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인간과 크리퍼의 기묘한 모험
제가 작년에 봉준호 감독님이 미키7을 토대로 한 신작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미키7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소설을 다 읽고 든 생각은 아무리 봉준호라도 이걸 어떻게 살려...하는 우려였습니다. 가끔 소설을 읽으면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하기에는 재미가 없거나 혹은 구현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이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예로 들고 싶네요. 안타깝게도 미키7은 둘 모두에 해당되었구요. 하지만 한편으로 SF라는 새로운 장르와 주인공의 우주의 노동자라는 주인공의 특성. 더불어 <기생충에서도 계급 문제를 완벽하고 섬세한 감정선과 더불어 담아냈던 봉준호 감독이었던만큼 괜찮지 않을까하는 나름의 기대 또한 있었죠. 그런데 영화는 제 예상과 기대를 모두 벗어났습니다. 다양한 부분에서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기생충보다는 못한 작품이었고 그래서 실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같은 거장이자 예술가는 대중의 평판보다는 본인의 미적 취향과 신념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또 들기도 했어요. 대중의 입맛에 신경 써 본인의 취향을 가린 영화였다면 더 별로였을 것 같거든요.
먼저 이야기할 부분은 미키 17과 미키 18의 존재입니다. 만약 두 서로 다른 인간이 같은 기억과 몸을 공유하고 있다면 두 인간은 같은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영화는 던지고 있습니다. 아케이디와 도로시같은 과학부서의 직원들은 두 인간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케네스 마샬은 물론이구요. 그런데 미키는 무한복제가 가능하죠. 고로 하나는 소모품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카지노 게임의 연속된 죽음에 익숙해진 관객들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카이가 카지노 게임 17에게 진지하게 죽음에 관해 묻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카이는 해당 장면에서 관객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티모와 여타 사람들의 무례한 언행을 보며 불쾌감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진지하게 알고 싶기도 합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말이죠. 또 카지노 게임17에게 인간적인 연민과 애정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카지노 게임가 둘임을 알아차린 카이는 카지노 게임의 여자친구 나샤에게 하나씩 갈라 가지면 어떻겠냐고 제안합니다. 관객과 마찬가지로 카지노 게임에게 인간적인 매력과 소유욕을 느낀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나샤는 둘다 자신의 카지노 게임라고 항변합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케네스 마샬로 대표되는 대부분의 이들은 카지노 게임가 연속성을 가지는 하나의 인격이라고 해석하면서도 복제품 카지노 게임들을 소모품으로 대우하는 편의주의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나샤는 카지노 게임들을 연속성을 가지는 하나의 인격이라고 해석하지만 둘 모두의 인격을 존중합니다. 정작 카지노 게임17은 카지노 게임18을 자신과 다른 인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도 그렇게 보이구요.
이 질문에 답을 할 의무를 영화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 역설에 대해 여러 흥미로운 입장을 제시하며 생각할 수 있도록 이 영화는 관객들을 부드럽게 밀어줍니다. 한가지 저에게 있어 아쉬웠던 점은 정작 영화는 전개를 위해 미키18을 죽여버리는 편의주의적인 선택을 내리며 사태를 해결해버린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굳이 이해해보자면 이런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미키18은 영화 내내 호전적이고 목숨을 신경쓰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마음 한편으로는 자신이 원본의 멀티플임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죠. 그래서 그는 망설임없이 죽음을 선택하고 케네스를 향해 돌진합니다. 그런데 케네스를 죽이기 직전 그는 망설입니다. 죽음의 문턱 앞에 그는 자신이 인간이었음을 깨달은 것이죠.
두번째로 이야기할 부분은 풍자 요소들입니다.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부분이 트럼프를 오마주한 것으로 보이는 독재자 케네스 마샬과 그의 지지자들입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트럼프의 향기가 짙게 묻어나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백인 우월주의는 인간 우월주의로 대체되었고요. 강력한 언변과 선전도 트럼프와 닮은 구석이 많습니다.
