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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호 Mar 15. 2025

브래디 코베, <브루탈리스트

우리는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가, 콘크리트는 무엇을 남기는가

<브루탈리스트를 모두 보고 나니 왜인지 지난해 들었던 양자역학 교수님이 떠올랐습니다. 과학자답지 못하시게 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를 노트북 배경화면으로 설정해 두셨던 교수님께서는 어느날 고갱의 그림을 두고 수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연구자에 가까웠던 교수님의 수업에서 깨어있을 수 있었던 학생은 몇 없었는데,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이유는 너무 길고 말하기도 번거롭네요. 짧게 줄여 말하자면 우리는 한낱 미물에 불과한 존재이며, 우리의 삶은 단 한 점의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그날 배웠다고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두요. 삶의 의미는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니까요.




이민자, 랍비, 건축가, 인부, 예술가, 중독자


<브루탈리스트는 라즐로 토스를 그린 작품입니다. 혹자는 이 영화를 이민자에 대한 헌사라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브루탈리스트는 <피아니스트와는 달리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연기한 라즐로 토스에게만 집중합니다. 라즐로는 가슴깊이 외롭고, 그래서 말이 없습니다. 또한 순수하기 때문에 방탕한 인물입니다. 아내를 잃고 고국도 꿈도 건물도 잃은 라즐로의 심리는 쇼트 활용으로 두드러지게 묘사됩니다. 영화는 클로즈업과 익스트림 롱쇼트를 번갈아가며 사용합니다. 문제는 클로즈업을 사용한 장면에서 라즐로는 공포와 혼란, 외로움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겁니다. 오프닝에서 인파에 둘러싸인 라즐로도, 춤을 추며 사랑하지 않는 여인을 안는 라즐로의 표정도 모두 그렇습니다. 익스트림 롱쇼트는 주요인물을 작은 형상으로 보이게 멀리서 찍는 방법인데요. 해리슨의 도서관을 손보고 아틸라와 춤을 추던 행복한 라즐로는 클로즈업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 같지만 익스트림 롱쇼트로 보여줍니다.


카지노 가입 쿠폰는 아내와 찢어진 고통에 마약과 방탕한 생활을 반복하며 정신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망가져 갑니다. 물론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나라와도 어울리지 않았던 예술가인 카지노 가입 쿠폰는 오드리의 모함으로 유일한 핏줄 아틸라와도 멀어지고 인부로 일하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 건축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건축은 그의 분신이자 자부심이었고 그의 자아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논해


해리슨은 카지노 가입 쿠폰의 대척점에 위치한 인물입니다. 그는 예술가를 동경하는 사업가이죠. 카지노 가입 쿠폰의 건축학적 재능을 알아볼 능력이 없었던 그지만 곧 카지노 가입 쿠폰를 동경하며 그에게 자금부터 집까지 모든 것을 내어주게 됩니다. 제가 앞서 카지노 가입 쿠폰에게 건축물은 그의 분신과도 같다고 언급했었습니다. 그런데 <브루탈리스트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진 마가렛 벤 뷰런 센터는 그렇지 않습니다. 4개의 건물을 하나로 연결했으며, 가톨릭 교도도 아닌 그가 가톨릭을 짙게 연상시키는 특별한 설계를 합니다. 콘크리트는 싸고 튼튼하다는 말을 하며 건축 재료로 대리석 대신 값싼 콘크리트를 쓰게 합니다. 물론 이는 그가 신봉하는 브루탈리즘의 특징이기도 하지만요.


제 생각에는 마가렛 벤 뷰런 센터는 카지노 가입 쿠폰의 분신일뿐만 아니라 해리슨의 분신이기도 합니다. 카지노 가입 쿠폰가 해리슨의 파티에 초대받아 들은 긴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길고 긴 러닝타임 중 약 10분은 넘게 잡아먹은 이 대화는 해리슨과 카지노 가입 쿠폰의 관계와 정체성을 단숨에 드러내는 씬입니다. 자신이 부자가 되자 자신을 찾아온 조부가 돈을 요구하자 주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야기이죠. 여기서 해리슨은 스스로의 삶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삶 이야기의 논점은, 역시 돈 이야기입니다.


라즐로는 건축가가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는 홍수가 범람해도 자신의 건물은 남아있을 것이라며, '정육면체를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정육면체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육면체를 만드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 라즐로는 스스로의 직업 이야기와 철학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논점은, 라즐로의 예술관이죠. 라즐로는 금전적으로 부족한 예술가입니다.


서로를 동경하면서 혐오하는 한 예술가와 한 사업가의 얽히고 섥힌 관계는 결국 명백히 먹이사슬의 위에 위치한 해리슨이 카지노 가입 쿠폰를 강간하며 끝을 맺습니다. 카지노 가입 쿠폰의 예술관을 지지하며 돈 이야기는 하지 말라더니 돈 때문에 쉽게 격노하고 이성을 잃는 해리슨과 상당한 고집으로 일관하지만 자신의 임금에서 돈을 빼내어 예술관을 지킬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인 카지노 가입 쿠폰는 그래서 마지막까지 서로에게 마이너스 관계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해리슨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저는 앞서 설명한 이러한 관계들이 모호하고 기이한 결말 또한 효과적으로 설명해준다고 믿습니다. 뭐랄까, 모욕을 당한 해리슨이 그의 집에서 그리고 마가렛 벤 뷰런 센터에서 그토록 완벽히 사라진 이유를 말입니다. 혹자는 어디로 사라졌는가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은 왜 사라졌는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저는 이를 마가렛 벤 뷰런 센터에서 해리슨이 배제되었음을 나타내는 영화적 허용이라고 보았습니다. 영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라즐로는 해리슨을 닮아갑니다. 그의 폭력적이고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태도와 강간에서 온 깊은 충격과 불안이 겹쳐 그의 예술관과 인간성은 자꾸만 파괴되어갑니다. 상징적으로, 다르게 이야기하면 민주주의와 예술가의 자유가 자본주의의 폭력에 잠식된다고 이야기해야할까요. 결말부 라즐로는 강간당했음을 아내 에르제벳에게 고백합니다. 둘은 미국을 떠나 이스라엘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습니다. 해리슨의 압력에서 벗어나기로 하죠. 그리고 그순간 라즐로와 해리슨의 자아가 마구 뒤섞인 마가렛 벤 뷰런 센터에서 감독은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방법으로 해리슨을 완전히 추출해냅니다.


