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라는 이름
영화 ‘카지노 쿠폰’ 정지혜 감독
이른 아침 커피를 사러 편의점엘 들렸다. 편의점 입구에 있는 테이블 의자에 아주 맵시 있는 보더 콜리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지르르하게 빛나는 털과 까만 눈동자가 눈길을 끌었다. 와, 근사한데라고 중얼거리며 커피를 사서 나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보더 콜리 앞에 멈춰 섰다.
"너, 참 멋있게 생겼다."
중얼거리며 손을 들었다 놨다. 만져보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되기에 멈칫했다. 순간 급하게 편의점 문이 열리며 개 주인이 외쳤다.
"아줌마! 만지지 마세요."
당황한 나는 '네'라고 외치고 급하게 돌아섰다. 순간 예전에 엄마한테 들은 말이 떠올랐다. 엄마가 다니던 수영장에서 싸움이 났는데 일흔세 살 되신 분이 할머니라고 불렀다고 붉으락푸르락 언성을 높였다는 일이었다. 내가 아직 할머니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라고 했다며 엄마가 어이없어했다. 누가 봐도 일흔세 살은 할머니다.
당시에 그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일흔세 살씩이나 된 분이 할머니라는 말에 화를 내다니 황당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요즘 주제 파악 못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흉봤다. 그런데 보더 콜리 개 주인의 "아줌마!"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자 그분이 왜 화를 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건 '할머니'라는 단어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의 어조, 톤 때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그분이 할머니라는 호칭으로 불렸을 때 자신을 하대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개 주인이 "저기요, 개 만지시면 안 돼요!" 했다면 민망해도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아줌마도 지나 진짜 할머니가 된 마당에 이런 감정을 가지다니 우스운 것 같지만 새된 소리로 부르는 아줌마라는 단어에는 중년 여자에 대한 하대가 담긴 게 맞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아줌마라는 호칭 안에 무성적이며 버스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우악스러움과 남의 일에 과하게 참견하는 오지랖이 넓은 존재에 대한 하대를 담고 있다. 그런 아줌마가 사랑 따위를 함부로 꿈꾸면 벌을 받게 되는 거다. 영화 '카지노 쿠폰'에서처럼 말이다.
영화 '카지노 쿠폰'의 여주인공인 카지노 쿠폰은 식품 공장에 다니는 아줌마, 조금 대우해준답시고 이모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가끔 오지랖을 부려 어린 여자 직원들에게 눈총을 받기도 하지만 일이 능숙하고 친한 동료들도 있어 회사 생활이 어렵지 않았다. 그런 카지노 쿠폰 앞에 나타난 새로운 남자 영수는 그날이 그날 같던 흑백 필름 속의 삶에 색을 입혀 주었다. 막노동하다 무릎을 다쳐 카지노 쿠폰과 같은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영수는 이른 아침 차를 빌려 카지노 쿠폰을 태우고 호숫가 나들이할 만큼 다정했다.
카지노 쿠폰은 영수가 달방으로 머무르고 있는 모텔에 들락거리며 그와 애정을 쌓아갔다. 모텔에서 나올 때면 매번 미친 여자와 마주치는데 그럴 때마다 카지노 쿠폰은 묘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외면했다. 자격지심이 많은 영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삶을 비관하는 형식으로 카지노 쿠폰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녀의 반라를 핸드폰으로 찍게 된 것도 그런 갈등 뒤였다.
연인 사이에 흔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카지노 쿠폰은 반라의 모습으로 머리를 풀어헤친 채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그걸 찍은 영수는 공장에서 작은 권력을 쥐고 있던 작업반장 도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동영상을 보여주고 만다. 동영상은 삽시간에 퍼졌고 카지노 쿠폰은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인격 살인을 당하고 만다.
결혼을 앞두고 있던 카지노 쿠폰의 딸은 자기 회사 직원이 보고 있던 동영상에 등장한 엄마를 발견하고 경악한다. 다행히도 딸은 어쩌면 자기 결혼을 위태롭게 만들지도 모르는 엄마를 원망하지 않고 일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경찰서에서는 동영상이 배포된 규모가 크지 않다며 카지노 쿠폰에게 적당한 선에서 합의 볼 것을 권유한다. 딸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카지노 쿠폰은 빨간줄 그으면 먹고 살 방법이 없어진다는 영수의 사정에 합의하고 만다. 아마도 누구나 일을 더 크게 벌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느니 그쯤에서 끝내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새 출발을 하기 위해 운전을 배우며 잊으려 노력하던 카지노 쿠폰의 앞에 영수와 도윤 무리가 눈에 뜨이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며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그들을 본 카지노 쿠폰은 정신이 나간 듯 영수의 뒤를 쫓는다. 영수가 모텔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던 미친 여자에게 카지노 쿠폰이 자신의 옷을 벗어 건넨다. 이 영화에 미친 여자가 등장한 것은 아마도 이 순간을 위해서일 것이다. 카지노 쿠폰은 자기 옷을 벗어주므로 해서 미친 여자와 자기를 동일시하기로 했다.
나가지 않던 공장으로 출근해 모든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 카지노 쿠폰은 끝내 도윤에게 물건을 집어 던지고 영수의 목을 조른다. 그리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동영상 속에서 자신이 불렀던 노래를 부른다. 그렇게 미친 여자가 되었다. 카지노 쿠폰의 동영상을 찍고 퍼 나르며 낄낄거리던 영수와 도윤에게 그녀는 제대로 미친 여자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아마도 다 끝난 줄 알았던 영수와 도윤은 등골이 오싹했을 것이다.
이제 카지노 쿠폰은 딸을 옆에 태우고 운전을 한다. 운전이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을 언제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는 은유이다. 카지노 쿠폰은 자살하지도 않았고 상심에 죽지도 않은 채 운전을 한다. 아줌마는 그렇게 쉽게 망가지지 않는다. 중년의 소박한 사랑이 죄는 아니었는데 카지노 쿠폰에게는 죄가 되고 말았다. 경찰조차 아줌마 동영상은 그렇게 대충 넘겨도 되는 사소한 일로 치부했다. 영화는 대단히 순화된 버전으로 전개된다. 내가 들었던 현실의 중년 여성 동영상 유포는 훨씬 더 끔찍했고 막장이었다.
십 대 소녀도 이삼십대 청춘도 사오십대 중년도 그 이후의 노년 여성도 인격이 말살되는 사건의 상처는 동일하다. 영화에서는 카지노 쿠폰이 서툴게나마 운전하며 자기 삶을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지만, 현실이었다면 그게 가능할까 싶다. 나라면? 카지노 쿠폰처럼 이겨내지 못했을 것만 같다. 어쩌면 그래서 이런 영화가 필요한 건지 모르겠다. 담담하게 웃는 카지노 쿠폰의 모습을 보며 우리가 힘을 낼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