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거만했기 때문일까. 시험을 우습게 봤던 죗값을 톡톡히 치렀다. 국어교육과가 아닌 '교직이수' 생의 설움은 덤이었다. 대학 시절 배운 지식은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분명 한 학기에 몇 백만원식 학비를 내며 들었던 수업은 임용고시에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불안함에 혼미해진 내가 흘러 들어간 곳은 노량진이었다.
좋다고 하는 수업을 들었지만 내 것으로 소화가 되지 않았다. 교육학, 국어교육학의 차이도 모르면서 기출문제를 푼다며 낑낑댔다.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려고 해도 늘 머릿속이 멍했다. 앉아는 있는데 이해가 되는 느낌은 없었다. 시험 삼아 시른 2009년, 첫해 시험은 쫄딱, 망했다.
다시 공부를 하는 게 맞을까 싶어 고민하던 내게 도움을 준 것은 둘째 이모였다. 공부를 하면 잘할 것 같은 조카인데 형편 때문에 망설이는 게 걸렸던 이모는, 첫 시험에 낙방하고 집에서 김장을 하던 스물다섯의 나에게 말했다.
"이모가 학원비 1년 동안 대줄 테니까. 아무 생각 말고 공부만 해. 알았지?"
떨어졌다고 좌절하며 시간을 보내기가 아까웠다. 평소 언니만 예뻐한다고 생각했던 이모였다. 나는 무뚝뚝한 조카라 왕래가 많지도 않았다. 그런 이모가 내게 선뜻 학비 지원을 해준 것이다. 고마움을 넘어선 감정이 밀려왔다. 부끄럽지 않으려면 최선을 다해야 카지노 게임.
2010년. 두 번째 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먹고서는 1월 1일부터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했다. 가족들이 다들 오늘 같은 날은 그냥 쉬라고, 만류했음에도 흐트러질 것 같아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기질 자체가 불안함이 높고 예민한 나는 쉽게 지쳤다.
전공과목은 알쏭 달쏭했고 교육학은 너무 어려웠다. 인터넷 강의를 들으면서도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한참을 고민카지노 게임. 공부가 잘 되지 않는 날은 우울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냥 그때 작가님 제안 받아들이고 방송국을 갔어야 하나?'
'따지고 보면 나 유리멘털인데. 고3 때도 독서실에서 매일 울었잖아.'
'하... 이렇게 임용고시 볼 거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부터 조금씩 준비할걸. 카지노 게임 도대체 뭐 하고 산 거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게 카지노 게임. 혼자서 긍정적인 생각을 도저히 짜낼 수가 없는 날이면, 우울의 밑바닥까지 흘러 내려가 혼자 말없이 울기도 했던 것 같다. 공부할 때 완벽히 통제가 되는 상황이 아니면 집중을 못했던 나는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게 있으면 불안카지노 게임. 그 불안은 자꾸만 나를 갉아먹었다. 그럴 때면 친구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무와도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숨고만 싶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다.
5월이었을 것이다.
싱그러운 날씨에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놀러 가기 위해 길을 나서고 있었다. 나는 무거운 가방을 메고 매일 같은 옷차림을 하고 독서실을 향해 걸어갔다. 다들 너무 예쁘고 멋져 보이는데 나만 너무 초라한 느낌. 나만 어떤, 시간에 머물러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임용고시를 보겠다고 한 걸까. 나는 과연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이러다가 영원히 백수로 남는 것은 아닐까.
의무감에 자리에 앉으면 한동안 마음속을 진정시키고 공부를 시작카지노 게임. 수험 생활의 80%는 멘털 케어에 힘쓸 정도로 불안하고 우울한 날의 연속이었다.
있는 짜증 없는 짜증을 그러모아 엄마에게 쏟아냈다. 당시 일 하면서 살림하면서 수험생 뒷바라지까지 한 엄마는 묵묵히 내 짜증을 받아주었다. 짜증 내고 후회하고, 또다시 짜증 내는 일상은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이렇게 살다가는 2009년의 악몽에서 벗어나질 못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울한 생각 그만, 자책 그만, 그리고 불안함 그만. 어찌 됐든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 감정의 소용돌이를 멈출 사람도 오롯이 나였다. 내가 나를 제일 잘 알기에 나를 다스려야 했다. 그래야, 1차 시험까지 무난하게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을 터였다.
그때부터 시작한 것이
전공 도서 맨 앞페이지에
미래의 나에게 힘이 되는 메시지를 쓰는 것이다.
- 2011년 국어 선생님
- 미래의 나에게! 카지노 게임 좋은 국어 선생님이 될 거야.