분노한 해리슨의 아들 해리가 에르제벳을 넘어뜨리고 그녀의 한 팔을 붙잡고 질질 끌고 나가는 장면도 인상깊습니다. 이는 수미상관적 연출이기도 한데요. 오프닝에서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은 뒤집힌 구도로 연출됩니다. 이는 에르제벳이 화면상에서 뒤집힌 채 끌려나가는 구도와도 일치하죠. 그리고 해리슨을 찾아 들어온 마가렛 벤 뷰런 센터의 중심에는 영화 내내 라즐로가 강조했던 빛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거꾸로 뒤집힌 채 말이죠. 의미심장하죠. 자유롭다고 믿는 자가 가장 자유롭지 못하다는 영화 내 대사와 이민자이자 랍비인 라즐로의 정체성을 고려해 생각해보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번째 해석은 라즐로는 겉으로는 가톨릭을 드러내는 상징을 만들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있었고 그것이 건축물에 반영되었다는 해석입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와 자유의 여신상을 보며 자유롭다고 믿었던 라즐로였지만 실은 그가 평생 자유롭지 않았다는 해석도 가능하죠.




조피아는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에서 조피아의 말에 대해서 덧붙이고 싶습니다. 조피아는 마가렛 벤 뷰런 센터의 비정상적으로 높은 천장과 좁은 방, 미로와 같은 구조는 라즐로가 지냈던 강제수용소에서의 고통의 기억을 담은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휠체어에 앉은, 얼굴이 마비된 라즐로는 반은 웃고 반은 우는 섬뜩한 표정으로 조피아를 응시하고 영화는 막을 내리는데요. 조피아의 해석은 맞을수도 있고, 틀릴수도 있습니다. 알람 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하는 라즐로, 방에 어두운 그림자로 비치던 아틸라와 해리슨을 강제수용소 생활에서 비롯된 잔재라고 해석할 여지도 충분하니까요. 그렇다면 라즐로는 마침내 조피아에게나마 이해받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요. 제 생각에는 라즐로가 만든 것은 스스로의 생을 빚은 정육면체일 뿐입니다. 조피아는 삼촌의 정육면체에서 소련군의 만행에 실어증을 앓게 된 스스로의 정육면체를 빚어낸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 말은 곧 혼신의 힘을 다해, 생을 깎아 빚어낸 카지노 가입 쿠폰의 삶은, 카지노 가입 쿠폰의 건축은 끝끝내 이해받지 못했다는 이야기겠지요. 사람들은 카지노 가입 쿠폰가 만든 정육면체를 이해해주지 않았습니다. 눈앞의 정육면체를 보고도 끝까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정육면체를 빚어냈지요. 아내의 모함을 편의적으로 믿은 아틸라, 카지노 가입 쿠폰의 예술관을 제멋대로 재단한 해리슨과 해리, 삼촌에게 구원받은 조피아까지 말입니다. 그를 이해해준 단 한 사람은 아내 에르제벳 뿐이었던 것 같네요.



장점과 AI논란


이제 정말 마지막인데요. 영화의 음악과 영상미는 압도적으로 뛰어납니다. 특히 1900년대의 음악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현대적인 관악기 소리가 웅장하게 화면을 감싸주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연출 가운데 마가렛 벤 뷰런 센터가 타임랩스처럼 천천히 위로 쌓아올려지며 완공되는 과정을 찍은 씬과 아내 에르제벳의 나레이션이 깔렸던 모든 씬의 연출이 기억에 남네요. 어딘가 슬프고 담담한 에르제벳의 목소리와 미학적이고 어쩌면 영화 주제처럼 건축적으로 보이는 장면들이 조화를 이루어 더 인상깊었습니다. 중간에 인터미션 15분 동안 랍비 시절 라즐로와 에르제벳의 결혼식 장면이 떠 있었던 점도 인상깊었네요. 연기도 굉장한데 AI논란이 조금 있더라구요. 논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이해가 되지만 저는 사람들이 영화를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함부로 정의하려 드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CG나 애니메이션을 영상 예술이 아니라는 이유로 수상을 꺼리거나, 히어로 영화를 무시하는 것도 저는 잘못되었다고 생각되거든요. 일례로 1903년에 만들어진 <대열차강도의 열차 창문은 별도의 영상으로 합성 처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CG가 아닌가요? 혹은 미장센이라 볼 수도 없는 것인가요? 마찬가지로 AI기술이 접목된 연기도 저는 연기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웅장하고 단촐한 음악과 대단한 연기, 그리고 이민자의 고통. 종교적 갈등. 마약에 중독된 예술가의 고통. 예술가와 사업가의 서로를 향한 동경과 갈등. 압도적인 연출과 카메라 구도. 자본주의에 잠식된 자유. 이 모든 것을 단 한 사람의 생에 집중해 담아낸 놀라운 영화.


브래디 코배의 <브루탈리스트입니다.




평점 5/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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