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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Apr 29. 2025

쉬운 길보단 힘들어도 의미 온라인 카지노 게임 길을

분량 : 200자 원고지 21장


대구촌놈이었던 내가 첫 직장을 서울 역삼동에 있는 회사로 취직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서울로 올라가면서 성공하기 전까진 고향땅을 밟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난 군생활 도중 우연히 책을 읽게 되었고 이후 삶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 여파로 공부와 담 쌓고 살던 내가 무려 과탑을 찍고 전액장학금을 받아보는 작은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 있었다. 대학교 때만큼만 열심히 하면 어느 곳에서든 인정받아 성공할 줄 알았다. 그러나 사회라는 정글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내가 들어간 회사는 실내디자인이라는 전공과 직결된 인테리어 회사였다. 듣기로는 업계에서 2군 정도 되는 회사라더니 공사 규모가 꽤 컸다. 처음 파견된 곳은 대전에 있는 아웃백 스테이크하우스 현장이었다. 거기서 현장소장이자 부서 내 직속상사인 과장님, 그리고 현장 청소 및 잡무를 담당하는 직영반장님과 함께 두 달 반동안 숙소생활을 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직장동료들과의 장기간 숙소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퇴근하면 반강제로 술을 마셔야 했고, 공사기간이 빠듯해 주말에 쉬는 건 기대할 수 없었다. 대전에서의 일이 끝날 때쯤 몸무게는 20kg나 불어 있었다.


이후 두 번째로 팔려간(?) 곳은 무려 백화점 공사 현장이었다. 근데 난 거길 가지 말았어야 했다. 백화점 내부 공사가 진행되는 4개월 보름 동안 겨우 두 번밖에 쉬지 못했다. 그마저도 한 번은 예비군, 한 번은 고향에 온라인 카지노 게임 친구의 결혼식을 핑계로 겨우 쉴 수 있던 거였다. 아침 6시에 집을 나서면 밤 11시쯤은 돼야 돌아오는 게 일상이었다. 업무 환경이 열악하면 사람끼리라도 잘 지내야 할 텐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유부남인 공사 과장은 말단 설계 직원과 바람을 피웠고, 설계팀장은 공사 기간 동안 세 번이나 바뀌었으며, 그 외의 직원들은 버티기 힘들단 이유로 말도 없이 결근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통장에 꽂히는 월급은 세금 떼고 147만 원인데 자취방 월세가 54만 원이라, 뼈 빠지게 일하고 남는 수입은 달에 100만 원도 채 되지 않았다.


다만, 퇴사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회사 선배들처럼 살기 싫어서였다. 선배들의 삶은 곧 나의 미래였다. 그것도 맡은 바 최선을 다했을 때에나 마주할 법한 미래였다. 그런데 직급이 오르면 월급은 쥐꼬리만큼 올라가는 데 비해 가중되는 책임은 곱절로 늘어났다. 가뜩이나 서울이라 물가도 비싼데, 그만큼의 월급으로 대체 집과 차는 어찌 장만하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평생 빚에 허덕이던 부모님 밑에서 자란 탓에 어떡해서든 빚만큼은 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월급만으로는 기본적인 생활조차 감당키 버거웠으니,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차마 실패를 인정하고 싶진 않았으나, 결국 난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른 길을 찾기로 했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험난해도 그저 열심히만 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다 해결될 줄 알았다.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게으르고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바깥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개 열심히 살고 있었다. 열심히는 기본 중에 기본이었으며, 나만 부릴 수 온라인 카지노 게임 특수한 마법이 아니었다.


이후 부끄럼을 무릅쓰고 가족과 친구들이 온라인 카지노 게임 고향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리고 궂은 일, 험한 일 가리지 않고 기회가 닿는 모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내장목수부터 개발자 공부까지 다양한 일을 전전했다. 좋게 보면 다양한 경험을 한 셈이지만, 나쁘게 보면 딱히 재주도 없이 나이만 진득하게 먹어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난 삼십 대가 되어 있었다. 20대에는 시간이 많다는 생각에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른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하다 안 되면 다른 거 하면 되지' 마인드는 온데간데 없이, '하다 안 되면 어떡하지'와 같은 불안감이 쥐도 새도 모르게 마음에 들어차 있었다.


그로부터 2년의 세월이 쏜살같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방황하고 온라인 카지노 게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자신감은 땅바닥에 곤두박질친 지 오래였다. 그야말로 인생 그래프가 최저점을 기웃거리던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자정이 다 된 시간에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 우리 회사 온라인 카지노 게임올래?"


