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처녀막은 없다.
접수창에 10대 등장, 긴장된다. 출처: 픽사베이
*제가 진료실에서 직접 겪은 일들을 글로 담고 있습니다만, 환자 보호를 위해 개인 정보 등 일부 내용은 각색하고 있습니다.
보호자는 왔을까. 무슨 일로 왔을까.
진료실에서 접수창을 스크롤하다가 10대 환자들이 보이면 일단 긴장이 된다.
17살, 여느 고등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하얀 피부의 앳된 얼굴. 블랙 롱패딩의 한쪽 어깨가 훌렁 내려와 가슴팍이 훤히 보인다. 저 브랜드 패딩은 저렇게 속옷만 입고 걸쳐도 따뜻한가 보네, 이 추운 겨울 요즘 애들의 패션이란. 참.
꼰대 같은 생각이 스멀스멀. 어쩔 수 없다. 난 의사지만 엄마이기도 하니까.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 “
“제가 어제 남자친구랑 처음으로 시도를 했는데요. 진짜 하지는 않고요. 남자친구가 손가락을 넣었는데 피가 났거든요. 그게 정상이에요? 피가 안 나면 이상한 거죠?”
내 대답이 정말 궁금해서 온 게 맞는 건지. 도통 쉴 새 없이 본인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지금도 피가 나요?”
“아니요. 지금 피 안 나요. 근데 손가락 넣자마자 피가 났거든요. 이게 피가 나는 게 정상인 거죠? 제가 질이 작아서 그래요? 제가 비정상이에요? 대체 어디에 넣어야 해요?”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나.
나는 의사고. 너는 환자야. 내가 해야 할 도리와 의무만 하자고 생각하지만 내 딸이 몇 년 후에 저렇게 병원에 가면 어쩌지, 하는 염려는 어쩔 수 없다.
“일단 볼게요. 피나는 것부터 좀 봅시다.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
“근데 제가요. 팬티를 안 입고 와서요. “
“네, 상관없어요. 어차피 속옷 벗어야 하니까. 진찰용 치마로 갈아입고 나오세요.”
진찰용 치마로 갈아입고 나오는 그녀, 블랙 롱패딩은 여전히 걸친 채로. 뭔가 감추는 게 있는 걸까. 지금 보니 양말이 짝짝이다. 게다가 한쪽은 발바닥 쪽 재봉선이 발등에 있다. 급하긴 급했던 모양. 팬티도 안 입었단다. 그녀는 산부인과가 처음인가 보다. 모든 것이 서툴고 어색하다. 의자에 앉아서도 머뭇거린다.
다행이다. 크게 다친 곳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급하고 불안하다. 대체 뭐가.
“제가 왜 피가 난 거예요? 제가 정상이죠? 제가 질이 작아요? 남자친구가 앞에다가 하려고 했는데요. 질이 원래 그렇게 뒤에 있어요? 생각보다 엄청 뒤에 있나 봐요?”
듣고 있으려니 피가 나서 무섭거나 걱정이 되는 게 아니다. 17살 그녀는 ‘첫’ 경험을 제대로 못한 것이 억울한 것 같다. 질이 어디에 있냐니. 질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성관계를 어찌하려고 했노. 철딱서니야. 나에게 자꾸만 피난게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를 묻는다.
“피난 게 질이 작아서예요? 처녀막 그런 거예요? 아예 넣지도 않았다고요.”
의사로서 환자가 본인의 상태와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설명해 주는 건 몹시도 고마운 일이지만, 너무나도 세밀한 상황 설명에 참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처녀막, 질입구주름. 2020년부터 대한의사협회 의학용어집에는 더 이상 처녀막이라는 용어는 없다. 질입구주름이라고 부른다. 출처: 픽사베이
난 저 단어가 항상 불편했다.
반대말은 유부녀. 처녀의 ‘처’는 한자어 곳 처(處) 자이다. 결혼을 하지 않아서 친가에 머무르고 카지노 게임는 뜻이란다. (출처: 나무위키) 결혼하지 않은 여자, 아가씨와 같은 뜻. 흠. ‘아가씨’와 같은 느낌이 아닌 건 나뿐일까. 내가 음흉해서일까.
