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봄은 잔인하고 무도해서 백일이 채 되지 않은 카지노 게임를 품에 안고 무시로 울었던 기억이 난다.
뉴스에서 고개를 돌리면 이름만 불러도 이 없는 잇몸으로 웃어주는카지노 게임가 있었다. 염치 없게 내 세상은 무사했다.
잘 먹고 잘 자는 것만으로도 존재가 이렇게 예쁠 수 있구나. 아니, 안 먹고 안 자서 속을 터지게 해도 소중한 존재일 수 있구나.
혹시 나도 소중한 사람일까.
이제 다 큰 어른이라 우쭈쭈하고 예뻐해 줄 사람이 없다해도.
카지노 게임를 보며 막연하고 어렴풋하게나마그런 생각을 했다.
17년에 둘째, 19년에 막내딸을 낳고인정이는성숙 단계에 도달했다.
아들을 키울 때보다 딸을 키울 때 나와 좀더 동일시 되는 경향이 있는데, 어린 시절을비교하며 외모와 성격, 습관 하나하나 다 비교하곤 했다.
딸은 나를 닮아 활짝 웃을 때마다 잇몸을환하게 보인다. 그게 예뻤다. 이효리가 웃을 때는예쁘다 생각한 적이 없는데딸은 예뻤다.
그렇다고 울 때는 안 예뻤느냐.
일부러 울릴 정도로 우는 것도 예뻤다, 뼈가 녹는 느낌이 뭔지 알겠다 싶을 정도로.
나도 제감정에 솔직한 모습 그대로 사랑스러웠을까.
마흔의 내가 다섯 살의 나를 보며 자주 물었다.
육아서에서 가르쳐 주는대로카지노 게임의 감정을 읽어주려 노력하는 동안 내 감정도 이해했다. 괜찮아, 고마워, 미안해 하는 말은 내 입으로부터 나왔지만 듣는 사람 역시 나였다.내가 가장 듣고 싶던 말이었으니, 내뱉는 순간 내가 평화로웠다.
카지노 게임도 금방 울음을 그치곤 했다.
물론 힘들었던 순간이야 말해 무엇하겠냐만,
내 인생의 힘듦이 육아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만 힘들었던 것도 아니고
내내 힘들기만 한 것도 아니니 그건 논외로 하자.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 덜 나는 사람이 됐다. 원래 화가 없는 편이었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내 카지노 게임가 없던 시절에 십대의 카지노 게임들을 매일 보며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 화나는 일 투성이였다. 수업 시간에 왜 그렇게 무기력한지, 싸가지가 왜 바가지인지.
그러나 육아 휴직을 끝내고 다시 십 대의 카지노 게임들을 만났을 때 내 마인드는 달랐다. 육아 때문인지, 세월호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십대 카지노 게임들에게 뿐 아니라 나에 대해서도 화가 덜 났다.
잘난 사람과 비교하는 일도 덜 했다.
(아예 안 한 것은 아니란 말이다.)
공부를 좀 못해도, 말이 좀 거칠어도, 심지어 강약약강의 태도로 빌런이 된 놈이라 하더라도. 인격의 미성숙함이자 존재의 불완성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 그 카지노 게임는 누군가에게 귀한 존재라는 걸 생각했다.
우리의 인연이 불운히짧을 수도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건도 잊을만 하면 터졌으므로살아 있으니됐다고생각했다.
살아만 있으면 언제든,무엇이든 할 수 있고
달라질 수도 있다.
육아로 나를 인정할 수 있게 되다니운이 좋았다.
정말 운이 따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공을 운으로만 돌리는 것은 나의 내면힘을인정하지 않는태도니까 한번 다르게 생각해보자.
카지노 게임에게 향하던 사랑스러운 시선을 나에게로 돌릴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왜'라고 묻지 않았다.
많은 양육자들이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결핍이 육아의 과정에서 떠올라 분노와 서운함, 원망의 감정에 힘들어한다.
왜 나는, 왜 엄마는, 왜 그때는, 왜 하필.....
그러나 지나간 일에 답을 구할 수 없다.
답을 구한다한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다.
이유를 반드시따져 물어야 할 때는 있어야 할 존재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때다. 아무런 맥락 없이, 게다가 잘못의 책임자가 있다면 끝까지 파고들어 이유를 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