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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리 Apr 03. 2025

●슬픈 카지노 게임_카지노 게임 4.3 혼령들에게 바치는 영화

영화 4.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 2_카지노 게임 4.3 민중항쟁의 일상

카지노 게임지슬 영화 포스터


말은 카지노 게임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을 제일 싫어하는 감독이 있다.

카지노 게임도에 살면서 카지노 게임 영화만 고집하는 카지노 게임 사람, 오멸 감독이다. 2013년에 개봉한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 (이하 지슬)의 감독인 그는 2009년부터 네 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어이그, 저 귓것(카지노 게임어로 어휴, 저 귀신도 안 잡아가는 바보 같은 녀석들) (2009), <뽕똘(카지노 게임어로 땅딸만한 고집쟁이) (2010), <이어도(카지노 게임어로 카지노 게임도) (2011), <지슬(카지노 게임어로 감자) (2013) 등 모두 카지노 게임에서 만든 카지노 게임에 관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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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숙제로 받아들인 영화

우리가 외국을 관광하는 기분으로 도착하는 카지노 게임도 공항 밑바닥에는 아직도 카지노 게임 4·3’ 사건희생자들의 시신을 발굴한다.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환하게 사진 찍는 정방폭포 역시 수많은 사람이 총탄에 쓰러져간 곳이다.감독은 이방인의 눈을 즐겁게 하는 천혜의 관광지 카지노 게임가 아닌 슬프고 고통스러운 정치사를 품은 생생한 역사 현장으로서의 카지노 게임를 영화 <지슬을 통해 전달한다.


3만 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낸 카지노 게임 4·3’ 사건의고통으로 몸살을 앓는 카지노 게임는 지금도 43일 한 날, 한꺼번에 제사를 지낸다.6·25 전쟁다음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었고, 역사적으로도 카지노 게임민들에게 큰 고통을 안긴 사건인데도 여전히 정부가 역사적 해석을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화 전공의 오멸 감독은 카지노 게임 4·3’ 사건을다룬 최초의 영화, 고 김경률 감독의 끝나지 않은 세월’(2005)에 미술 스태프로 함께 작업했다.그러던 어느 날 척박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던 김경률 감독이 2008년 40살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때 오멸 감독은 언젠가는 자신이 마무리해야 할 숙제로 받아들였다. 제목도 김 감독의 뜻을 이어가겠다는 의미인 ‘끝나지 않은 세월 2’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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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을 뛰어넘은 일상에 공감

<지슬194811해안선 5km 밖의 모든 사람을 폭도로 간주하고 무조건 사살하라는 미군정의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흑백영화다.4·3 사건당시 공포 분위기를 피해 피신한 마을 주민들의 실화를 근거로 만들었다.그 곳은 서귀포 안덕면 동광리의 큰넓궤동굴’이었다.


현대사의 비극을 감동적인 스토리와 뛰어난 영상미로 스크린에 구현했다는 평을 받은 영화는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4관왕을 휩쓴 최고의 화제작이었다.세계 최고 독립영화 축제인 29회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한국 영화로는 최초로 '월드시네마 극영화(드라마틱)' 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고, 프랑스에서 열린 브졸국제아시아영화제에서는 장편영화 경쟁부문 대상인 황금수레바퀴상을 수상했다. ‘독립영화사에 남을 걸작’이란 평가를 받는 영화 <지슬은 카지노 게임의 영화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의미 있는 영화다.


지금은 우리에게조차 낯선 카지노 게임 4·3’을다룬 영화에 전 세계인이 함께 울고 웃었다. 영화가 정치적 이념이나 이데올로기의 양극단을 피하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희망을 붙드는 보통 사람의 일상을 진솔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특히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빼어난 영상미와 탁월한 연출력은 영화적 감동을 배가시킨다.



역사의 현재성과 미래성

영화를 보고 나역사란 무엇인가?’라는묵직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동시에 ‘카지노 게임 4·3’ 이란 사실로서의 과거 역사를 현재에 어떻게 해석할지 역시 고민이다. 역사가 E.H. 카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를 역사로 규정했다. 그가 파악한 역사는 현재를 거울삼아 과거를 통찰하고,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바라보는 것을 넘어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보다 나은 미래를 창출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역동하는 생물로서의 역사를 보았다.


