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을 한지 몇 달 안됐을 때건강검진을 받기위해 병원을 찾은 적이 있다.
아이를 낳고 간만에 한 외출이라 그랬는지 사람이 북적이는 병원 안에서 다소 불안감을 느끼며 우왕좌왕했다. 저 쪽에 마련 된 문진표를 작성하고 순서를 기다리라는 안내원의 말에 따라 난 문진표를 뽑아 작성하다가.. 멈췄다. 문진표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V 혼자서 밥을 먹을 수 있다. (YES)
V 혼자서 화장실을 갈 수 있다. (YES)
V혼자서 양치질을 할 수 있다. (YES)
V 혼자서 ....
....?
의기양양 자신있게 YES에 체크를 해대다가 문진표 위쪽을 보니 '65세 이상 작성하세요'라는 문구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살며시 펜을 내려두었다.
'어쩐지..'
의존적인 인간을 사랑하는 인간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난 적어도 '혼자 힘으로' 식사를 하고,화장실을 가고,옷을 입고,신발을 신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독립적이면서도 자유의지를 지난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이지 않은 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저 먼 과거 어느 지점 전까지 난 혼자서 밥을 먹기는 커녕 화장실도 갈 수 없고 옷도 입을 수 없으며 반경 5m안에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안보여도 세상이 무너지는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미약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리고 저 먼 미래 어느 지점에서부턴 운이 따라주지 않는 한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식사를 하고 배변활동을 해결하고 이동을 할 수 있는 늙고 지치고 병든 노인이 돼 있을 수도 있다.(그렇게 늙어 죽지 않기를 바란다.) 인간은 탄생하고 일정기간 반드시 타인에 온전하게 의지해 생명을 이어가야만 하며 노년에 접어들며 일정기간 역시 타인에게 온전히 자신을 맡기며 생을 마무리하게 되는 시간을 가지게 될 수 있다.
엄마와 아빠는 가끔 내가 전혀 기억도 못하는 어린 시절 내 말썽 피우던 모습들이 사랑스럽고 귀여웠다는 듯 말하곤 한다. 난 그 말들을 들을 때 마다 어리둥절하고 대체 왜 바지에 똥싼 이야기를 계속 해대는지 짜증이 난 적도 있었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 그 마음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부모는 내가 성인이 된 지금도 난 기억조차 안나는어린 시절 한 없이 의존적인 내 모습을 기억하며 날 사랑하고 있다.
산후도우미로만난 70대 아주머니가 신생아인 내 온라인 카지노 게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이런말을 한 적이 있다. 딸 둘을 키워 시집보냈다던 그 아주머니는 "인생에서 그래도 좋았던 날들이 몇 번 있었는데 그 중에서 최고로 기쁜 순간들은 내 온라인 카지노 게임들이 자라는 순간을 함께 한 시간들이었어요."
완전한 독립체였던 찰나의 순간
완전하게 의존적인 상태로 태어나 부모를 생명의 동아줄인 마냥 붙들고 살던 자식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들이 하나 둘 늘어가면서 신체적으로 우선 부모로부터 독립을 시도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신적,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경제적 독립을 이뤄내면서 부모의 곁을 떠나게 된다. 인간 사회에서는 생존만이 목적이 아니기에 효와 정 그리고 지속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 교류가 이어지지만 이를 두고 독립하지 못했다고 말하진 않는다.
직장생활 5년차 즈음 신체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만족할 만한 자유를 만끽하며 하고싶은 것을 누구의 간섭없이 누리며 내 목소리도 어느 정도 내며 살 수 있는 상태에 도달했었다. 그 시기 난 완전하게 독립적인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는 사회 일원으로서 꽤나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하며 살았다.
나 뿐만이 아니었다. 불과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난 의지대로 움직이는 완전체 같은 인간들만이 득실대는,내 몸 하나만건사하면 그만이라 생각이 드는 세상에서 살아왔다. 희생과 헌신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겨를 조차 없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전부 나를 위해 할애됐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부터 난 내게 주어진 시간의 대부분을 아이에게 할애하고 있다. 아이를 입히고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아이를 위해 쇼핑을 하고 아이에 대한 정보를 찾고 아이와 놀러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처음에는 내 삶에 갑작스레 찾아온 이 변화가 너무 갑작스러워 혼란스러웠다.산후우울증을 겪던 시기를 이제와 생각해보면 아마도 완전한 독립적인 인간기를 살아온 과거 나 자신에 대한 애도의 기간이었단 생각이 든다. 애도의 기간이 지난 지금 난 새로운 국면에서 기꺼운 마음으로 희생을 하고 있다. 누군가를 위해 살아 본 적 없던 인간이 누군가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기쁨을 만끽하는 중이다.