크리퍼들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인디언이나 토착 민족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핵무기를 연상케 하죠. 크리퍼의 무기는 에필로그에서 존재의 유무조차 모호하게 묘사되는데요. 핵무기 역시 강력하지만 사용할 일은 없는 외교적 수단이자 평화의 수단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아차, 히로시마에서 사용되었군요. 아무튼 그랬습니다.
여러 블랙코미디 장면들이 재미가 없다는 의견들이 많은데요. 저는 반반이었습니다. 번식을 목청껏 부르짖는 케네스와 성관계를 즐기는 카지노 게임가 교차편집되는 장면. 마카롱 가게를 열고 망한 티모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장면. 그리고 그가 결국 카지노 게임를 죽이기로 하며 거짓 눈물을 흘리고는 고분고분한 놈을 죽이자며 카지노 게임17을 선택하는 어이없는 장면도 좋았습니다. 티모 베르너의 이름을 따왔다는 이름을 듣고는 그가 더욱 좋아지더라구요. 배양육을 먹고 토하는 카지노 게임17과 나샤와 스테이크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도 <설국열차가 생각나며 괜시리 저를 미소짓게 하더군요. 그런데 마약을 하고 카지노 게임들과 동시에 즐기려고 하며 멀티플에 대한 아무런 위기의식이 없는 나샤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대체 무엇을 노린 것인지 생각을 해봐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었습니다. 이외에도 몇 장면이 있었는데 까먹었네요.
붉은 버튼과 소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소스는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일파 마샬은 소스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데 이는 상류층의 무의미하고 과시적인 사치를 비판하기 위한 장치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 일파 마샬이 크리퍼의 꼬리를 잘라 소스를 만들며 카지노 게임들에게 꼬리들을 모아 오라며 시킨 것을 보면 미국인들의 인디언을 상대로 한 잔혹한 정책들을 비판하는 요소로 보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미디어에 대한 비판이거나 더 나아가 생명과 평화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도 카지노 게임의 거듭된 죽음과 코미디, 성관계 장면을 통해 소스로서 흥미를 유발하는 <카지노 게임 17에 대한 자기 풍자일 수도 있죠. 만약 그렇다면 앞서 이야기한 편의주의적 전개나 <카지노 게임 17의 떨어지는 개연성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붉은 버튼이 있습니다. 붉은 버튼은 카지노 게임들의 트라우마입니다. 엄마의 교통사고와 관련이 있죠. 결말부 카지노 게임17은 다시 한번 붉은 버튼을 눌러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 이전에는 괴상한 상상 씬이 들어갑니다. 카지노 게임17의 눈앞에 복제인간 프린터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그곳에는 케네스를 천천히 프린트하는 일파가 있었습니다. 케네스의 머리맡에는 붉은 소스가 가득 든 그릇이 있습니다. 떨어진 붉은 원형의 소스를 카지노 게임17은 찍어 맛을 보죠. 제 생각에는 붉은 버튼은 하층과 상층을 나누는 굴레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케네스 마샬같은 독재자가 끊임없이 프린트되어 나오는 소스로 가득한 세상. 그 원천인 붉은 소스를 카지노 게임17은 눌러 터트리는 은유적 결말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추가적인 단점을 이야기하자면 너무 많은 내용을 소화하지 못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존중. 현재 정치 현실에 대한 풍자. 트라우마의 극복. 복제인간에 대한 윤리적 문제. 토착민과 이주민 간의 갈등까지 모두 다루려다 보니 생긴 문제로 파악됩니다. 하지만 미키17을 연기한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는 압도적이었고, 찌질하고 매일 죽지만 불사의 존재라는 독특한 캐릭터성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기생충과 <마더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를 본인의 방식으로 녹여내려는 봉준호 감독의 선택들은 앞으로의 영화를 더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크리퍼와 복제인간의 모험을 인간에 대한 사랑과 풍자, 조롱으로 가득 채운 영화.
봉준호 감독의 <카지노 게임 17이었습니다.
평점 3/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