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 존재와 진실적 존재
이제 제3장으로 들어가 봅시다. 이번 장의 제목은 ‘상들의 살아남음에 대하여 : 기억과 정신’이에요. 제목처럼, 이번 장에서는 ‘기억’과 ‘정신’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논의합니다. 이번 장에서는 기억이 현실화될 때, 어떤 과정들이 벌어지는지 그리고 그때 뇌는 어떤 작동 원리에 따라 특정한 운동을 구성해 내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어요. 일단,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전반적인 문제의식을 한 번 살펴봅시다.
베르그손은 비단 『물질과 기억』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저서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 있어요. 그것은 ‘현실적 존재’와 ‘진실적 존재’ 사이의 관계 규명이에요 ‘현실적 존재’와 ‘진실적 존재’는 분명 다르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를 구분하지 못하죠. ‘현실적 존재’와 ‘진실적 존재’를 같은 것이라고 여기니까요. 컴퓨터가 하나 있다고 해 봐요.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그 컴퓨터는 분명 ‘현실적 존재’죠. 그런데 그 컴퓨터를 ‘진실적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시력을 잃은 이들에게 그 컴퓨터는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존재하지 않은 것이잖아요. 또한 태어나서 한 번도 컴퓨터를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도 (그것을 보고 만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컴퓨터는 없는 것이잖아요. 전자는 컴퓨터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고, 후자는 컴퓨터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죠. 이처럼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현실적 존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진실적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죠.
베르그손은 왜 자꾸 ‘뇌’와 ‘기억’을 구분하려고 하겠어요? ‘뇌’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기억’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잖아요. ‘뇌’와 ‘기억’을 구분하려는 집요한 노력은 결국 ‘현실적 존재’와 ‘진실적 존재’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노력인 셈이죠. 지금까지 다루었던 베르그손의 논의들을 되짚어 봐요. ‘뇌와 기억’, ‘신체와 정신’, ‘물질과 상’에 관한 논의였잖아요. 이는 모두 ‘현실적 존재(뇌·신체·물질)’와 ‘진실적 존재(기억·정신·상)’를 규명하고, 그 둘 사이의 관계성을 규명하려는 시도인 거죠.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제3장을 시작해야 돼요.
제3장은 ‘순수 기억’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돼요. ‘순수 기억’은 ‘현실적 존재’겠어요? ‘진실적 존재’겠어요? ‘기억’이라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잖아요. 앞서 논의했듯이, ‘기억’은 ‘신체’ 즉, ‘뇌’라는 ‘물질’ 안에서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명료하게 보거나 만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기억’은 ‘상’이 ‘정신’ 속에 포착되는 ‘진실적 존재’죠. 이러한 논점을 바탕으로 ‘순수 기억’, ‘상 기억’, ‘지각’의 관계성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순수 기억-상 기억-지각’의 관계
우리는 순수 기억,상 기억,지각이라는 세 항을 구별했으나 사실상 그중 어떤 것도 게다가 고립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지각은 결코 정신과 현재 대상의 단순한 접촉이 아니다.지각에는 항상 그것을 해석하면서 완결시키는 상 기억들이 배어 있다.『물질과 기억』앙리 베르그손
앞서 우리는 “순수 기억, 상 기억, 지각이라는 세 항을 구별”했죠. 하지만 “사실상 그중 어떤 것도 고립적으로 일어나지” 않죠. 즉, ‘순수 기억’, ‘상 기억’, ‘지각’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거죠.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다고 해 봅시다. 그때 우리는 “어, 미경이네”라며 그 친구를 ‘지각’하겠죠. 이 ‘지각’은 ‘순수 기억’과 ‘상 기억’과 상관없이 고립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죠.