평소처럼 헛소리나 할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게 되었다. 원래 같으면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어야 했다. 그 친구는 다른 지역에 있는 한 중견 철강회사에서 교대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난 공장에서 일할 생각이 없었다. 야간 일을 했다가 생활리듬이 망가진 경험이 있어 밤낮 바뀌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난 망설이고 있었다. 마땅히 오갈 데도, 그다지 뾰족한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필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느닷없이 날아온 제안이었다. 그래서 썩 내키지 않았음에도 결국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구원의 손길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답 없는 인생으로부터 도망치듯, 마지못해 연고도 없는 지역으로 넘어갔더니 인생이 급속도로 풀리기 시작온라인 카지노 게임. 그곳에서 반 년 만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사귀게 되었고, 다시 반 년 만에 아내와 결혼을 약속온라인 카지노 게임. 더불어 운 좋게 기회가 생겨서 결혼식을 코앞에 둔 시점에 대기업 공장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전보다 일은 할 만한데 연봉은 훨씬 셌다. 한 달에 세금을 다 떼고도 400만 원에 가까운 금액이 통장에 꽂히기 시작온라인 카지노 게임. 갚을 빚도 없어서 저축하는 금액만 최소 300만 원에 달온라인 카지노 게임. 그때 난 다른 건 몰라도 더 이상 돈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아도 되겠다고 생각온라인 카지노 게임.


그러나 하늘이 그곳에서 날 꺼내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3개월의 수습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위기가 찾아왔다. 이직한 곳은 주물공장이었다. 용광로 앞에서 일하던 분이 크게 다치는 바람에 빈자리가 생겼는데, 그 공석을 내가 메꾸게 된 것이다. 까다로운 공석을 막내로 수습하는 건 그곳의 암묵적인 관례인 듯했다. 여하튼 난 컴퓨터 책상에 가만히 앉아 금형에 온라인 카지노 게임갈 모래를 관리하다가, 하루아침에 가장 위험하고 힘든 일을 떠맡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 험난한 일을 할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이직하지도 않았을 거였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기에 일단 이 악물고 버텨보기로 했다.


약 1,600도에 달하는 쇳물 앞에서 일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매일 수명이 깎이는 듯한 기분이 들 만큼 힘들었고, 살도 많이 빠졌다. 한 번은 퇴근 후 집에 온라인 카지노 게임섰을 때, 내 몰골이 얼마나 엉망이었으면 아내가 날 붙잡고 엉엉 운 적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직한 공장에는 쉬는 날에도 출근해야 하는 문화(?)가 있었다. A가 연차를 쓰면 B, C, D 중 한 사람은 쉬는 날을 반납해야 했다. 강제는 아니었지만 그런 상황에서 내빼면 나중에 내가 연차를 쓸 때 곤란했다. 그러니 웬만해서는 쉬는 날에 나오라면 나가야 했다. 그럼 그렇지. 별 볼 일 없는 내게 많은 돈을 주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초여름의 황금빛 노을이 온 세상을 비출 무렵, 야간 출근을 위해 회사로 가고 있었다. 길가엔 각자 제 갈길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근데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젊은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유모차를 끌며 서로의 얼굴과 아이를 번갈아 보며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보기 좋았다. 밤새 일해야 한다는 우울감이 사라질 정도로. 부러웠다. 그들에겐 평범한 저녁이 내겐 가끔 누릴 법한 특별한 순간이 돼버렸으니.


한 폭의 그림 같던 그 부부의 모습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돈을 받는 대가로 일상을 반납한 현실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대로 살면 남는 거라곤 상한 몸과, 노후를 책임지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밖에 없을 터였다. 쉽고 편한 길보다는 힘들어도 의미 온라인 카지노 게임 길을 택하며 살아온 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서였다. 일상을 챙기지 못하는 가장에게 그런 미래는 다가올 리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돈을 포기하고 인생을 구하기로.


그 후로 난 빨간 날 다 쉬는 9 to 6 사무직으로 직장을 옮겼다. 비록 연봉은 반토막이 났지만 그만큼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글쓰기를 발견했다. 단순 취미에 그칠 줄 알았던 글쓰기는, 어느새 하루도 쓰지 않으면 좀이 쑤실 정도로 좋아하는 일이 되었다. 그렇게 난 32년 만에 '글 쓰는 삶'이라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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