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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9시간전

천 원 지폐 카지노 게임 추천 원본, 직접 볼 수 있는 기회

호암미술관의 겸재 정선 전시, 국보와 보물 합쳐 무려 165점


카지노 게임 추천▲호암미술관 전경 ⓒ 문하연


2025년 열리는 전시 중 내가 가장 기다렸던 전시가 드디어 문을 열었다. 호암미술관의 '겸재 정선'(1676~1759) 전시로 국보 2점과 보물 57점을 합쳐 무려 165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호암미술관 마당에는 전통 정원이 있는데, 사계절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이 펼쳐지고 그림처럼 자리한 호수와 건넛산은 벚나무가 많아서 꽃이 만개할 땐 환상적이란 말도 부족하다.


이번 전시는 삼성문화재단과 간송미술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개최, 사상 최대 규모다. 산수화는 비슷비슷해서 이 산이 저 산 같고 이 그림이 저 그림 같아 보인다. 그런데 겸재 정선의 그림은 뭐가 그렇게 특별해서 국보가 되고 보물이 되었을까? 그가 진경산수화의 창시자라는데 그건 맞는 말일까? 진경산수화란 대체 무슨 말일까?


카지노 게임 추천▲금강전도(국보/ 종이에 수묵담채), 전시장 촬영 ⓒ 문하연/ 개인소장


첫 번째 방에 들어가서 처음 만나는 그림은 바로 이거다. 컴컴한 전시실 가운데 홀로 조명을 받고 있는 이 그림은 금강전도로 겨울 금강산을 '직접 보고 그린 그림'이다. 금강산은 일만 이천 봉우리만큼이나 이름도 많은데,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엔 개골산이 그것이다.

먼저, 카지노 게임 추천에 있는 한자를 해석하면


"만 이천 봉 개골산, 어느 누가 참모습을 그릴런가?
온갖 향기 동해 밖으로 퍼지고 쌓인 기운은 온 누리에 서려 있다.
몇 송이 연꽃은 해맑은 자태 드러내고 소나무 잣나무 숲에 절문이 가려져 있네.
비록 걸어서 이제 두루 본다 하여도 어찌 베갯머리에서 이 카지노 게임 추천을 보는 것만 하리오"


직접 가봐야 다리만 아프니 차라리 카지노 게임 추천을 보는 게 더 낫다는 말이다. 하긴 한양에서 출발해 금강산을 둘러보려면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은 걸렸으니, 돈이 있다고 한들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동해와 맞닿은 금강산의 위용을 한눈에 잘 드러낸 이 작품은 매우 세부적이고 사실적이다. 카지노 게임 추천엔 정양사와 만폭동, 금강대와 사자바위, 보덕굴, 묘길상, 혈망봉과 가장 높은 봉우리인 비로봉까지 금강산의 명소가 깨알같이 다 들어가 있어 그 핍진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정선은 이처럼 금강산 전체를 아우르는 금강전도뿐 아니라 각각의 명소도 따로 떼어 세부적인 작품도 그렸는데, 이것들을 모아 '신묘년풍악도첩'을 만들었다. 풍악이란 말이 들어갔으니, 가을 금강산이란 말이다. 신묘년 가을에 만든 이 화첩에는 총 13점이 들어있다. 그럼, 정선은 어떻게 금강산에 갈 수 있었을까?


정선은 지금으로 보면 종로구 청운동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경복고등학교에 그의 생가터가 남아 있다). 대대로 선비 집안이었지만, 3대째 벼슬에 오르지 못해 가세는 형편없이 기울었고 설상가상 14살에 부친까지 사망하자 그는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정선은 먹고살기 위해 화가가 될 결심을 한다.


비록 몰락했지만 양반 집안이라 당시 유명한 문인 김창흡 밑에서 공부할 수 있었는데, 결국 이 집안의 도움으로 37세에 세자익위사라는 벼슬을 얻게 된다. 세자익위사는 세자가 행차할 때 앞에서 길을 내는 하급 관리다. 그리고 김창흡 문하생 시절 만난 친구가 그의 일생 브로맨스 파트너 이병연이다.


