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말고 다른 일을 해보기 위해 열심히 취업사이트를 뒤지고 이력서를 두 곳에 냈다. 현재 산업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알려면 취업사이트에 들어가보면 된다. 연출, 영상제작 쪽에 들어가면 100개중 99개의 회사가 유튜브 영상 제작 회사이거나, 유튜브 크리에이터 채널이다. 유튜브가 그만큼 대세인 뜻이기도 하고, 다른 산업이 그만큼 쪼그라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광고일을 때려치고 영화를 하겠다고 이 바닥에 들어와 9년을 굴렀다. 10년을 해보고 안 되면 포기하자고 했는데, 내가 포기하기 전에 산업이 먼저 망했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나는 9년 동안 경력이 단절된 것이거나, 너무 과스펙이거나, 나이가 많다. 대기업에 명문대에 석사에 이력서가 아무리 화려해도 나이가 많으면 점수가 깎인다.
그래서 이력서를 넣고도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붙을 확률보다 떨어질 확률이 훨씬 높다고 생각했으니까. 내 입사지원 소식을 들은 주변인들은 그래도 연출직이면 장편영화 찍어본 사람 뽑고 싶지 않겠냐며 돈을 건다면 합격쪽에 걸겠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오늘 두 곳 중 한 곳이 발표가 났는데 서류전형에서 탈락했다. 내 예상이 맞았다. 성장가능성에 더 우선순위를 두고 뽑았다는 탈락 안내 메일 문구가 눈을 때린다. 불혹은 더이상 성장할 수 없는 것인가. 아직 역도 기록도 늘고 있는데.
한국에서 손꼽히는 제작사로부터 3개월만에 시나리오 피드백을 받았다. 사실 피드백은 아니었고, 나를 만나주지 않는 이유를 간략하게 들은 정도다. 대형 제작사가 신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 놀라운 반응은 아니었다. 그냥 궁금해졌을 뿐이다. 어떤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말이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감독만 만나는 것인가,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감독만 만나나, 어떤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할텐데 내가 아는건 인맥밖에 없다. 내 주변 동년배 감독 중에 상업 입봉에 성공한 감독은 다 인맥이었다. 학부 때 동아리 선배가 제작사 대표라던가, 학부에서 선생과 제자로 인연을 맺었다거나. 그런거 말고 다른 기준은 무엇일까. 존재하기는 할까.
별 기대를 안 해서인지 실망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내가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굉장히 낮아진 것 같아서. 공교롭게도 영화 감독들을 인터뷰한 책을 읽고 있고, 인터뷰 라는게 좋은 얘기만 골라서 편집한 거라는 걸 알지만 영화감독들의 자기 확신에 찬 글들을 읽자니 지금 내 모습이 더 비참했다. 내가 무엇을 해낼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지 않게 되었구나.장작만 넣으면 다시 타오르는 불씨가 남은 줄 알았는데, 계속되는 실패로 나는 점점 젖고 있었구나. 젖어버린 장작을 살리려면 오랜 시간 건조를 해야한다. 건조를 해서 다시 쓰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니 보통 장작이 젖으면 버린다. 스스로를 버릴 수는 없잖아. 뭐라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스스로에게 어떻게 설득시켜야 하는거지. 퇴색하기 싫어하는 희나리 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