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를 하나 꼽자면 '검증'이 아닐까 싶다. 검증이 되지 않았다는 말. 나는 이 말이 매우 폭력적이라 생각한다. 어떤 측면에서 검증이 되지 않았는지 논리적으로 정반합을 거쳐 쓰는 경우는 거의 없고, 거절의 사유로 인사할때 안녕하듯 쓰는 경우가 많이 때문이다. 언제나처럼 개별 영화를 비판하거나 특정인을 비방할 의도는 전혀 없고, 산업 자체에 대한 비평이니 오해없으시기 바란다.
최근 개봉한 세 편의 한국영화는 한 편은 속편, 한 편은 스핀오프, 한 편은 리메이크다.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를 보면 오리지널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다. 웹툰 원작, 소설 원작, 외국영화 원작이거나 속편이다. 내가 쓴 오리지널 스크립트를 볼 때마다 제작사나 배급사들은 온갖 이유를 대가며 계약을 해주지 않았고, 투자사가 '검증된' 작품을 찾는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검증이란 위와 같이 원작이 있는 작품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작이 있는 작품을 선호하나? 그렇지가 않다. 통계만 놓고 보자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리지널 영화를 선호한다. 압도적이다. 통계가 이미 나와있는데도 원작이 있어야 '검증'된 거라고 한다면, 도대체 그 검증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웹툰이 재밌다고 해서 그 웹툰으로 영화를 만들면 재밌을거라는 논리의 근거는 도대체 뭔가. 없다. 근거가 없는 검증을 논한다. 내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검증되지 않았다고 하면, 나보고 부존재의 증명을 하라는 소리밖에 안 된다.
신인감독을 쓰면 투자가 잘 되지 않는다며 '검증'된 감독을 써야한다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연출을 조건으로 각색을 하면서도 한 번도 연출계약을 체결하지 못했다. 각색을 잘 해서 캐스팅까지 성공해 감독까지 패키징 해 투자사에 심의를 넣을때 신인감독 리스크 때문에 반려가 되면 언제든 자를 수 있도록 연출계약을 미리 체결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비방할 생각으로 말하는게 아님을 밝힌다. 최근 강풀 작가의 웹툰원작 무빙이 잘 되자 디즈니는 강풀 작가의 다른 웹툰에 대대적인 투자를 해서 '조명가게'를 공개하였다. 연출자는 김희원 배우님이다. 김희원 배우님은 조명가게 이전에 영화나 시리즈를 찍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검증'된 연출자 취급을 받는다. 무엇이 검증된 걸까? 140억이 투입된 텐트폴 영화 '황야'의 감독은 허명행 무술감독이다. 허명행 감독은 이전에 영화나 시리즈를 연출한 적이 없다. 무엇이 검증된 걸까? 왓챠 오리지널 시리즈 '사막의 왕'은 김보통 작가가 연출을 맡았다. 김보통 작가는 사막의 왕 이전에 영화나 시리즈를 연출한 적이 없다. 무엇이 검증된 걸까?
작가도 마찬가지다. 오리지널 스크립트를 쓰고 연출을 해서 극장개봉까지 했음에도 시리즈 계약을 논의하면서 말도 안되는 계약조건을 요구받았다. 내가 시리즈를 써본 적이 없으니 리스크가 크므로 말도 안되는 조건을 받아들이라는 식이었다. 회당 500만원 고료에 계약기간을 4년을 하자는 둥 다 말도 안 되는 조건들이었다. 내가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다. 드라마 극본을 쓰는게 영화 시나리오 쓰는 것보다 어렵다는 소리냐고 되물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라며 손사레를 쳤다. 그럼 영화 각본 크레딧도 있고 각색 경험도 있는 내가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는 오로지 내가 시리즈를 안 써봤기 때문이냐고 물었다. 보통 이 질문을 하면 계약은 나가리가 된다. 그들이 계약조건을 바꿀 생각은 애초에 없고, 나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저 질문을 통해 하는 거니까. 'DP'의 극본은 김보통 작가가 썼다. 김보통 작가는 이전에 한 번도 시리즈 극본을 써본 적이 없다. '무빙'의 극본은 강풀 작가가 썼다. 강풀 작가는 이전에 영화 괴물2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다고 하지만 제작되지 않았고 고로 크레딧이 없다. 시리즈는 써본 적이 없으므로 '무빙'은 강풀 작가의 첫 극본이자 크레딧 작이다. '대도시의 사랑법' 시리지의 극본은 박상영 작가가 썼다. 박상영 작가는 본인의 책으로 시리즈 극본을 쓰기 전까지 한 번도 극본을 써본 적이 없다. 웹툰 스토리를 쓰고 소설을 써본 사람이 영화 시나리오를 써본 것보다 시리즈 극본을 쓰기에 더 검증된 걸까?
오리지널 스크립트를 써서 국가나 기관에 투자를 받아 영화를 찍어 극장 개봉을 한 나와 내 주변 감독들은 모두 검증되지 않은 인재들이라 일이 없다. 영화감독이 되려면 웹툰을 그려서 성공하는게 더 빠를 수 있다는 자조적인 농담도 한다. 영화산업은 신인감독에게 끊임없는 검증을 요구한다.웹툰을 잘 그리지도, 소설을 잘 쓰지도, 연기를 잘 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검증을 해야할까. 무얼 해야 검증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무슨 검증을 해야하는지를 모르는데,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