1711년, 이병연이 금강산 인근 금화현감으로 있으면서 스승 김창흡과 정선을 금강산 여행에 초대했고 이때 처음 금강산을 여행한 정선이 '신묘년풍악도첩'을 만든 거다. 여기에 나온 13곳은 당시 금강산의 핫플로 반드시 가보아야 할 곳이었다.


다음 해 다시 금강산을 찾은 정선은 산과 바다(금강산과 동해)를 보며 그림을 그렸고 이병연과 김창흡은 시를 지었는데, 이를 합쳐 만든 것이 해악전신첩이다. 그때까지 무명 화가였던 정선은 이 화첩으로 인해 금강산을 가장 잘 그리는 일타 작가로 급부상한다.


당시 선비들 사이에서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그것을 글로 기록하거나 그림으로 소장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정선의 그림이 이들을 위한 지도 역할을 했고 또 금강산의 경치를 집에서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으로의 역할까지도 겸했으니, 그의 그림은 회화적인 측면과 실용적인 측면을 다 가진 것이다.


이후 정선은 다시 한번 해악전신첩을 완성하고자 72세의 나이에 다시 금강산을 방문해 더욱 완성된 작품을 그려냈는데(후 해악전신첩) 그 작품들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정선 이전의 그림을 말할 때 흔히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거론한다. 안평대군이 꾼 꿈을 안견이 재현한 이 그림은 실제 경치를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상상해서 그린 그림으로 이를 관념산수화라고 한다. 이 시대엔 중국의 영향으로 신선이 살 법한 산수를 상상해서 그리는 관념산수화가 일반적이었다. 이와 반대되는, 실제 경치를 보고 그린 그림을 실경산수화라고 부르는데, 그럼 이 분야에 있어 정선이 최초일까?


아니다. 우리 산천은 고려시대부터 그려져 왔다. 그렇다면 실경산수화와 진경산수화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실경산수화는 기록에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에 반해 진경산수화는 기록뿐 아니라 회화의 기능, 즉 예술성을 지녔다는 데 그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실제 경치를 그린 그림은 정선 이전에도 있었지만, 정선은 예술성을 겸비한 그림을 그림으로써 진경산수화를 창시했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금강전도로 돌아가자. 이 그림은 첩첩산중인 금강산을 마치 손바닥에 올려놓은 것처럼 환히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려져 있다. 드론이 있을 리 만무한데 어떻게 이런 전경을 그릴 수 있었을까. 정선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조로 그리되 강조하고 싶은 곳은 과장하고 어떤 것은 과감하게 생략했다. 즉 실경이되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작가가 의도대로 그린 것이다. 또 다른 그의 대표작을 보자.


카지노 게임 추천▲인왕제색도(국보, 종이에 수묵), 전시장 촬영 ⓒ 문하연/ 국림중앙박물관


정선이 76세에 그린 인왕제색도(1751)이다. 고 이건희 회장 기증품으로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작품은 비 갠 후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우뚝 선 바위는 화강암으로 원래는 하얀색에 가깝다.

정선은 이 부분을 검게 칠해 비에 젖은 화강암을 표현했고 중간에 안개를 띠처럼 그려 여백을 만들었다. 이 그림도 위에서 보는 시점과 정면에서 보는 시점이 공존한다. 정선은 자기가 생각하는 '인왕산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시점이 여러 개인 '다시점'을 쓴 것이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대로 그린 점, '다시점'을 쓴 것은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을 떠오르게 한다. 따지고 보면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정선이 세잔보다 앞서있다. 그림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의 실제 경치를 '자기만의 시선과 생각'을 담아 그렸기에 그의 그림이 특별한 것이다.


금강전도나 인왕제색도는 압도적이었지만, 내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은 따로 있었다. 정선은 1740년, 65세의 나이에 양천현(현재 가양동 일대) 현령으로 발령받았는데, 정선과의 이별이 아쉬웠던 이병연은 "내 시 자네 그림 서로 바꿔봄에 그 사이 경중을 어이 값으로 논하여 따지겠는가?"라는 시를 써서 보냈고, 그 화답으로 정선이 그림을 보냈는데 그게 바로 '시화환상간도'이다. 마치 교환 일기처럼 글과 그림을 바꿔보자는 약속인 '시화환상간도'.