그런 문구를 쓰면서 스스로를 다스렸다. 그럴 수 있어, 나는 선생님이 될 수 있어, 나는 내년에는 학교에서 근무하게 될 거야. 하며 주문을 걸었다. 때로는 교육 심리학 책을 공부하면서 도움을 얻었다.
심리학 교재에 나오는 다양한 심리, 상담 이론이 큰 힘이 되었다. 지금 내가 이렇게 힘든 것은 비합리적인 신념 때문이구나,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면 되겠구나, 나는 여기서 발달이 멈춘 사람 같다, 하며 스스로를 이해하려고 노력카지노 게임. 비정상적으로 예민한 기질을 자책만 하며 살다가 처음으로 스스로 인정하려고 노력한 순간이었다.
어떤 날엔 스스로가 참 웃겼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고, 공무원으로 사는 삶은 너무 무료하고 지루하고 재미없고 심장이 뛰지 않아 싫다고 해놓고서는 그곳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참, 뭐랄까. 어이없기도 했던 것 같다.
한 달 용돈 15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아끼고 아껴 교재를 사고 강의를 들으면서, 매일 노량진에서 2,500원짜리 참치 김밥을 먹으면서도 또래 친구들과 비교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카지노 게임. 나도 언젠간 월급을 받아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예쁜 옷을 입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쓸 수 있을 거야,라고 상상하며 버텼다.
명절이면 지옥 같은 시간들이 이어졌다.
- 공부는 잘 되니.
- 어디로 시험을 칠 생각이니.
같은 질문을 듣기 싫어 독서실로 도망갔다. 누군가는 편하게 쉬는 그 길고 긴 연휴가 나에게는 끔찍한 시간이었다. 바깥이 밝을수록 내 안은 어두워져 갔다.
그 시절 악몽도 많이 꿨다. 시험장에 지각하는 꿈, 어디론가 도망을 가는 꿈, 그리고 불합격하는 꿈. 갖가지 악몽은 시시때때로 찾아와 나를 괴롭히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교생 시절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현장에 계신 선생님들이 대단해 보였다. 그들도 다 이런 경험을 하고 교단에 선 것이겠지. 그것도 모르고 나는 너무 쉽게만 생각했구나. 하며 반성도 많이 했다.
집에서 5분만 걸으면 중학교, 초등학교, 고등학교가 곳곳에 널려있었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갈 수는 있었지만 갈 수 없었던 것이 맞다.
지척에 널린 학교를 보며 간절히 기도카지노 게임. 제발, 내년에는 학교에 가게 해 주세요.
제가 그동안 무시(?)했던 것. 선생님이란 직업을 쉽게 봤던 것. 모두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 선생님이 되면 정말 정말 열심히 살게요.
하며 매일 밤 자기 전에 기도했다. 내일은 좀 더 나아지기를. 내일은 좀 더 선생님을 향한 길에 가까이 다가가기를.
불안과 싸우고 과거를 반성하고 멘털을 다 잡으면서 공부하기를 10개월째. 머릿속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당장 다음 주가 1차 시험일이었다. 최선을 다한 것 같지도 않고, 준비가 된 것 같지도 않은 상황에서 시험을 치러야 했다.
떨어지면 시험을 다시 치르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수험 생활을 세 번은 하지 못할 멘털이었다. 만약 삼수를 한다? 그러면 나는 말라죽을 것이었다. 하나, 만약에 합격해서 선생님이 된다면?
내 생에 가장 우울했던 2009년, 2010년을 잊지 않고 비슷한 고민을 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들어주겠다고 결심했다. 좋은 선생님이 되자, 따뜻한 선생님이 되자, 그러니까 일단 붙자.
10년이 지난 지금도 시험 날의 아침은 선명하다.
시험 전날은 <슈퍼스타 k2의 결승전인 허각, 존박의 무대가 있던 날이었고 나는 일찍 잠에 들었다. 내 옆에서 주무시던 우리 엄마의 코 고는 소리에 꽂힌 나는 1시간도 제대로 잠들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했고 이미 살짝은 패배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시험장까지 데려다주신 아빠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지금 학교에 없을 것이다.
한숨도 자지 못카지노 게임는 나에게 아빠는 이렇게 말카지노 게임.
"뭐든 마음먹기 나름이야. 아빠도 가끔은 한숨도 못 자고 일을 나갈 때가 있어. 그런 날엔 생각하지. 까짓 거 잠 조금 못 잔 게 대수야? 하루를 못 버티겠어?"
"그러니까. 생각에 휘둘리지 마. 할 수 있어."
그 말을 듣고 몇 번을 되뇌었다. 그래, 까짓 거 잠이 대수야? 10개월 동안 열심히 했잖아. 괜찮아. 다 풀 수 있어. 다 풀고 나올 수 있어. 하고.
그리고 이듬해 1월 말.
카지노 게임 명단에서 내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