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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벼리 Apr 16. 2025

아이의 카지노 쿠폰 받지 못한 날

엄마 아빠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다 그렇듯,오후 3시 무렵은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간이다. 오전에 발생한 현안이나, 진행 중인 이슈에 대하여 현재 상황을 점검하고 오늘어디까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논의하거나 한창 관련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을 시간이니까.


어제도 가장 바쁜 그 시간, 그냥 평범하게 업무 중이었는데 협업부서에서 잠시 몇 가지만 간단히 확인해 달라며 찾아왔다. 사소한 내용들이라 회의실로 옮길 필요도 없길래, 그 자리에서 파티션에 기댄 채 15분 정도 짧게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다시 의자에 앉고 보니, 휴대전화에 부재중 전화가 4통 있다는 알람이 보였다.


아침에 스마트워치를 깜박하고 안 차고 나왔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황급히 부재중 전화 목록을 살펴보니 전부 아이였다. 이 시간이면 피아노 학원에 가 있을 시간인데 얘가 왜 전화를 한 거지, 갑자기 심장 박동수가 빠르게 치솟았다.


곧장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휴대전화연락처 목록에서 피아노 원장님 번호를 찾았지만 없다. 아, 피아노 학원은 남편이 휴직 중일 때 등록해서 남편이 연락처를 가지고 있었지.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4번쯤 들렸을 때, 그냥 종료버튼을 누르고 인터넷 창을 열었다. 검색이 빠르겠다.


그때, 아이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다짜고짜 소리쳤다.


"왜, 왜! 무슨 일이야?"

"엄마아, 왜 카지노 쿠폰 안 받아. 히끅."


아이는 울음 끝의 딸꾹질과 함께 전화를 받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연한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의 용건은 터무니없이 별일이 아니었다. 학원에 들어서자마자 손에 묻은 초콜릿이 하얀 새 블라우스에 묻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를 했단다. 그런데 엄마가 무려 네 번이나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고, 그래서 아빠한테 전화를 했는데 아빠도 두 번이나 전화를 안 받았다고 했다. 갑자기 불안하고 서러워져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고. 어쩌다 보면 새옷에 초콜릿을 묻힐 수도 있고, 엄마 아빠가 바쁠 때는 잠시 전화를 못 보고 있을 수도 있는 거니, 걱정 말고 학원 끝나면 집에 가라고 이르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퇴근 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두 볼을 잔뜩 부풀린 아이가 팔짱을 야무지게도 끼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별이 왜 이렇게 심통이 났지?"

"나 정말 화가 났어. 어떻게 내 카지노 쿠폰 안 받을 수가 있어?"

"엄마아빠가 전화 안 받아서 아직도 화가 났구나?"

"한 번도 아니고 말이야. 엄마가 네 번 안 받고, 아빠는 두 번이나 안 받고. 엄마 아빠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무 바빴어, 미안."

"내가 얼마나 걱정했겠어?"

"엄마아빠는 회사에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해."

"전에 엄마아빠도 내가 전화 안 받으니까 막 화내고, 걱정하고, 스마트 워치 꼭 차고 다니라며. 근데 엄마는 워치도 안 차고 다니고, 내가 걱정된다는데 왜 무시해!

"... 미안해. 앞으로는 꼭 워치 차고 다니고, 전화도 잘 받도록 할게."


아, 졌다. 네 말이 구구절절 맞다. 아이에게 이만큼을 요구했으면, 부모도 그만큼을 지켜줘야지. 오늘은 완벽한 우리 부부의 실수다. 게다가 내가 저를 혼낼 때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하며 종알대는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사과의 말과 함께 그저 한참을 꼬옥 끌어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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