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량 : 200자 원고지 16장
쉽고 편한 일보단, 힘들어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20대 청춘을 오롯이 바쳤다. 이토록 급변하는 시대에서 직장에만 의존하는 건 위험하다고 봤다.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게 꿈이었던 만큼,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나만의 일을 찾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딪히는 일마다 차마 넘기 힘든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 탓에, 매번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직장을 옮겨 다니기 일쑤였다. 그렇게 난 별다른 재주도 없이 나이만 진득하게 먹어가다 30대를 맞이했다. 예전엔 나이 서른쯤이면 비로소 삶의 안정권에 들어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 속 서른의 난 변변찮은 직업도, 모은 돈도 없는 루저에 불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에게서 자기네 공장으로 들어올 생각 없냐는 연락을 받았다. 원래 같으면 단칼에 거절했을 법한 제안이었다. 밤낮 바뀌는 교대근무는 하고 싶지 않았고, 가족도 친구도 없는 낯선 지역으로 넘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혼까지 생각했던 여자친구와도 헤어진 마당에 딱히 갈 곳도, 마땅한 계획도 없어서 마지못해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그 결정이 내 인생에 얼마나 커다란 변화를 불러올지는 꿈에도 몰랐다.
공장에서의 교대근무는 의외로 할 만했다. 일하다 보면 시간도 잘 가고 밤낮 바뀌는 생활도 쉽게 적응했다. 2인 1실인 것만 빼면 기숙사도 괜찮았다. 술집, 밥집, 카페 등 거의 없는 게 없는 번화가 근처에 위치한 곳이었다. 길 건너편에 현대 감성이 물씬 풍기는 신축 도서관이 있는 것도 좋았다. 유일한 취미라곤 독서뿐인 내게 도서관이 근처에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위안이 되었다. 지역 독서모임에도 가입했다. 30대 직장인이 자연스럽게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경로로는 모임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가진 건 쥐뿔도 없었지만 결혼에 대한 의지는 확고했다.
그렇다고 사냥감을 찾아 떠도는 하이에나처럼 어리석게 속내를 드러내진 않았다. 오히려 책을 더 열심히 읽었다. 독서라는 명확한 주제가 있는 모임에서 나를 건전하게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은 독서를 열심히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모임이 열리면 대부분 참석했다. 열띤 토론의 중심엔 항상 내가 있었다. 그렇게 활동을 열심히 하다 보니, 한날 모임장으로부터 운영진 해 볼 생각 없냐는 반강제적인(?) 제안을 받게 되었다. 이후 운영진이라는 감투를 쓰게 된 기념으로 작은 모임을 하나 마련했다. 왕성한 활동 덕에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얻던 나였다. 그런 내가 준비한 모임이니만큼 참석자가 많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고작 한 명뿐이었다.
다만,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혼자서 오신 분은 또래로 보이는 여성분이었다. 똑단발, 새빨간 매니큐어가 발린 손톱, 금가락지 귀걸이, 쇄골이 훤히 드러나는 실크 스웨터를 입고 있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삽시간에 내 마음을 사로잡을 만했다.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에는,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질문하고 경청하는 게 중요하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난 데일 카네기를 믿어 보기로 했다. 쉴 틈 없이 질문했고, 평소답지 않게 리액션을 크게 하는 데 갖은 애를 썼다. 생애 마지막 소개팅을 앞둔 사람마냥 일말의 관심이라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녀와의 첫 만남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하지만 대화 도중 내가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는 주선으로 만난 남자와 연락하고 있고, 그날도 그 사람과 만나고 왔다는 것. 두 번째는 대기업 직장을 다니고 있다는 것. 세 번째는 본인 명의로 된 34평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다는 것. 그나마의 희소식은 신기하게도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서로 모셔갈 법한 그녀가, 그런 곳에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나 따위에게 마음을 기울일까 싶었다. 현실적으론 성립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독서모임을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며 다짐했다. 독서모임은 다른 데도 많지만, 인연은 한 번 놓치면 끝일수도 있으니까.
다행히 그녀와 나 사이엔 책이라는 연결고리가 있었다. 책을 핑계 삼아 이래 저래 둘러댄 덕분에 술도 한 잔 하고, 동네 공원에서 가볍게 산책도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우린 단순 독서모임에서 만난 사이를 넘어섰고 말도 편하게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녀가 '넌 정말 좋은 친구다'라는 가시 돋친 칭찬을 수차례 일삼지만 않았어도, 난 당시의 상황을 완벽한 그린라이트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소개팅남과 연락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날 마음에 두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대놓고 좋아하는 티를 내는 내게 선을 그어, 더 이상 넘어오지 말라고 주기적으로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애초에 난 그녀와 친구로 남을 생각이 없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낸 소위 여사친들도 결혼식을 기점으로 연락을 끊은 마당에, 아예 안 보면 안 봤지 애매한 관계로 남긴 싫었다. 서로에 대해 충분히 알 만큼 지냈음에도 그녀는 좀처럼 날 남자로서는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슬슬 그녀로부터 멀어지기로 마음을 먹고 있는데, 느닷없이 고백을 받게 되었다. 사실 좋아한다고.
"우리 처음 본 날 어떻게 혼자 올 생각을 한 거야?"
"단톡방에서 책 얘기 하는 거 보니 보통은 아닌 것 같더라고. 어떤 사람인지 한 번 보고 싶었거든."
"그동안 왜 그렇게 밀어낸 거야?"
"난 키 크고 잘생긴 남자 좋아하는데, 넌 아니잖아. 근데도 자꾸 마음이 가더라.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좀 필요했어."
우린 사귄 지 반 년 만에 결혼을 약속했고, 그로부터 다시 반 년 후에 돌잔치홀에서 단출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한 번의 유산을 겪고 어렵게 만난 소중한 아들과 셋이 된 우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나날을 함께 보내고 있다.
난 생각한다. 나 같은 놈이 감히 카지노 게임 사이트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건, 비로소 책을 삶에 들인 덕분이라고. 쓰라린 실패의 쓴 맛을 삼키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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