나에게 ‘처녀’라는 단어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보다는 성경험이 없는 여자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숫처녀’라는 단어가 있긴 하지만. 남의 성경험 유무를 저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건 배려가 없지 않나. 참 무례한 단어다.
‘처녀’라는 말이 꼭 이런 의미로만 쓰이는 건 아니다. 처녀작, 처녀비행처럼 어떤 일을 할 때에 처음, 손대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굳이 ‘처녀’라는 접두사를 사용해야 합니까. 나는 그런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을뿐더러 세상에는 그것과 대체할 수 있는 단어들이 많다는 것도 알고 카지노 게임.
나는 왜 ‘처녀’라는 말을 싫어할까.
성경험의 유무가 저 단어와 단단히 묶여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성과 관련하여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이성에 대해 반감을 가질 일도 없었다. 하지만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성과 관련된 이야기는 늘 비밀스러웠고 밖으로 드러내면 안 되는 금기였다. 엄격한 부모님, 성에 대해 이야기를 할 필요도, 기회도 없었다. 해지기 전에 늘 귀가해야 했다.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숨긴 적은 없었지만 부모님의 눈이 항상 날 따라다니는 것만 같았다. 여고시절, 나는 혼전카지노 게임의 찬반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에 어느 편에 서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나는 카지노 게임서약서를 강요받은 시대에 자랐다.
<커피프린스 1호점이라는 드라마를 아는가. 이 드라마가 한창 인기일 때, 나는 20대 중반이었다.
15세 이상 시청 가능한 이 드라마에 남녀주인공의 과한 애정표현이 어른으로서, 굉장히 우려스럽다는 내용의 글을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 썼다가 처참히 욕을 먹었던 적이 있다. 남녀 주인공이 침대 위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키스를 나눈다. 사랑하면 다 그래도 되는 건지. 몸은 이불로 덮여있지만 맨 어깨가 고스란히 보이면 홀딱 벗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상상은 나만 하는 건가.
방송국은 15세 정도면 이런 애정표현이 지니는 의미를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걸까. 익명 게시판에서 생전 처음 듣는 별별 욕들 보다도 나를 구식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것에 소스라쳤다. 나는 카지노 게임서약서를 작성한 적도 없고 혼전카지노 게임을 지켜야 한다는 대단한 각오도 없던 평범한 20대 여자였을 뿐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산부인과 의사가 될 거라는 걸. <커피프린스 1호점을 보는 동안 불편했던 내 우려들, 10대 성병과 임신, 낙태, 불완전한 성관념과 가벼워진 성의식 등을 현실로 겪으면서 성과 결부된 ‘처녀’라는 단어에 더 민감해졌다.
출처: Berek & Novac's Gynecology, 16e Fig. 5-19
여자의 밑에는 구멍이 세 개 카지노 게임.
소변이 나오는 요도, 질, 그리고 항문이 주르륵 세로로 줄을 서 카지노 게임.
요도는 바늘구멍 같다. 정말 작다. 이 안에 뭔가를 넣는 것은 정말 엄청난 고통과 불편감을 가져다주는 일이다. 당연히 쉽지도 않고.
항문은 누구나 다 알 거고.
질은 그 중간에 카지노 게임. 질 입구를 둘러싸고 있는 조직(말랑말랑한 살 같은 부분, 그림 참고하세요.)을 처녀막이라고 한다. ‘막’이라는 단어가 마치 질 입구를 다 막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질 입구가 막혀 카지노 게임면 생리혈도 안 나올 테고, 이건 병이라 그 막을 열어주는 치료를 해야 한다. 질 입구 주변을 둘러싸는 이 조직은 사람마다 다르다. 조직의 모양과 양이 다 다르다. 좀 두툼하게 있는 사람도 있고 거의 없는 사람도 카지노 게임. 그리고 이 부분에 자극이 가해지면 처녀막은 사라진다. 우리가 보통 하는 말로 처녀막이 찢어지는 것이다. 그 자극은 성관계도 될 수 있고, 그 성관계가 성기의 삽입만 의미하는 건 아니다. 손가락을 넣는 것도 포함이고. 과격한 운동이나 어딘가에 부딪히는 충격이 될 수도 카지노 게임. 자전거를 신나게 타고 오니 속옷에 피가 묻었다는 아이들도 카지노 게임.
