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그만두는 와중에도동료 감독들과의 관계는 계속된다. 아직 나의 장편 입봉 감독 타이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는 일은 계속하고 있다. 학생들이 연극하는 것을 보러 가는 것이나, 토론회에 참여하는 것이나. 그들에겐 장편 입봉 감독이 와주는 것이 필요한 것일 뿐, 내가 영화를 그만두려는 여부는 별 상관이 없다. 장편 입봉을 하고 나면 이래저래 강의 관련 문의가 많이 온다. 나도 두 군데 대학교 강단에 섰고, 동료 감독들도 대학이나 영화 아카데미에 강사로 나가고 있다. 그만둔 건 나 뿐인데, 나는 남을 가르치는 것을 퍽 잘 하지만 그들이 나에게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에 부담스러움을 느끼고, 영화 커리어를 은퇴하고 나서 강단에 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계약 연장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빨리 은퇴할 줄 알았으면 열심히 붙어있을 걸.
연극영화과 강사를 하고 있는 동료 감독의 초대로 졸업 연극문대를 보러 갔다. 간만에 모인 동료 감독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바를 공유했는데, 놀랍도록 비슷했다. 우리 나이가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님에도, 학생들과 세대차이를 느끼고 있었고, 가장 놀라운 점은 학교의 좋고 나쁘고의 여부와 관계없이 학생들이 너무 전형적인 영화만 만드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영화과로 손꼽히는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동료 감독 중 한 명은 최고의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느낀바과 정확히 일치했다. 왜 도발적인 영화를 만들지 않는가, 왜 도전하지 않는가.
나는 예술을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인해 대학을 상경계를 입학했고, 광고회사에 들어갔다가 그만두고 늦깎이로 영화 대학원에 들어갔다. 대학원은 나처럼 회사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들어온 사람, 영화판에 스태프로 일하다가 들어온 사람, 학부 영화과를 졸업하고 들어온 사람 이렇게 세 부류로 나위었다. 이 중에서 어떤 그룹의 단편 영화 시나리오가 가장 특이했을까? 퇴직자들이었다. 영화를 하다 온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시나리오를 썼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영화제에 가기 위해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이 선호할 만한 것을 써야한다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 영화제에 나가본 적도 없고, 단편 영화가 영화제에 가지 못하면 커리어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 회사 퇴직자들만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썼다. 그러니 세대차이가 아니다. 원래부터 그랬고,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들은 영화제에 나가기 위한 영화를 만드느라 비슷한 영화들만 쓰는 것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거다.
이는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탓이 크다. 부산과 전주에서 선정하는 영화들은 단편, 장편 모두 비슷하다. 영화제용 영화가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렸다. 부천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영화제 역사가 길어질수록 점점 전형성을 띈다. 초기 부천 영화제의 영화들은 정말 어디서도 보도듣고 못한 특이한 영화들이 많았다. 완성도보다 특이성에 점수를 더 준 모습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완성도 높은 장르 단편 영화를 더 뽑아준다. 그래서 단편 영화가 완성되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건 부산용이네', '이건 전주용이네', '이건 부천용이네' 라는 피드백이 매우 쉽게 나온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이 감독만 할 수 있는, 감독의 비전이 독특한 영화의 경우 천대받는다. 너 어쩌려고 니 꼴리는대로 영화를 만드냐는 피드백이 나온다.
이런 문화를 만든 것은 한국 영화시장이다. 우리나라는 2차 시장이 애초에 없었고, 가장 큰 극장 프랜차이즈가 대기업 소유이고, 그 대기업이 직접 투자 배급 제작을 하는 수직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기업이 상품 만들듯이 영화를 고른다. 아이폰이 나오고 나서도 피처폰을 만들고, 네비게이션을 만들던 대기업의 그 방식이다. 절대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는 의사결정 구조라는 것이다. 상업 영화를 하겠다고 시나리오를 쓰면서부터 나도 어느덧 틀에 박힌 영화만 쓰기 시작했다. 이런 영화는 투자가 안 된다는 소리를 수백번 듣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나는 대학원 시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영화를 만드냐는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불만이 쌓여 정말 오랜만에 모든 틀에서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영화 시나리오를 써보겠다고 야심차게 썼던 시나리오는, '이런 영화는 투자 안 된다' 소리와, '감독님 첫 번째 영화 성공하고 나면 두 번째 영화로 만드세요'라는 말만 들었다. 대기업의 의사결정이 그렇다. 성공한 감독에겐 관대해진다. 새로운 영화를 만드려는 노력이 절대 결실로 이어질 수 없는 상태에서 누가 새로운 걸 하려고 하겠나. 학생들은 바보가 아니다.
세계 최대 영화시장인 미국은 화수분처럼 거장 감독들이 매년 나오는데 이는 2차 영화시장의 덕이다. DVD시장을 노린 저예산 영화는 독특한 영화를 만드는게 가능하다. 하지만 미국도 OTT때문에 2차 시장이 없어졌고, 내리막을 걷고 있다. 2차 시장을 없앤 넷플릭스와 아마존이 예전과 다르게 더이상 특이한 저예산 영화에 투자하지 않고 기성 감독의 초대형 프로젝트에만 투자하고 있는 점도 내리막에 일조하고 있다. 자본논리를 따르면 신입을 뽑으면 손해다. 회사에 이득을 주기까지 평균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3년 동안 투자비가 들어가는 거다. 경력직을 뽑으면 바로 회사에 이득을 준다. 그렇게 경력직만 뽑다보면 저연차가 비게 된다. 피라미드의 밑바닥이 붕괴되면 피라미드는 무너진다.인력의 신규 유입이 없으면 그렇게 산업이 붕괴한다.
코로나 발발 직전에 한국 영화는 기생충이라는 걸작과 함께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감독과 번역가가 인터뷰에서 신인 감독이 기생충 각본을 썼다면 투자가 되지 않았을거라는 점을 지적했을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한국 영화 시장의 붕괴는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고, 코로나가 이를 조금 앞당긴 것 뿐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의견에 동의한다. 아무도 새로운 것에 도전하지 않는 시장은 망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영화를 하겠다고 뛰어드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건, 어차피 망한 시장이니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고 본인만의 영화를 만들어 보라는 거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거면,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는게 답이 될 수가 있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