될 것 같지만, 부러 이 공간에 줄 세우지 않기로 했다. 카지노 게임을 찾으려 글을 쓰는 모든 이들의 수고가 빛나는 결실이 되니까. 우리는 사실 특정한 순간에만 슬픈 것이 아니라 사실은 대체로 슬프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을 지켜 주기 위해 각자의 독서로 남겨 두고자 한다.
처음으로 돌아가 인용한 구절을 서문에서 보자마자 저장해 두었다. 한 때 '글짓기'라는 말이 제법 많은 오해로 구박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글짓기라는 표현을 쓰는 문학자를 지면으로나마 만나니 반가울 수가 없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류의 특장점이자 특이점은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에 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서사를 짓는 일이다. 이 서사는 단지 문학에 한정된 협의로 그치지 않고 법과 제도, 문화와 관습, 종교와 학문을 만들어 내었고 지금의 경제가 되는 교환의 신의를 지어 내었다. 이야기를 지어 낸다는 말이 '거짓으로 꾸며 쓴다'라는 오해에 갇혀 있는 것이 늘 안타까웠다.
내 글의 대부분은, 신형철이 이 책의 서두에서 고백한 것과 같이, 버티어 내기 위해 써 내린 것들이다. 내 삶을 이해하기 위해 무던히도 버티는 시간이었다. 엄청난 학습과 성찰의 시간이 없기에 나의 사유는 내 경험이 만들어준 지도만큼 좁디좁다. 깊이는 어떤가. 이제 오십 년 살아왔고 그중 팔 할 이상의 시간은 남들이 만든 채점표에 맞추어 깊이라곤 느낄 수 없는 얕고 얕기만 하다. 그래서 내 카지노 게임은 살아온 깊이만큼 얇고 얇은 한계 가득한 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깊이를 채울 카지노 게임들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기에 읽고, 보고, 쓰고 짓기로 한다. 제법 책 같은 책이 만들어지도록.
당분간 신형철의 카지노 게임과 책들은 내게 중요한 거소가 될 것 같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가 일상의 덧없음에 젖어들지 않기 위해 머물러 나뭇잎 사이의 햇빛을 찍어 내는 그런 한 뼘의 그곳. 신형철의 말처럼 '삶의 허무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장소, 노인이 밤마다 떠나지 못하는 그 카페 같은 곳'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