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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상록 Mar 0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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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말고 지난달에 일하던 인턴 선생님 불러주세요."


이른 아침, 동맥혈 채혈*을 하기 위해 70대 남자 환자의 손목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보호자가 말했다. 보호자는 환자의 딸인 듯한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그녀가 말한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 나에게 처치를 받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다. 이런 말을 실제로 듣게 될 줄이야.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선배들에게 언뜻 들었던 터였다. 초보 인턴이 실수가 잦고 일이 능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중대한 의료과실이 있었거나 의료진과 환자, 보호자가 대면할 수 없는 특별한 이유가 생긴 것이 아니라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들었다. 모든 요구를 다 받아주다간 병원이 제대로 돌아갈 수 없었고 서로의 신뢰는 오히려 무너질 뿐이라고 했다.


동맥혈 채혈에 대해 잠시 설명을 하자면 한 마디로 인턴들에게는 최대의 난관이었다. 피부 표면에서 쉽게 접근 가능한 정맥에 비해 대부분의 동맥은 몸속 깊이 위치하고 있어 접근이 쉽지 않다. 또한 혈관의 압력이 높아 채혈의 전 과정을 매우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한다. 지혈도 오래 걸리고 정맥 채혈에 비해 통증도 크다. 그나마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동맥이 손목 부근의 노동맥**이라서 대부분의 동맥혈 채혈은 노동맥을 통해서 하는데, 말단 부위라 부작용 가능성은 낮지만 혈관이 얇고 손목 근처의 뼈, 인대, 신경, 정맥 등 여러 구조 사이를 지나기 때문에 숙달되지 않으면 채혈이 쉽지 않았다.


인턴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은 상태라 동맥혈 채혈이 어려웠고 처음 환자를 방문했을 때 한 번에 채혈하지 못했다. 그 환자는 동맥혈 채혈을 자주 해야 하는 분이었고 손목에는 이미 수많은 바늘 자국들이 남아있었다. 채혈과 지혈을 반복하면서 피부가 딱딱해져 정확한 혈관 위치를 촉지 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약한 맥박을 간신히 손끝으로 느끼며 찌른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고 두 번째 시도에 성공하긴 했지만 딱 봐도 능숙하지 못한 모습이 보호자에게는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다른 인턴을 불러달라는 보호자의 말을 듣고 짧은 순간동안 내가 크게 잘못한 것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채혈을 능숙하게 하지 못했을 뿐 다른 인턴을 불러야 할 큰 문제는 없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을까, 무례함에 화가 나서였을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쩌면 그저 선배들에게 들은 조언을 따랐던 것인지도 몰랐다.


"환자 분을 담당하게 된 사람은 이제 접니다. 이전 근무자를 불러드릴 수는 없고 저한테 처치받으셔야 합니다." 이렇게 큰 소리를 치면서도 마음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물었다. '너 자신 있어? 그렇게 말하고 이번에도 한 번에 채혈 못하면 그때는 어떡할래?'


일단 자신 있게 말을 뱉었으니 채혈을 하긴 해야 했다. 일생일대의 승부처였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환자의 침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채혈할 준비를 하는 동안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수백 개의 바늘이 온몸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보호자의 따가운 시선이 충분히 느껴졌다. 축축해져 가는 내 손과 미세하게 떨리는 호흡을 보호자가 눈치채지 못하기만을 바랐다. 평소보다 오랜 시간 동안 신중하게 혈관을 촉지 했다. 바늘의 각도를 45도 정도로 유지한 채, 바늘이 들어가는 순간에는 망설임 없이 찔러 넣었다. 완벽하게 채혈에 성공했다. 살았다.


그 일이 일어난 후 보호자는 나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의 일취월장하는 채혈 솜씨에 감동받아 친절한 보호자로 바뀌었다는 말은 아니다. 친절하지도 무례하지도 않았고 정말 아무 말이 없었다. 본인도 어느 정도는 무안함을 느낀 것일까? 그렇지만 어색하고 조용한 병실의 분위기가 오히려 더 불안했다. 실수를 조금이라도 했다간 다시 날 선 말이 날아와 꽂힐 것 같았다. 그거 봐라 다른 온라인 카지노 게임 불러달라 하지 않았냐.


분명히 대결(?)에서는 내가 승리했지만 기분이 전혀 좋지 않았다. 왜 이런 다툼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을까. 채혈을 한번 실패했다고 정말 그런 말까지 들어야 했을까. 그래도 내가 온라인 카지노 게임이니 참아야 했나? 참아야 한다면 언제까지 더 참아야 하는 걸까. 하루에도 수십 명의 환자와 보호자를 만나는데.


의학 교육이 대게 그렇다. 입원 동의서 같은 것에 그런 내용이 쓰여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경우, 보다 세부적이고 전문적인 의료 서비스를 받는 대신 환자는 의료진의 교육에도 일정 부분 동의 하고 참여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배우지 않으면 도저히 배울 수가 없다. 책, 영상, 모형으로 하는 교육은 반쪽짜리 교육이다. '실전과 같은 훈련'이라는 것은 의료 현장에서는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실전만 있다. 여기까지는 나의 입장이다.


늦었지만 환자와 보호자의 입장을 헤아려본다. 일주일에 적어도 세 번, 채혈 시간이 되면 억지로 잠에서 깨어 불안한 마음으로 손목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환자. 수도 없이 바늘에 찔린 상처 투성이의 손목을 만지며 어디를 또 찔러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어린 온라인 카지노 게임로부터 느껴지는 미숙함. 힘들게 검사를 하지만 모든 검사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듣지는 못하고 질병은 차도가 없어 보이니 답답한 보호자. 환자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와 보호자 간의 다툼을 보며 더욱 마음이 불편해지고,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내는 그들에게 단호한 나의 말이 무거운 짐을 더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우리는 상처를 고스란히 나눠가졌다. 어쩌면 우리를 이간질하는 것은 그저 질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는 하지 못했다. 언젠가 또 비슷한 다툼을 하게 된다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은 나이지 않을까. 우리의 감정싸움이 질병의 이간질이라는 걸 아무래도 내가 더 잘 알 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저 서로 다른 위치에서 질병과 싸우는 동지일 뿐임을 이제는 안다.



*동맥혈 온라인 카지노 게임: 동맥혈가스분석(arterial blood gas analysis, ABGA)이 정식 명칭이다. 동맥에서 혈액을 뽑아 분석하는 검사로 주로 심폐질환이나 대사질환이 있는 경우에 혈액의 PH, 이산화탄소, 산소, 중탄산염 농도 등을 확인하기 위해 시행한다.

**노동맥: 개정 이전 명칭은 요골동맥(radial artery)으로 위팔동맥(brachial artery)으로부터 분지 하여 아래팔의 가쪽에서 주행하는 동맥이다(해부학적으로 혈관은 '주행'한다는 표현을 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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