오멸 감독은 역사의 현재성과 미래성에 기대며, 역사에서 잊힌 것 같은 65년 전의 사건 카지노 게임 4·3’을 현재로 불러온다.'카지노 게임 4.3' 이 과거 사실로 잊힐 사건이 아니라현재로 불러와 반드시 역사적 해석을 내릴 사건임을 상기시킨다. 과거에 지워진 것처럼 보이는 역사를 그가 현재시간과 공간, 기억에 옮겨심었다. 카지노 게임도민에게는 여전한 현재 역사인 4·3 민중항쟁을 전 세계인들에게 현재적 사건과 역사로 소환하고, 재평가를 바라는간절함이그를 움직였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카지노 게임 4.3 민중항쟁의 핵심이 남한만의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반대, 통일 조국의 수립 및 미군 즉시 철퇴였다고 정리한다. 외세에서벗어나 새로운 자주적, 민주적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카지노 게임도민들에게 당시 국가 권력인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및 대외적으로 국가와 국민 보위의 책임이 있는 한국 군대와 대내적으로 국가 치안과 국민 보호를 담당하는 한국 경찰은무슨 짓을 한 것인가.


감독은 <지슬을 통해 카지노 게임 4·3’이라는 하나의 사건에 갇힌 3만 명,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준다.카지노 게임 4.3 희생자들이 잃어버린, 아니 당시 국가 권력인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말끔히 지운 이름을 영화담아 기억한다. 헛되이 사라질 뻔한 희생자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들의 아픔을 온몸으로 끌어안는다.


<지슬은 가장 차가운 역사의 현장에서 용서와 화해, 희망을 나눈 이들이 바로 내 곁의 가족이요, 이웃이며, 친구였다고 증언한다.동시에 ‘카지노 게임 4·3’ 이 카지노 게임만의 아픔과 고통이 아닌 우리 모두의 아픔과 고통의 역사임을, 더 이상 역사의 해석을 미루지 말라고 단단히 부탁한다. 제발 후손을 위해 역사 해석을 신속히, 그리고 바르게 내리라고 우리의 등을 떠민다.





*영화 <지슬과 함께 할 글은 도올 김용옥 선생의 “슬픈 카지노 게임”입니다.

아래 참고 6, 도올 김용옥, 카지노 게임 4.3을 말하다 3부 [KBS카지노 게임] 마지막 강연 말미에서 김용옥 선생이낭독한 글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카지노 게임를 향한 산문시이자 선언문이며, 애도글을 오늘 카지노 게임 4.3 민중항쟁 77주년을 맞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슬픈 카지노 게임


나는 슬픕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슬픕니다

여러분도 슬픕니다

무언가 속 시원히

다 말할 수 없는 사연들이

우리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가슴을 억누릅니다


카지노 게임는 슬픕니다

카지노 게임는 슬픕니다

지금 여기 누군가 일어서서

카지노 게임는 슬프지 않다고 말한다면

나는 외칩니다


그대는 위선자!

그대는 진실을 외면하는 거짓말쟁이.

연기(緣起)의 굴레를 망각한 허구!

카지노 게임는 슬픕니다

진실도 화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 둘러대는 말일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슬픔입니다


슬픔에는 이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이념적 상찬이나 폄하나

언어의 꾸밈이나 위로도

모두 카지노 게임를 자기 구미대로 말아먹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슬픔은 그냥 슬픕니다

영원히 슬픕니다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억은 절대 자살하지 않습니다

아라야식의 굴레 속에서라도

끝없이 자기 생명을 유지합니다


우리가 카지노 게임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슬픈 카지노 게임를

슬프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 슬픔에

동참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슬픔을 슬프게 느낄 때만이

그 슬픔은 정의로운 에너지를 분출합니다


슬픈 카지노 게임는 알고 보면

우리 민족 전체의 모습입니다

슬픈 카지노 게임는

외딴섬의 이야기가 아니라,

조선 대륙 전체의 이야기입니다

조선 민족의 외세에 대한 항거,

관념적 폭력에 대한 저항,

분열획책에 대한 주체적 항변,

정치적, 사회적 압제에

분연히 일어서는 민중의 항쟁,

이 모든 것이 카지노 게임라는 고립된 무대 위에서

극적으로 구현되어 왔습니다


오늘 이 순간 남북이 분열되고 미국-러시아

미국-중국의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고

일본의 야욕이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이 순간,

카지노 게임의 슬픔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슬픈 아일랜드에서

예이츠, 버나드 쇼, 사무엘 베케트,

오스카 와일드, 조나단 스위프트, 제임스 조이스와 같은

세계 문학의 거성들이 쏟아졌듯이

나는 앞으로 슬픈 카지노 게임에서 백두에서 한라까지

그 모든 생의 약동을 하나로 통합하여 분출하는

세계 문명의 거대한 축이 탄생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카지노 게임의 사람들이여,

우리 같이 슬픔을 말합시다

슬픔을 노래합시다

우리의 슬픔을 조작하는

모든 관념으로부터 해탈합시다


나는 말합니다

종교도, 정치도, 국가도

어떠한 위대한 형이상학도

한라산 기슭 해안가

현무암에 덮인

이끼 한 오라기일지라도

하나님으로 경배하는

당 오백 카지노 게임 해녀의

경건한 생명력 앞에

무릎을 꿇어라





*커버 사진 및 글 안의 사진 출처: 카지노 게임의소리 전 세계가 주목한 영화 '지슬', 그다음은? 김정호(경희대 영화연극학과 교수) “세계영화제를 뜨겁게 달군 4·3 진혼곡” 2013.03.15.

