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너의 꿈이 이루어질 거야
웬만하면 따뜻하게 느껴질 햇살도 "나 추워요." 할 만큼 추웠던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소년은 홀로 여행을 나섰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를 타고 가는, 그렇다. 기차여행이었다. 창 밖으로 겨울 풍경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소년은 그런 창 밖을 보며 점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은 춥지 않았다. 오히려 소년을 잠들게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소년은 잠에서 깼다. 앗? 그런데 옆에 누군가 앉아있다.
"누."
누구세요?라고 묻고 싶은 소년이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묻지 않아도 될 만큼 겉모습에서부터 화려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다. 닭털인지 셔틀콕털인지 모를 그런 깃털들이 달린 관을 쓰고, 뺨에는 야구선수처럼 까만 줄 하나, 빨간 줄 하나 이렇게 두 개의 줄이 칠해져 있었다. 코는 높고 끝이 뭉툭했고, 머리는 검고 양갈래로 땋아져 있었다. 그랬다. 그는 카지노 게임이었다.
카지노 게임은 소년이 자신을 훑어보고 있는 것을 느꼈는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넌 카지노 게임을 처음 보니?"
소년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크게 고개를 세 번 끄덕였다. 누가 실제로 카지노 게임을 만나볼 수 있을 거라 상상했을까? 그것도 대한민국의 KTX안에서. 카지노 게임은 소년을 향해 미소 지으며 머리 커다랗고 두툼한 손을 소년의 머리 위에 얹었다. 뭔가 멋쩍은 상황이었지만 소년은 이상하리만큼 평온함을 느꼈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카지노 게임은 손을 내려 자신의 무릎 위에 얹고 앞을 바라봤다. 하지만 소년은 카지노 게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카지노 게임이 다시 소년을 바라봤다.
"할 말 있니?"
"아.. 아니에요.. 아.. 저 사실은.. 궁금한 게.. 카지노 게임인데 어떻게 그렇게 한국말을 잘하세요?"
"하하하."
카지노 게임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그리고는 다시 온화한 얼굴로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럼 카지노 게임은 어디 말을 할 것 같니?"
"영어요. 아.. 아닌가? 카지노 게임 말이요? 카지노 게임 말도 있죠?"
카지노 게임은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우리도 우리의 말이 있어. 그런데 아메리칸들에게 살 곳을 빼앗겼지. 그렇게 먼 이곳까지 와서 이곳의 말을 배워 살게 되었단다."
"거짓말."
"정말이야."
소년은 카지노 게임이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 생각하고 고개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참나 어이없어. 한국에 카지노 게임이 어딨어?'
"어딨긴. 여깄지."
소년은 생각을 했을 뿐인데, 그 생각에 카지노 게임이 대답을 했다. 카지노 게임은 어떻게 소년의 생각을 알았을까? 소년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카지노 게임을 보았다.
"넌 뭐가 되고 싶니?"
"장래 희망이요?"
"응."
"능력 있는 백수요!"
소년의 말에 카지노 게임은 피식 웃었다.
"난 꼭 나의 터전으로 돌아가서 아메리칸들을 내몰 것이란다. 다시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 거야."
"그게 아저씨 꿈이에요?"
"응. 그동안 능력을 길렀거든. 대한민국에는 좋은 산도 많고, 좋은 책도 많더구나. 내가 기른 이 능력이라면 충분히 그들을 몰아낼 수 있을 거야."
소년의 머릿속에는 "지리산에서 3년, 계룡산에서 3년"하는 사기꾼 도인들이 생각났다. 혹시 이 카지노 게임도 그런 과의 사람인 걸까? 하지만 너무 진지해 보였다. 소년은 의심 어린 눈빛으로 카지노 게임의 눈을 들여다봤다. 눈가의 깊은 주름처럼 블랙홀같이 깊은 카지노 게임의 눈에는 잠깐이지만 진심이 보이는 듯했다.
"초능력을 개발했어요?"
"하하. 아니. 초능력은 아니지만.. 흩어진 우리 카지노 게임의 후예들이 다시 모여 그곳을 되찾을 수 있는 능력은 되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단다."
그리고는 주위를 잠시 살피더니 소년을 향해 재빠르게 한쪽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 뭘 한 거예요?"
"윙크란다. 내가 너에게 내 능력을 조금 나누어준 거야. 방금 느꼈니? 나의 윙크에 담긴 힘을?"
사실 소년은 아무것도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 자신의 터전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터전으로 돌아갈 카지노 게임이라는 사실은 믿어 의심치 않게 됐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어느덧 기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소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정리했다. 카지노 게임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갈게요. 아저씨."
소년이 작별 인사를 건네고 둘은 잠시 동안 무언의 눈대화를 나누었다. 소년이 내리기 위해 카지노 게임을 지나쳐 통로에 섰을 때 카지노 게임은 소년의 손을 가만히 잡아당겼다. 할 말이 있는 건가 싶어 소년은 상체를 숙여 카지노 게임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카지노 게임은 소년의 귀에 이렇게 속삭이며 소년의 손을 놓아주었다.
"너도 너의 꿈이 이루어질 거야."
기차에서 내린 소년은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 쪽으로 뛰어갔지만, 기차 밖에서는 카지노 게임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도 내린 걸까? 아니면 화장실에 간 걸까? 아니면 엎드리기라도 한 걸까? 플랫폼에 서서 아무도 없이 빠져나가는 기차를 보며 소년은 깨달았다. 이곳이 저 기차의 종착역이라는 것과 지금 저 기차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꿈이 이루어질 것도.
그리고 소년의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의 간절한 꿈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