사람마다 육아를 하면서 느끼는 행복도나 고됨은 다를 수 있다. 이건 개별적인 정신관리 영역이므로 개인의 성향에 맞게 스트레스 관리를 필수적으로 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기꺼이' 아이를 위해 내 시간을 할애할 수 있고 그 안에서몸은 고되더라도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행복을 만끽 할 수 있다.
마중하고 배웅하고
한번은 9개월된 딸 아이 앞머리가 너무 길어 눈을 찌르자 집에서 셀프 미용을 도전한 적이 있다. 똥손임을 알게됨과 동시에 대참사가 벌어진 날이었다. 급하게 동네 미용실에 전화해 아기도 받는 지 물어보고 아이가 울 것을 예상해 최대한 손님이 없는 시간대에 예약을 했다.
평일 아침 오픈런을 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아이는 생전 처음 와본 미용실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면서 갑자기 울상을 지었다. 내가 아이를 안은 채 아이에게 일체형 턱받이와 커버보를 둘렀음에도 아이는 본격적으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부부 사장님 눈치가 보이면서 참 난감했다. 너무 죄송한 마음에 멋쩍게 웃으며 아이를 달래고 대충 앞머리만 고르게 일자로 잘라달라고 하고 빨리 나오려던 찰라 미용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뿔싸. 손님들에게 민폐가 되겠구나.' 싶어 누가 들어오나 고개를 돌려보니 휠체어를 탄 할머니와 젊은 딸이었다.
"엄마 오늘 머리 예쁘게 자르자." 젊은 딸은 마치 내가 100일쯤 된 아기를 데리고 첫 외출할 때 처럼조심조심 유모차를 밀듯 휠체어를 밀며 미용실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 여기 앉자. 저희 예약했는데 여기 앉을게요." 울고 있는 어린 딸아이를 안고 있는데 옆옆 자리의 노모와 젊은 딸의 모습이 우리의 미래이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울컥했던 기억이 있다.
부모세대는 자식세대의 완전히 의존적인, 그래서 자신을 한없이 내어주어어야만 했던시절을 평생 기억하며 죽는 순간까지 온 힘을 다해그들을사랑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는 끝없이 반복된다.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타인에게 내어주어야 하는 그 시간들이 왜 행복일지 이해가 가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
대부분 연인과의 사랑은 동시대를 향유한 또래와의 사랑이다. 특별한 케이스들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이와 노인에게 향하는 헌신과 사랑은 이전 시대를 살아온 인간이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인간을 돌보는 일이며, 자신의 시대를 누리며 사는 인간이 저물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을 배웅하는 일이다. 살아온 시간대가 달라 세대 갈등은 존재하지만 세대가 세대로 이어지면서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진 못해도 보살피고 배웅하며 인류는 역사에 존재하는 한 이어지고 있다.
네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위해 '기꺼이' 너의 의존을 수용한다
니체는 '진실한 사랑으로 가득한 행위는 의식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에게 난 절대적이고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희생, 헌신과 같은 거창한 단어가 무색할 만큼 아이를 위해 내 많은 시간이 할애되는 일상은 너무도 당연하게 다가온다. 아이가 사춘기가 오고 부모의 품을 떠나가면 다 쓸모없으니 너무 아이만을 위해 살지 말라고 중년의 선배 엄마들은 조언한다. 하지만 한번 더 이 말을 생각해보면 그건 사실 그 엄마들이 아이를 잘 키웠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혼자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아이가 다 자라 이제 모든 걸 혼자 힘으로 해내며 스스로 세상을 나가 살고 있다는 소리니까. 오은영 박사의 말처럼 육아의 최종 목적은 독립이니까.
너의 독립을 위해 난 너의 완전한 의존을 기꺼이 수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