흐릿한 ‘순수 기억(무의식)’이 명료한 ‘상 기억(의식)’으로 떠올랐기 때문에 그 친구를 ‘지각’할 수 있게 된 거잖아요. 그러니 ‘지각’은 “결코 정신과 현재 대상(동창)의 단순한 접촉”으로 발생하는 일이 아닌 거죠. ‘상 기억’은 ‘순수 기억’으로부터 오고, ‘지각’에는 항상 ‘상 기억’이 배어 있어요. ‘상 기억’이 “현재 대상(동창)을 해석하면서 완결시키기” 때문이죠. 이러한 ‘지각’의 과정을 ‘상 기억’을 중심으로 보면 어떨까요?
‘상 기억’은 시발적 지각이다.
상 기억 쪽에서 보면,그것은 자신이 구체화하기 시작하는“순수 기억”과 자신을 구체화하는 지각에 동시에 참여한다.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상 기억은 시발적 지각perception naissante으로 정의될 것이다.『물질과 기억』앙리 베르그손
‘상 기억’은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이에요. ‘상 기억’의 능동성은 ‘순수 기억’과 관계돼요. 우연히 동창을 만나면 가물가물한 기억(순수 기억) 속에서 그 친구와의 추억을 “자신이 구체화하기 시작”해야 하잖아요. 이 작업은 스스로 해야 하는 작업인 거죠. 그렇다면 ‘상 기억’의 수동성은 무엇일까요? 이는 ‘지각’과 관계돼요. ‘순수 기억(미숙·미자·미연…)’이 ‘상 기억(미경)’화 되면 그 친구가 ‘지각’되잖아요. 그러면 이제 그 친구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거나 과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죠. 이는 ‘상 기억’이 수동적으로 “자신을 구체화하는” 과정인 거죠.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상 기억은 시발적 지각”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죠. ‘시발적naissante’은 ‘막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의미잖아요. 그러니 ‘상 기억’은 이제 막 나타나기 시작하는 ‘지각’인 거죠. ‘순수 기억’이 ‘상 기억’화 될 때, 동창의 ‘지각’(미경이네)이 막 나타나기 시작하게 되는 거니까요. 반대로 ‘순수 기억’이 ‘상 기억’화 되지 않는다면, 그 ‘지각’은 나타나지 않게 되겠죠.
순수 기억
마지막으로 순수 기억은 아마도 권리상으로는 독립적이겠지만,보통은 그것을 드러내는 색채가 있는 생생한 상 속에서만 나타난다.『물질과 기억』앙리 베르그손
‘순수 기억’은 어떨까요? ‘순수 기억’은 독립적으로 보존되죠. 우리가 살아오면서 쌓아왔던 기억 전체는 무의식 어딘가에 독립적으로 보존되어 있잖아요. 하지만 순수 기억의 독립성은 권리상의 문제일 뿐이죠. 운전면허를 따면 권리상 독립적으로 운전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은 아니잖아요. 누군가의 도움(운전 연수)을 받아야지만 운전을 할 수 있잖아요. ‘순수 기억’도 마찬가지예요.
‘순수 기억’은 권리상으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드러나려면 “색채가 있는 생생한 상”을 통해서만 가능하죠. 이 ‘상’은 어떻게 포착되나요? 바로 ‘상 기억’과 ‘지각’을 통해서죠. 어떤 대상을 ‘지각’하고 ‘상 기억’이 떠오르는 과정을 통해 지금 내 눈앞에 생생하게 있는 ‘미경(상)’을 포착하게 되는 거잖아요. 즉 ‘순수 기억’이 권리상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지각’과 ‘상 기억’을 매개한 상태로만 드러날 수 있는 거죠.
결국 “순수 기억, 상 기억, 지각이라는 세 항 중 어떤 것도 고립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죠. 이들은 서로 매개하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죠. 이 관계성을 정리해 봅시다. ‘지각’은 언제나 ‘상 기억’을 토대로 재구성되죠. ‘상 기억’은 ‘순수 기억’을 구체화하면서 ‘지각’을 향해 나아가죠. ‘순수 기억’은 독립적으로 보존되지만, 구체적으로 ‘상 기억’을 통해 드러나며, 언제나 ‘상 기억’으로 구체화 되기를 기다리고 있죠.