*<지슬 영화 관람: You Tube 또는 Google TV에서 대여나 구매 가능, wavve에서도 스트리밍 서비스 중이라 대여 가능.


*이 글을 정리하면서 살펴본 영상과 글들입니다. '카지노 게임 4.3'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참고 1. 유튜브 사쩜삼도 카지노 게임 4.3 영화 '지슬'을 말한다 [4.3 65주년 특별기획 KBS 카지노 게임]

2013.04.07 방송

[카지노 게임 4.3 65주년 특별기획]

4.3 영화 '지슬'을 말한다

2012 부산국제영화제 4관왕,

2013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에

빛나는 영화 '지슬' 이야기

https://youtu.be/rlz6bam4oII?feature=shared


참고2. [한국영화걸작선]지슬 - 끝나지않은 세월2 오멸, 2012

by.남동철(부산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2013-05-22

https://www.kmdb.or.kr/story/10/2025


참고 3. 대한민국 구석구석 섬을 할퀴고 간 깊은 상처 ‘영화 <지슬, 카지노 게임 4.3을 말하다’

글, 사진: 정은주(여행작가) 카지노 게임 서귀포시 수정일 : 2019. 3. 18.

https://korean.visitkorea.or.kr/detail/rem_detail.do?cotid=409b6aec-2057-4f11-8649-d3cb79379713&utm_campaign=share&utm_source=url_share&utm_content=rem


참고 4.도올 김용옥, 카지노 게임 4.3을 말하다 1부 [KBS카지노 게임]

조회수 993,878회 2018. 12. 5.

- 카지노 게임 4. 3 특별 강연

시대에 석학 도올 김용옥이

KBS카지노 게임에서 카지노 게임 4. 3에 관한 특별 강연을 진행했다.

*1부에서는 '빨갱이'란 무엇이고

'좌익, 우익'이 어떻게 생겨난 관념인지

그의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설명한다.

https://youtu.be/ueB1LLDL-fY?feature=shared


참고 5. 도올 김용옥, 카지노 게임 4.3을 말하다 2부 [KBS카지노 게임]

조회수 40만회 6년 전

- 카지노 게임 4. 3 특별 강연

도올 김용옥 카지노 게임 4·3을 말하다 2부

시대의 석학 도올 김용옥 선생이 말하는 카지노 게임 4·3

*2부에서는 카지노 게임 4·3이 대한민국 역사에

어떤 의미를 남기는지를 밝히고,

카지노 게임 사람조차 잘 모르던카지노 게임어와

카지노 게임 문화 및 탐라시대 때부터의 역사를

중심으로 강연한다.

https://youtu.be/i_YIedf0x4o?feature=shared


참고 6. 도올 김용옥, 카지노 게임 4.3을 말하다 3부 [KBS카지노 게임]

조회수 30만회 6년 전

- 카지노 게임 4. 3 특별 강연

도올 김용옥 카지노 게임 4·3을 말하다 3부(마지막)

*마지막 3부에서는 서북청년단과

이승만의 긴밀한 관계

그 관계가 불러일으킨 참혹한 결과,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미군정까지.

4.3이라는 민중항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설명한다. (+여순사건)

https://youtu.be/vOodVTITIzI?feature=shared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 또는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 약칭: 서청)

- 미군정 당시 조직된 대한민국의 극우반공주의청년 단체다.[1]1946년3월 5일생성된월남자단체가 그해11월 30일에 통합해 발족하였다. 이 단체는1948년12월 19일에 조직한대한청년단으로 통합했으며, 남은 일부는 1949년 10월 18일에 단체 등록이 취소되어 소멸했다.

서북청년회 사무실은한국 민주당본부가 있는동아일보사옥에 있었다고 전해진다.[2]서북청년단은이승만,김구,한국민주당등에게서 자금을 지원받았다.이승만1947년부터 이들을 견제했고,지청천을 시켜대동청년단을 창설함으로써족청과 함께 서서히 대동청년단에 흡수되었다. 서북청년회원 가운데 일부는대한민국 국군대한민국 경찰의 창설에 참여하였고, 일부는1948년남한 단정 반대사건인카지노 게임도4.3 사건남로당이 개입하면서, 남로당 토벌이라는 명분으로 4.3 사건 진압과 학살에 가담하였다. 당시 4.3사건의 진압책임자는 조병옥이였고 그는 민주당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당대표였다. 조병옥은 "카지노 게임도민 20만명을 모두 죽여도 상관없다."라는 발언을 했다.이명박 정부박근혜 정부에서 보수성향의 사람들이 각종 집회에서 '서북청년단' 깃발을 들고 나오기도 했으며 2014년에는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를 자처하는 사람들이세월호침몰 사건 희생자 추모 리본을 무단으로 제거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3](출처:위키백과)