▲시화환상간도(보물, 비단에 수묵담채). 간송미술재단


그림 속엔 두 노인이 비단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있다. 정면으로 보이는 이가 이병연이고 뒷모습이 보이는 이가 정선으로 추정된다. 이별이 못내 아쉬운 두 친구는 시와 그림을 교환할 것을 약속하고 훗날 그것을 모아 묶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경교명승첩'(서울 근교의 경치를 그린 그림첩)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서촌에서 가양동으로 간 것이기에 유난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를 생각하면 쉬운 이동 거리는 아니었다. 이 화첩은 현재 상하 두 권으로 나뉘어 있지만, 원래는 한 권이었다. 상권에는 정선의 자화상이 들어있는 그림(독서여가도)을 포함해 19점이 있으며 하권에는 14점이 담겨있다. 경교명승첩에는 양천현에서 바라본 남산의 일출, 압구정, 양화진, 난지도 일대 등 당시 한양의 모습이 상세히 그려져 있어 현재 모습과 그때 모습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다.


이병연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정선이 인왕제색도를 그렸다는 해석도 있다. 인왕산에 비가 개듯 친구의 병이 사라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정선의 바람이 무색하게 이병연은 그림이 완성되고 3일 만에 숨을 거둔다. 어린 시절 김창흡의 문하생으로 만나 함께 금강산을 유람했고,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편지를 주고받았던 친구의 죽음 앞에 정선의 심경은 어땠을까.


▲계상정거(보물, 종이에 수묵)/ 삼성문화재단


마지막으로 소개할 그림은 이것이다. 이 그림 익숙하지 않은가? 맞다. 천 원 지폐 뒷면에 나온 그림 '계상정거'다. 계상정거는 안동에 있는 이황의 도산서원을 그린 것으로 자세히 보면 이황이 완락재에 앉아 있다. 정선의 외조부 박자진은 오래전 이황이 남긴 서문을 송시열에게 전해주고 발문을 받았는데, 이 과정을 정선이 4개의 그림에 담았고, 그중 하나가 계상정거다. 이황과 이어지는 자기 가문을 표현한 그림으로 가문에 대한 자긍심을 엿볼 수 있다.


정선은 풍경을 그릴 때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 넣었는데 아무리 작게 그린 사람이라도 그가 선비라면 도포에 갓까지 쓴 완벽한 모습으로 표현했다. 가뜩이나 시력이 나쁜 나는 핸드폰으로 그림을 찍어 확대해야 겨우 찾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디테일을 그는 단지 점과 선만으로 확실히 표현했다. 놀라웠다. 아마 그의 시력은 매의 눈에 가까웠던 것 같다.


또 정선은 다작의 왕이다. 기록에 의하면 정선은 그림 주문이 삼대밭처럼 많았고 그가 사용한 붓은 무덤을 이룰 정도였다. 그림을 주문하는 사람은 꼭 양초를 보냈고 정선은 80이 넘은 나이까지 안경을 쓰고 매일 밤늦게까지 성실하게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런 성실함 덕분에 이 많은 작품이 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글 쓰는 게 힘들다는 엄살이 쏙 들어간다.


이 외에도 고사인물화, 풀과 곤충을 그린 초충도 등 걸작들이 많으니, 고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꼭 들러보시길 추천한다. 인왕제색도는 해외 전시 일정으로 인해 5월 6일까지만 전시되니 인왕제색도를 보고 싶다면 서두르시라.


세상이 꽃 천지다. 전시를 가지 않더라도 눈만 돌리면 명화가 산천에 걸려있다. 그렇더라도 어느 날 문득 수묵화의 진한 감성을 느끼고 싶다면 호암미술관으로 달려가자. 가는 길에 마중 나온 (자연이 그려놓은) 작품에 이미 행복은 떼놓은 당상일 테니.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전시도록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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