우리가 지금 무엇인가를 ‘지각’한다는 것은 그 외부 대상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죠. 우리의 기억 가장 심층부에 있는 ‘순수 기억’ 중 일부가 구체화 되어 ‘상 기억’이 되고, 이를 토대로 ‘지각’이 형성되는 거죠. ‘너’가 아름다운 존재로 ‘지각’될 때도, 짜증 나는 존재로 ‘지각’될 때도 있죠. 흔히 이를 모두 ‘너’로 인해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이는 삶의 진실을 모르는 무지일 뿐이죠.
‘일체유심조’의 의미
우리의 ‘순수 기억’이 무엇이고, 그 ‘순수 기억’ 중 어떤 기억이 ‘상 기억’으로 구체화 되는지에 따라 ‘너’가 아름다운 존재로 ‘지각’될 수도, 짜증 나는 존재로 ‘지각’될 수도 있는 것이죠. 외부 대상(너)은 분명 어떤 ‘지각’을 촉발하겠지만, 그 촉발된 ‘지각’이 어떤 ‘지각’이 될지는 우리의 ‘기억’(순수 기억·상 기억), 즉 마음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죠.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바로 이런 것이죠.
‘일체유심조’란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닐 거예요. 만약 그렇다면 세상에 불행한 이들은 한 명도 없겠죠. 불행하게 살고 싶은 마음을 갖거나 혹은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일체유심조’에서 말하는 ‘마음心’은 ‘순수 기억’과 그로 인해 구체화 되는 ‘상 기억’을 의미하는 거예요. 우리가 살아오면서 켜켜이 쌓아왔던 ‘흐릿한 마음(순수 기억)’과 그로 인해 촉발되는 ‘분명한 마음(상 기억)’을 의미하는 걸 거예요. 이 ‘마음’에 의해서 모든 것이 다르게 ‘지각’되는 거죠. 그러니 ‘마음’을 다르게 먹는 일은 아주 고되게 어려운 일이겠죠.
진정한 의미에서 ‘일체유심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구체적으로 말해, 짜증 나는 ‘너’를 아름다운 ‘너’로 ‘지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순수 기억’과 ‘상 기억’을 바꾸어야 해요. 아주 긴 시간 쌓여왔던 ‘흐릿한 마음’을 되짚어 보려고 애를 쓰고, 매 순간 짜증 나는 세계가 아닌 아름다운 세계로 ‘지각’할 ‘기억’을 쌓아 나가야 해요. 그렇게 ‘순수 기억’을 재구성해서 구체화 될 ‘상 기억’을 바꿔야 해요'
그 지난하고 고되고 어려운 과정을 지난 후에야 비로소 ‘일체유심조’가 가능해질 거예요. 이는 마치 역겨운 냄새가 나는 염소 치즈를 맛있게 먹게 되는 것과 비슷할 거예요. 염소 치즈가 역겨운 이유는 단지 내가 한국에서 자랐기 때문임을 깨닫고, 좋은 친구들과 함께 염소 치즈를 먹는 기억을 쌓아갈 때, 어느 순간 염소 치즈가 맛있게 ‘지각’되잖아요. 짜증 나는 ‘너’ 역시 그렇게 아름다운 ‘너’로 ‘지각’되게 될 거예요.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마음을 바꿔 먹는 것이 더 쉽다’ 흔히 하는 말이죠. 이보다 바보 같은 소리도 없어요.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한 번도 바꿔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이는 그저 현실적 패배주의이거나 패배적 현실주의일 뿐이죠. 진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바꿔본 적이 있는 이들은 모두 알고 있어요. ‘마음’을 바꾸는 것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 더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삶의 진실을요. 세상을 바꾸려면,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바꿀 수 있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