그러나 처녀막이 좀 적은 사람은 어찌한들 피가 안 날 수도 있다. 피가 안 난다고 처녀막이 없는 사람, 카지노 게임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정상, 비정상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도 안된다. 눈코입 생김새 모두 다르듯 여자의 질도 그런 거다.
나의 첫 경험, 나 역시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그는 의아해했다.
“기분 나빠하지 말고. 너 정말 처음 맞아?”
처녀막이 더 이상 처녀성의 상징이 될 수는 없다. 질입구주름으로 이름도 빼앗긴 그것에게 당신의 카지노 게임을 모두 걸지 말라. 출처: 픽사베이
‘카지노 게임’은 무엇일까.
결혼할 때까지 성관계를 하지 않는 것?
내가 성경험이 카지노 게임는 걸 다른 사람이 모르면 되는 것?
결혼 전에 성관계를 하더라도 임신만 안 하면 되는 것?
혼전임신을 하더라도 부모님을 당황하게 하지 않게 비밀로 하면 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성관계라면 순결이라고 해도 되는지?
사랑이 어딨어, 내가 즐겁고 좋으면 되는 거지?
이쯤 되면 ‘순결’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탁하다. ‘사랑’도 참 얄팍하지 않나. ‘사랑’이 몇 분내 외의 어떤 몸짓으로만 충족되는 그런 욕구는 아니니까.
연애도 해보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본 이 40대 아줌마에게 더 이상 ’카지노 게임‘은 없는 걸까. 아니다. 나에게도 여전히 ’카지노 게임‘이 있다.
학생 시절, 어쩌다 보니 우리는 결혼을 했다. 투닥거릴 때도 있었고, 동네 창피하게 소리 지르며 싸우던 날도 있었다. 물론 즐겁고 재밌었던 순간이 더 많았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며 함께 겪었던 우여곡절이 우리를 단단하게 해 주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기대할 일도, 실망할 일도 많지 않다. 서로의 일상보다는 아이의 교육과 부모님의 건강 문제가 우리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었던 그때의 열정은 이제 꿈같은 옛날이야기. 시공간이 의미 없는 듯한 뜨겁고 강렬한 사랑, 그런 거 따위 이제 그립지도 않다.
다만, 15년째 내 곁을 지키는 내 사람에게, 그이가 가끔 보여주는 장난과 미소에 마음을 편히 놓고 지금 이 일상을 소중히 여길 수 있음을 감사하는 것. 상대를 향한 존중, 함께 쌓아온 시간에 대한 책임, 앞으로도 지키고 싶을 만한 가치라고 여기는 마음, 나 역시 그 사람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자 노력. 이 ’지조‘와 ’절개‘가 나에게는 ’카지노 게임‘이다.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열렬히 사랑하는 젊은 연인들에게도 이 ‘순결’을 말하고 싶다. 단순히 성기의 결합만으로 ‘순결’을 말하기에는 사랑이 가볍지 않은가. 지금 이 사랑의 고고한 지조와 절개를 귀하게 여긴다면 그 어떤 의미의 순결도 품어줄 수 있으리라.
엄마의 감시. 출처: 픽사베이
이렇게나 많은 말을 내뱉었지만, 나 역시 딸 가진 일개 엄마. 흉흉한 세상 어쩌고를 운운하며 우리 딸의 먼 미래 어떤 연애를 상상하면 가슴이 철렁한다. 안 돼. 안 돼. 아직 안된다구!
내가 어렸을 때에 이런 말이 있었다.
산부인과 의사는 밑에만 봐도 해봤는지 안 해봤는지 알 수 있대.
산부인과 의사가 되고 나니 확실히 알겠다. 밑에만 본다고 해봤는지 안 해봤는지 알 수 없다는 걸.
내가 알 방법은 없겠지만 우리 딸도 조금 더 크면 아마 친구들끼리 이런 얘기를 속닥거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우리 딸에게 이런 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