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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민 Feb 10. 2025

희미해진 나를 선명하게 만드는 일: 카지노 게임

도쿄 카지노 게임을 다녀오다

지난주 도쿄로 카지노 게임을 다녀왔다. 4박 5일의 일정 동안 혼자 떠난 카지노 게임이었고, 혼자 떠난 해외카지노 게임은 무려 14년 만이었다. 그 사이 동안 국내 카지노 게임은 혼자서 몇 번이고 떠났지만 뭐랄까 완전히 일상에서 벗어난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뭔가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 내 뒤에서 눈을 가리고 ‘나 누구게’ 하는 형국이었다.


‘누구냐 넌’,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 떠난 걸까. 휴식을 위해서라고 믿고 떠나기엔 점점 귀찮은 나이가 되어가고 있고, 일상에서 해방된다는 느낌을 갖기엔 내가 무엇에 묶여있는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카지노 게임을 통해서 깨달았다. 나를 묶어왔던 것은 효율, 계획, 보상, 경쟁과 비교, 발전 같은 것들이었다. 마치 이것들은 나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 외의 것들에 더 집중하게 만든다. 내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불투명하고 흩어지고 있는 지경에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 왕은 지키지도 못하고, 상대방의 체크메이트만 노리고 있는 체스판 위에 서 있는 것 같다.


혼자 해외카지노 게임을 가는 것이 괜히 돈만 쓰고 오는 건 아닐까. 정보는 넘쳐났다. 거기에 나를 구미 당기게 하는 것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떠나는 게 두렵고 귀찮은 걸까, 그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반발심이 생겨 떠나게 됐다. 이렇게 주저앉아서 늙는 것만 기다리는 것 같아서 나 자신이 비참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선명해졌다. 일본에 도착해서 공항을 떠나며 점차 한국말이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낯선 공기를 마시고 무언가 하늘이 다르다고 느꼈을 때, 길을 걷는 사람들의 표정이 다르고, 거리가 비슷하면서도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이색이라기보다 이질적인 뭔가. 그때 알 수 없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내가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타국의 카지노 게임자라는 자각이 들었다. 나는 해야 하는 일이 정해져 있지 않았고, 내게 주어진 일이라곤 그저 걷는 것이 전부였다. 내게 체크리스트나 카지노 게임 계획조차 없었고, 심지어 숙소도 하루치만 예약해 놓은 상태라 미션이 있다면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그 숙소에 도착해야 하는 것?


나는 걸었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지 않았다. 누군가를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더 ‘잘’ 해야 하는 것이 없었다. 책임도 실패도 없는 세계에 발을 딛었더니 마음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첫날은 우에노 지역을 하루 종일 걸어 다닐 생각이었는데, 화장실이 급해서 들어간 지하철에서 에라이하고 열차를 타버렸다. 일본 지하철은 노선이 굉장히 복잡했다. 나는 지하철 노선이나 교통편을 공부하는 대신, 환승 없이 갈 수 있는 최대치까지 가서 걸어갔다. 걷다가 여기가 어딘지 모르면 다시 지하철을 탔다.


내가 해야 하는 행동은 단순하고, 명료해졌다. 나는 본능에 귀 기울이고, 그것에 따랐다. 한국에 돌아와서 보니 그 본능들에 내가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젠가부터 카지노 게임도 뭔가 얻고자 하고 효율적으로 동선을 짰던가. 그것은 카지노 게임이 아니라 관광이었고, 내게는 더 이상 관광은 필요치 않았다. 어릴 때를 생각해서 숙소도 게스트하우스로 잡고 거기 있던 친구들과 어울려 맥주를 마셨다. 20년 전의 인도카지노 게임이 떠올랐다. 더 원색적이고 본능에 충실했으며 책임과 의무가 덜했던 나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하루 2만 보. 걷고 힘들면 거기가 어디든 앉아서 쉬고, 카페가 보이면 들어가서 라테를 한 잔 마시고, 청과점이 보이면 귤을 한 봉지 사서 그걸 까먹었다.


나를 찾기 위해서 뭔갈 해야 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위하지 않고 본능에 충실하니 내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뭔가가 망설여질 때는 ‘지금 내게 무한한 시간이 주어졌다면?’이라고 생각하고 결정했다. 더 많은 걸 보는 게 아니라 더 자세히 보는 걸 택했고, 더 느긋해졌고 현재에 집중할 수 있었다.


돌아갈 날이 되어서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카지노 게임하는 것처럼 삶을 유영할 수 있을까. 발보둥치지 않고 자유롭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그 질문에 뚜렷한 답을 내릴 수 없었지만, 언젠가 내가 흐릿해진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떠나면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리는 어디에 도달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어디에서 떠나가는 삶을 사는 건 아닐까.

죽음을 향해 가는 게 아니라, 태어난 에너지가 나아가는 방향을 따르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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