*여순사건(여수·순천 10·19사건 (麗水·順天 10·19事件))

- 1948년 10월, 여수 주둔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카지노 게임4ㆍ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여수ㆍ순천 10ㆍ19사건’(이하 여순사건)은 법적으로 “정부 수립의 초기 단계에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카지노 게임4ㆍ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인하여 1948년 10월 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 1일까지 여수ㆍ순천지역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전북특별자치도,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혼란과 무력 충돌 및 이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전라남도 동부 6개 군을 점거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하여 일주일여 만에 전 지역을 수복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상당한 인명 · 재산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국가보안법」 제정과 강력한 숙군 조치를 단행하게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 사건은 당시여수에 주둔 중이었던국방경비대제14연대에서카지노 게임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1개 대대 규모의 군인들을 파견하기로 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사건의 가장 큰 배경은카지노 게임도민중항쟁의 진압을 위해 카지노 게임에 출동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은 여수 제14연대가 동포 학살은 할 수 없다는 보도문을 발표하고 카지노 게임 파병을 거부하면서 발생했다.이 사건은남로당의 지령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난 군인반란사건으로 시작되었으며, 남로당은 사건이 일어나자 적잖이 당황하였으나 결국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출처: 위키백과)


*미군정(미군정청)

-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존속한 남한 통치를 위한 미국의 군정청.

해방 직후 미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을 점령하고, 1948년 8월 15일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군정을 실시했고, 이를 위해 설치한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을 일반적으로 ‘미군정’ 또는 ‘미군정청’으로 약칭했다.

미육군태평양사령부(美陸軍太平洋司令部, 세칭 맥아더사령부) 사령관 맥아더(MacArthur, D.)는 1945년 9월 2일 일본으로부터 정식 항복조인을 받은 뒤 도쿄〔東京〕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를 설치하고,「일반명령 제1호」를 통해서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은 소련(지금의 러시아) 극동군 최고 사령관에게 항복하고,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은 미육군 태평양사령부 사령관에게 항복할 것을 지시했다. 맥아더는 곧 이어 9월 7일「미육군 태평양사령부 포고 제1호」를 통해 38도선 이남에 미군정 실시를 선포하였다. 점령군이 점령지 내의 입법, 행정, 사법에 걸친 모든 권력을 장악하며, 군정이 38도선이남 한반도의 유일한 정부임을 선언하였다.

미군정은 일제 식민지기 통치조직보다 더 중앙집권화 되고, 효율적인 조직을 추구했고, 미군정 기구 개편은 그러한 의도를 반영했다. 경찰은 이른 시기에 미군정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게 중앙집중화 되고, 확대되었다. 각급 행정기구는 중앙의 군정청으로부터 도(도지사)-군(군수)-읍·(읍장, 면장)-리·동으로 이어지는 일사불란한 체계를 갖추었으며, 점령 당국인 미군정의 요구를 지방에 그대로 전달하는 통로가 되었다.점령 초기 한국인 사회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각종 자치기구들이 미군정에 의해 부정된 이후 밑으로부터 한국인들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기구는 없었다. 이들 행정기구를 움직이는 관료의 충원은 ‘훈련되고 경험 있는 관리들의 재임명’이 일반원칙이었고, 따라서 대부분 일제하의 관료들, 또는 우파 보수세력 중심으로 충원되었다.미군정은 1945년 12월에 미국인한국인 양국장제도를 시행했고, 1946년 3월부터 군정의 한인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이는 점령당국이 충원한 구식민지관료 및 우익세력에게 행정실권을 부여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미군정은 1947년 5월 과도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한국인을 통치의 전면에 내세우는 일종의 간접통치를 실시하게 된다. 과도정부 수립은 남한만의 자치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가 일단락되었음을 의미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여전히 미군정 예하의 한인 행정조직에 불과했고, 최종적 권한의 이관된 것은 아니었다.미군사령부 및 군정장관, 그리고 각 부서에 배치된 미국인 고문들이 중요 인사 임면, 법령 포고,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권한과 최종 결재권을 행사하였다. 특히 미군정기 내내 주한미군사령관과 군정장관이 최고 실권을 행사했다. 과도정부 설치 후에도 미군정은 재정, 귀속재산 관리, 원조물자 배분 등 점령통치의 물적 기반에 대한 부분은 행정권 이양에서 제외하여 최후까지 직접 관리하였으며, 치안분야에 대한 통제권도 계속 장악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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