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를 위해서 펼친 노트북은 정신 차려 보니 중고등학교 시절 쓴 동성애 소설을 비추고 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보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 소설들은 내게 한 가지 깨달음을 주었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는 깨달음을. 학창 시절 내내 써왔던 사랑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남자와는 연애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쓴 소설을 우연히 다시 읽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여중 여고를 다니면서 동성애 비스무리한 것은 여러 번 있었다. 여학교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짧은 머리를 하고 남자처럼 터프한 구석이 있어 인기 있는 부류와의 유사 연애를 해보지 않은 여학우는 없을 것이라 단언한다. 나 또한 나를 유독 챙겨주던 숏컷 여자애와 얼마간 각별한 사이로 지낸 적이 있었는데, 급기야는 서로를 '반쪽'이라 칭하며 정말로 연애 비슷한 것을 했었다. 손을 잡거나 가벼운 포옹을 하는 등 귀여운 스킨십이 동반된. 우리는 '진짜 레즈비언'으로 학교에서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끝으로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나는 그 이후 또 다른 숏컷 여자애와 유사연애를 하기도 했는데, 그때가 되어서야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다. 그 여자애를 보고 가슴이 뛰거나 열렬히 사랑해서가 아니라 반복되는 동성과의 유사 연애 사실 그 자체 때문이었다. 물론 그 혼란은 남자 아이돌 가수를 보거나 드문드문 있던 남소로 일단락되긴 했다.
그랬던 내가 나의 졸작들을 보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레즈비언 커뮤니티를 찾는 것이었다. 남자와 연애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은 곧 여자와의 연애 시작을 알리는 것이라는 아주 단편적인 사고의 결과물이었다. 커뮤니티 속에는 내가 모르는 용어들로 가득했다. 잠시 어지럼증을 느낀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인터넷 창을 꺼버렸다. 그들만의 세계가 있구나. 사랑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웃기는 일이었다.
며칠을 커뮤니티 속에서 살면서 대충 레즈비언 감투는 쓸 수 있을 정도가 됐을 때 나는 구애의 글을 올렸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여자의 성향이 더 강한 팸이었고 남자의 성향이 더 강한 부치를 구해야만 했다. 치밀하게 계산된 글을 올리며 또 한 번 의문이 들었다. 마치 짝짓기를 위해 카지노 가입 쿠폰 춤을 춘다는 어느 새가 떠올랐다. 나는 어설프게 춤을 추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한 여성을 만났다. 짧은 머리를 한 그 여자는 여자라고 말하지 않으면 남자로 보일 법한 차림새였다. 처음 만나자마자 레즈비언 바로 유명하다는 술집으로 향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모르는 이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나는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았다. 특히나 내가 남자와의 연애를 억지로 했다는 부분에서 큰 감명을 받은 제스처를 취했다. '억지로'라는 부사는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술집에서 나올 때쯤에 나는 그 여자와 손을 잡고 있었다. 우리는 그 길로 헤어졌고, 연락이 이어지진 않았다. 아마 나는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던 듯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여성을 만났다. 직전에 만났던 여자와 비슷한 차림새였다. 양팔에 문신이 가득한 그 여자도 역시 내게 술을 먹였다. 술을 먹지 않으면 대화가 불가능한 부류인가? 나는 그 여자와 마주 앉아 술을 나눠 먹으며 생각했다. 나는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 꽤 먼 거리의 도시로 향했는데, 우리는 그날 모텔에서 함께 잤다. 처음 여자와 혀를 섞으며 생각했다. 나, 정말로 '억지로' 남자와 연애를 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